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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79) (79/124)

<79화>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사라지자 빛이 화악 쏟아졌다.

아으, 눈부셔.

눈살을 찌푸리고 조금 기다리자 서서히 빛에 눈이 익숙해졌다. 그 후에야 편안히 마을의 정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눈으로 지은 집……?”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드문드문 늘어선 반구 형태의 하얀 집들이었다.

가만 보니 눈을 벽돌처럼 만들어서 집을 지은 모양인데, 저러면 오히려 더 춥지 않나? 왜 저런 짓을?

“좀 추워 보이긴 하지만 저래 보여도 안은 따듯하단다.”

“앗.”

얼굴에 의문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지, 부족장이 등을 툭 두드리며 설명해 주었다. 그에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사이 공작과 기사들도 차례로 눈가리개를 풀었다.

부족장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공작에게 말했다.

“아이는 우리 집에서 밥을 챙겨 주지. 그동안 당신들은 저이를 따라가라. 족장님께 안내해 줄 거다.”

「호위 하나 없이 아이를 보낼 수는 없다.」

공작은 곧장 반대했다. 그러자 부족장이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확 찡그렸다.

“제국인을 마을에 들이고, 족장님을 뵙게 해 주는 것도 우리는 큰 위험을 감수한 거다. 이 이상을 요구할 셈인가?”

몇 마디 만에 급격히 공기가 얼어붙었다. 내 존엄성을 희생해서 겨우 분위기가 좋아졌는데, 또 제자리걸음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주먹을 꼭 쥐고 큰소리로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공작님! 설마 이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고! 무력하고! 연약한 저를 해칠 만큼 쓰레기는 아닐 거예요!”

<와, 본인 입으로 잘도 그런 말을.>

릭이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지만 무시했다. 뭐 어때? 과장과 생략을 조금 했다뿐이지 거짓말은 안 했는걸.

일부러 내가 무해한 어린아이라는 점을 한껏 강조하며 또랑또랑 외쳤다.

“……큽.”

“하하핫!”

그러자 짧은 정적 후 공작, 기사, 얼음고래족 할 것 없이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다들 왜 웃으시는지? 저는 진심이었거든요?

왠지 모르게 분해서 볼을 부풀리고 쉭쉭대는데, 가장 크게 웃었던 부족장이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리 부족 애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그런 짓은 안 해. 그러니 배부터 채우자꾸나. 어떠냐?”

아리에타 백작이나 라이넬 남작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부족장의 얼굴을 살피다가 공작을 바라보니,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소리를 지르렴, 테리.」

“조금 전에 소리치는 걸 보니 족장님 댁에서도 충분히 들리겠더군. 걱정하지 말게.”

부족장이 장난스레 끼어들었으나 공작은 무시하고 몸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나는 부족장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사실은 공작과 족장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싶었는데, 부족장이 단호한 태도로 식사는 제때 챙겨야 한다고 말해서 별도리가 없었다.

그 모습이 에버딘 저택에서 내게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이려던 공작을 떠올리게 해 조금 신기했다.

움푹 파인 입구를 지나 눈으로 만든 집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공기가 확 따듯해졌다. 그게 신기해서 릭에게 속닥거렸다.

“여기 진짜 따듯하다. 그렇지? 앗, 너는 곰돌이라 못 느끼겠구나아.”

<……설마 제가 아까 베개라고 놀렸다고 복수하는 겁니까?>

“으응? 아니? 내가 그렇게 쪼잔할 리가 없잖아?”

사실 맞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얄밉게 깐족거리자 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기별도 주지 않고 들이닥친 손님이니, 입에 맞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감수하거라.”

한편 모자와 외투를 벗고 찬장을 뒤적거리던 부족장이 불쑥 말했다.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뭔가 이상해서 멈칫했다.

“엥. 그렇다고 하기엔 저희 쪽에서 미리 연락할 방법을 알려 주신 적도 없지 않나요……?”

“너 똑똑하구나?”

어찌 보면 발칙하다고도 할 법한 말이었는데 부족장은 호탕하게 웃기만 했다.

뭐지? 반응이 전혀 예상이 안 가. 저런 사람은 또 처음이네.

아무튼 똑똑하다는 말은 듣고 또 들어도 기분이 좋았기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밥이다.”

부족장이 차려 준 음식은 고기 스튜, 고기 쌈, 고기 꼬치였다.

고기에서 독특한 향이 나서 코를 킁킁거리다가 식기가 전체적으로 자그맣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선 다들 이런 식기를 쓰나?

“내 아들의 것이다. 네 또래지.”

부족장이 이번에도 눈치 좋게 답해 주었다. 그제야 그녀의 태도가 공작과 묘하게 겹쳐 보였던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넘기자 따듯한 기운이 몸 안으로 스르르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찻잔 대신 고기 꼬치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런데 걔는 지금 어디 있어요?”

