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80) (80/124)

<80화>

인사를 건네려던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발레리안은 ‘그 아이’가 테레지아를 지칭하는 것임을 깨닫고 곧장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분노로 인해 그의 이마와 목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 아이는 내 딸이다. 후계자로서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함께하고 싶다 하여 데려온 것일 뿐이니 혀 놀림을 삼가라.」

첫인사치고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살벌한 말이었다. 족장이 무례하다며 지금 당장 무기를 뽑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하지만 족장은 발레리안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게 되었음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단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빤히 관찰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군.”

작게 중얼거린 족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실 그는 내심 얼음고래의 실종이 에버딘의 짓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까스로 잡은 흔적들은 전부 크렘위든 제국의 동부로 이어졌으니까.

그래서 에버딘 공작이 저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심부터 들었다. 게다가 성인들도 곧잘 얼어 죽곤 하는 이 동토에 웬 아이를 데려왔다는 것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여차하면 아이를 인질로 삼아 빠져나갈 생각인 건가.’

그런 의심을 바탕으로, 족장은 일부러 발레리안을 도발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모욕하는 말보다 아이를 인질로 칭했음에 먼저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정했다.

여리고 약한 걸 서슴없이 해치는,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족속은 아니다.

그렇다면 한 번쯤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 주어도 괜찮겠지.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가, 제국의 공작이여. 자백이라도 하러 왔는가?”

발레리안 역시 족장이 자신을 시험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가 서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토의 영물인 얼음고래가 최근 들어 잦게 실종된다지.」

“…….”

「결론부터 말하자면, 얼음고래들의 실종은 에버딘의 짓이 아니다. 우리도 며칠 전에야 수도에서 암암리에 이리트 염료가 판매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으니까.」

‘이리트 염료’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족장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가 의자 팔걸이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기어코 그 욕심을 버리지 못했는가.”

짧게 중얼거린 족장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우선은 발레리안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 보자는 마음이었다.

발레리안은 입안으로 한참 말을 고르다가, 결국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 친우가 수도에서부터 흔적을 더듬고 있으나 워낙 유력 귀족들과 연관되어 있는지라 쉽지 않다더군. 해서 나는 반대로 동토에서부터 흔적을 따라가 볼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너희가 조사를 핑계로 남은 증거마저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들은 전부 제국의 동부로 이어졌다.”

내내 분노를 삭이던 족장이 결국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그의 눈에 습관 같은 경멸이 어렸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침착했다.

「에버딘이 동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나, 동부의 모든 국경이 에버딘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궤변이로군.”

「그럼 일부로 전체를 단정 짓는 당신의 주장은 타당하단 말인가? 우리가 얼음고래를 밀렵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으면서 상대를 매도하는 게 당신들이 말하는 ‘순리’인가 보군.」

“…….”

발레리안은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반박했다. 그에 할 말이 없어진 족장이 침묵을 지켰다.

발레리안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두통이 이는지 중지와 약지로 관자놀이를 한번 꾹 누른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나 역시 얼음고래족과의 불화를 일으키려 했다는 오명을 쓰는 건 원치 않는다. 그러니 내가 이 일의 주모자를 잡아 낼 때까지 무고한 주민들을 건드릴 생각은 마라. 내가 할 말은 이게 전부다.」

“만약 싫다면?”

「응대해야겠지. 받은 만큼, 똑같이.」

금빛 눈에 찰나 살기가 스쳐 갔다.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다.

분명 마을에 들어올 때 무기를 거두어들였건만. 발레리안의 살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족장은 발레리안에게서 잘 벼린 살기가 느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무기를 뽑아 들 뻔했다. 마치 이를 드러내고 몸을 낮추는 맹수를 마주했을 때처럼.

다행히 족장은 오랜 세월 기른 평정심 덕에 발레리안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않을 수 있었다.

