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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78) (78/124)

<78화>

새까만 하늘에 어느 순간 희미한 녹색 빛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옅고 가느다랗던 녹색이 이내 물결이 치듯 하늘 전체로 번져 가는 광경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우와아.”

마치 누군가 녹색과 푸른색 물감을 섞어 하늘에 끊임없이 붓칠하는 듯했다. 반쯤 넋을 놓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흘렸다.

“너무 예쁘다…….”

<그러고 보니, 동토에서는 ‘오로라’라는 특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고 어디선가 읽었던 것도 같네요. ……녹색이랑 푸른색이 섞인 게 당신 눈 색 같기도 하고.>

“응?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소였다면 마저 추궁했을 테지만, 지금은 저 장관을 한시도 빠짐없이 눈에 담고픈 마음이 더 컸기에 넘어갔다.

등 뒤로 기사들과 공작의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저게 오로라군요. 처음 에버딘에 자리 잡았을 때 언뜻 듣긴 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저걸 보니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콱 돌아가 버릴까 했는데.”

“원한다면 보내 주지. 말만 해라, 레딘.”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주군.”

깐죽거리던 레딘은 공작의 한마디에 금세 수그러들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광고할 수는 없어서 숨죽여 키득대던 중, 릭이 문득 나를 불렀다.

<테리.>

“응?”

<그러고 보니 공작이 아닌 사람과의 첫 춤을 저랑 추겠다는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는 겁니까?>

“콜록.”

얘가 갑자기 훅 들어오네.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가, 갑자기 뭐야? 뭔가 알고 말하는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낌새를 흘렸나?’

찔리는 게 있는지라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급하게 목을 가다듬고 시선을 하늘에 둔 채 답했다.

“그러엄, 당연하지.”

<저 보고 다시 말해 봐요. 정말이에요?>

젠장, 아까 레딘을 추궁했던 걸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도 아니고. 왜 하늘은 꼭 이럴 때만 공평한 거지?

속으로 한탄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도저히 릭의 눈을 보고 –단추지만- 약속을 지켰노라 말할 수가 없어서, 시무룩하게 고백했다.

“사실은…… 건국제 때 너랑 한 약속을 어겨 버렸어. 미안…….”

당시 상황이 워낙 기묘했다지만, 결국 정신을 못 차리고 약속을 깬 건 나니까.

‘그래도 며칠은 꽤 밝았는데. 다시 우울해하면 어쩌지.’

누가 따라오라고 했다고 홀라당 따라가 놓고 이런 마음을 품는 건 모순적일지 몰라도, 나는 릭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유령이든 아니든, 그는 어느새 내 안에서 토미와 나란히 설 정도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친구였으니까.

릭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몰라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화를 내거나 서러워하겠지?

그러나 예상외로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군요.>

“그, 어?”

<솔직하게 말해 줬으니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찌그러진 베개처럼 있지 말아요.>

고마움과 미안함은 찰나였다. 릭이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람 속을 긁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그의 볼을 쭉 잡아당겨 버렸다.

“……누가 찌그러진 베개라는 거야!”

<여기서 베개라고 불릴 만한 게 당신 말고 누가 있습니까?>

“너 지금 인형이라서 안 춥다고 거들먹거리는 거지!”

<그렇게 보였다면 그런 거겠죠.>

“아오!”

감동과 미안함이 채 1분을 못 가게 하는 저 입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에휴, 내가 어쩌다 이런 곰 인형이랑 가까워져서 내 무덤을 판 건지.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 * *

일행은 밤마다 모닥불을 세 개씩 피우며 조금씩 전진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접근하는 사람은커녕, 이렇다 할 동물조차 보지 못한 탓에 선대 공작님이 나처럼 사기당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 무렵이었다.

두두두-

“……!”

이른 아침, 땅이 울리는 느낌에 눈이 번쩍 뜨였다.