“마을에서 살지 않는 얼음고래들의 뿔을 관리해 주러 갔다.”

‘어째 대화를 나눌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는 기분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를 하고 올걸, 싶다가도 나도 이렇게 동토 한복판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지.

그래도 자꾸 이것저것 캐묻기만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묻지 않고 있는데, 그녀는 친절했다.

“우리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부족이라는 건 알고 있느냐?”

“네에.”

“우리가 말하는 ‘자연’에는 얼음고래들도 포함된다. 인간 중에도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것을 좋아하는 자가 있고 아닌 자가 있듯, 얼음고래도 마찬가지야. 마을에 정착해 우리와 공생하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밖을 떠도는 존재도 있지.”

부족장의 설명은 이러했다.

얼음고래의 뿔은 주기적으로 탈피처럼 껍질이 벗겨지는데, 그것을 그대로 두면 벗겨진 껍질이 딱딱하게 굳어져 뿔을 상하게 한다고 한다.

얼음고래는 몸통보다 뿔이 두 배나 예민한지라 자칫하면 쇼크로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러면 모든 얼음고래를 마을에 머물게 해서 관리하는 것이 낫지 않나?’

최근 밀렵으로 인해 얼음고래들이 자꾸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염려되어 순찰 인원을 늘렸다니, 차라리 그편이 더 확실할 것 같은데.

하지만 인간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얼음고래를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도 그들의 기준으로는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한다.

그게 저들의 방식이라니 존중은 한다만…… 이래저래 복잡하구먼. 왜 늘 해치려는 쪽보다 지키는 쪽이 더 어려운 걸까?

“그래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밖을 떠도는 얼음고래들 찾아 벗겨진 껍질을 정리해 주지. 껍질 조각은 집 입구나 옷 등을 장식하거나, 갈아서 염료로 만들기도 한다. 제국인들은 그걸 ‘이리트 염료’라고 부른다던가.”

내내 평온하던 부족장의 얼굴이 문득 일그러졌다. 그녀가 찻잔을 부서질 듯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제국의 인간들은 그 정도 양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며 뿔을 자르자는 개소리를 지껄이더군. 잔인한 것들 같으니…….”

뿌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던 부족장은 뒤늦게 내 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했다.

“……뭐, 크렘위든의 아이인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왜요?”

“응?”

부족장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진심을 담아 말을 내뱉었다.

“저도 동물을 해치는 건 뒤져 마땅한 죄라고 생각해요! 다 뒤졌으면 좋겠다.”

“쿨럭.”

부족장은 차를 들이켜다가 말고 사레가 들렸는지 급하게 쿨럭거렸다. 릭도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저, 테리? 말이 너무…… 그, 거칠지 않습니까?>

왜지? 나는 뒤져 마땅한 놈들에게 뒤지라고 했을 뿐이거늘…….

힐끔 아가 고래의 이마를 일별하니 역시 죽으라는 말은 너무 상냥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토미가 가르쳐 준 ‘뒤져’라는 말이 아주 적절했다.

“크흡, 큭. 푸하하!”

의아해하는데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막자 부족장이 애써 웃음을 추슬렀다. 그녀가 끅끅대며 물었다.

“그런, 큽, 말은. 어디서 배웠느냐? 공작인가?”

“으음, 공작님이 가르쳐 준 건 아닌데……. 있어요, 입담 좋은 친구.”

“나중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군. 아주 유쾌할 것 같아.”

유쾌한 건 맞지만 걔가 유령이라……. 만나려면 한번 죽어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라는 말은 뱉지 않고 속으로만 삼켰다. 때로는 몰라야 더 아름다운 일도 있는 법이지, 음.

부족장은 그 후로도 한동안 간헐적으로 웃음을 흘리며 내게 이것저것 권했다.

“너 마음에 드는구나. 더 먹어라.”

“여기서 뭐 하나라도 더 들어갔다가는 배가 팡 터져서 상당히 흉한 꼴을 보실지도…….”

“으하학!”

거참 웃음이 많은 분이로세.

* * *

테레지아가 의도치 않게 부족장을 한껏 웃기는 사이. 발레리안과 기사들은 족장의 집으로 안내받았다.

“호위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독대만 가능합니다.”

딱딱한 인상의 청년이 팔을 뻗어 기사들을 가로막았다. 그에 호위들이 항변하려 하자 발레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사시에 대처하려면 너희가 바깥에 있는 편이 낫다. 테리 쪽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조금 탐탁잖은 기색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명령에 복종했다. 발레리안은 입구에 쳐진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한 거구의 노인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형형한 눈의 그가 수염이 무성한 턱을 움직였다.

“그 아이는 인질로 쓰기 위해 데려온 것이냐, 살인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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