할 말을 모두 전한 발레리안이 침묵하는 동안 족장은 치열한 고민에 잠겼다. 양손을 깍지낀 채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가 불현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생명은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야 하는 법이지만, 그 순리를 무시하고 짓밟으려 한 자들에게까지 그런 축복을 내릴 필요는 없지.”

그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고민을 마쳤는지 족장이 홀가분한 얼굴로 허리를 반듯이 폈다.

“주동자들을 잡으면 그 목숨을 우리에게 넘겨라. 우리 식대로 처리하지. 동의한다면 협조하겠다.”

삐뚜름한 입매에서 숨기지 않은 잔혹성이 드러났다. 평소에는 물 흐르듯 살아가도, 필요할 때는 더없이 잔인해지는 것이 바로 얼음고래족이었다.

발레리안도 얼음고래족의 처벌이 상당히 잔혹할 것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테레지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발레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대신 그들의 신상을 넘기는 건 우리 측 조사가 끝난 후로 하지.」

“좋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합의’라는 것이 이루어지자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앉겠나? 차라도 한잔하지.”

발레리안은 말없이 족장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발레리안을 이곳까지 안내한 청년을 불러 차를 가져오라 시킨 족장이 뒤늦게 궁금함을 드러내며 눈을 빛냈다. 그가 발레리안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찻물을 따라 주며 물었다.

“그럼 아까 바깥에서 우릴 쓰레기라고 외치던 애가 친딸인가?”

막 찻잔을 집어 들던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눈을 한번 깜박인 그가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친딸은 아니지만 그만큼 아끼는 아이다. 봤나?」

족장이 이어서 제 찻잔에도 차를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밉지 않게 혀를 끌끌 찼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못 듣나? 어느 맹랑한 녀석인가 싶어 잠깐 창문 밖으로 내다봤지.”

「보지 마라, 닳는다.」

“……뭐?”

족장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찻물이 넘치는 것도 외면한 채 발레리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진지한 몸짓으로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잠깐 미쳐서 헛소리를 지껄인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친놈인가.’

하긴. 제정신인 인간이 살인귀 소리를 들을 리는 없겠지.

발레리안의 이명 덕에 의외로 납득은 빨랐다. 족장은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자식을 아껴서 나쁠 건 없지. 목소리가 아주 똑 부러진 게 오냐오냐 받는다고 해서 엇나갈 아이도 아닌 듯했고.

족장은 남의 가족에게 관심 끄고 차나 마시기로 했다. 그의 부족과 얼음고래들을 생각하기에도 머릿속이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족장은 끝끝내 제 몫의 차를 마시지 못했다. 그가 막 찻잔을 입술에 대려는 순간 밖에서 소란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뭐지?”

족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바깥에 귀를 기울이던 발레리안이 어느 순간 표정을 확 굳혔다.

「피 냄새가 난다.」

발레리안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 말에 놀란 족장이 한발 늦게 그의 뒤를 따랐다.

“……와! 빨리!”

“정신 차려라! 지금 의식을 놓으면 안 돼!”

“죽지 마……!”

광장에 사람들이 등을 보인 채 몰려 있었다. 정신없는 고함이 허공을 오갔다.

족장의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피비린내가 훅 짙어졌다. 발레리안의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테리.’

그는 행여 소란의 중심에 아이가 있을까 싶어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아이를 찾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공작님!”

그때 옆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발레리안이 이끌리듯 고개를 돌리자 저편에서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뛰어오는 테레지아의 모습이 보였다.

발레리안은 아이의 옷이 피로 젖어있자 말 그대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이곳에 온 목적이 전부 잊혔다.

‘감히 누가…….’

그 빈자리에 새빨간 분노가 찾아오려던 찰나. 눈을 동그랗게 뜬 테레지아가 갑자기 근처의 얼음고래족에게 대야를 떠넘기고는 달려왔다.

아이는 달리던 그대로 폴짝 뛰어올라 발레리안의 목에 덥석 매달렸다. 다급한 외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 저 멀쩡해요! 다친 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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