놀라서 일어나니 공작과 기사들은 이미 깨어 있었다. 공작이 담담히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 테리.」

좋은 아침이…… 맞나……?

땅이 울리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데?

어리둥절했으나 공작의 얼굴은 평온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공작이 저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 침낭을 벗어나 간단히 고양이 세수를 하고 그의 뒤편에 섰다.

그사이 땅 울림은 더욱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밭 저편에서 반짝임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우웅-!

뿔 나팔 같은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거대한 몸집만큼 길고 뾰족한 무지갯빛 뿔을 가진 얼음고래들이 빠르게 얼음 위를 헤엄쳐 다가왔다.

‘원래는 저렇게 생겼구나…….’

힐끔 아가 고래를 쳐다보자 잘려 나가 밑동만 남은 뿔이 유달리 눈에 박혀 들었다. 밀렵꾼들에 대한 분노가 더욱 깊어졌다.

얼음고래들의 몸에 묶인 줄에는 썰매가 이어진 채였고, 그 위에 온몸을 털가죽으로 둘러싼 덩치 큰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이 공작이 설명한 ‘얼음고래족’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쿵!

근처까지 다가온 얼음고래족 사람들이 썰매에서 뛰어내렸다. 다들 몸집이 큰 탓에 착지에 맞춰 땅이 묵직한 울림을 냈다.

가장 앞에 선 얼음고래족이 천천히 몸을 폈다. 얼굴을 가린 천 너머로 두 눈이 형형히 우리를 훑었다. 이내 독특한 억양의 말이 들려왔다.

“……동족이 아니군. 복식을 보아하니 크렘위든 제국인인가.”

그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얼음고래족이 일제히 창을 들어 우리를 겨누었다. 앞에 선 이가 팔짱을 끼더니 싸늘히 눈을 빛냈다.

“너희에게는 신성한 땅을 밟을 자격이 없다. 경고한다. 당장 이 땅에서 나가라.”

차디찬 음성에 자연스레 몸이 떨렸다. 그때 공작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덤덤히 반지를 눌러 입을 뗐다.

「나는 발레리안 에버딘, 에버딘 공작이다. 최근 제국 내에 이리트 염료가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해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러 왔다. 족장을 만나고 싶으니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에버딘 공작이라고?”

깃펜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글씨를 쓰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얼음고래족은, 공작이 이름을 밝히자마자 대번에 그런 기색을 지우고 살기를 내뿜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경고의 의미였다면, 지금은 정말 상대를 찢어발기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으아아.’

저럴까 봐 급하게 오해부터 풀러 온 건데! 저건 이미 우리가 얼음고래를 밀렵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잖아!

여럿이 작정하고 살기를 뿜어내자 숨이 턱 막혔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험악하게 흘러가는 듯해 긴장하던 바로 그때.

꼬르륵-

배에서 아침 식사 시간임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도 아주 크게.

“…….”

“…….”

한순간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아이?”

내내 공작과 대화를 나누던 이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의 뒤쪽에 서 있었더니 이제야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이게 무슨.’

그동안 나는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진지하던 분위기가 내 배꼽시계로 인해 한순간에 우스꽝스럽게 변해 버린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위장아, 나는 너를 이렇게 눈치 없게 키우지 않았는데……! 크윽!

부끄러움에 양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손 틈으로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직후. 놀랍게도 가장 앞에 선 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가린 천을 끌어 내렸다.

“하긴, 지금이 딱 아침 식사 시간이긴 하지.”

잘 벼린 칼날 같던 눈빛과 달리 천 너머의 얼굴은 놀랍도록 따듯하고 푸근한 인상이었다.

중년의 여인이 나를 보며 씨익 웃자 두 배로 민망해졌다.

“아무리 제국인이라도 저렇게 어린아이가 보는 앞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싸워 댈 순 없지. 마침 아이가 배가 많이 고픈 듯하니, 무장을 해제하고 마을까지 가는 길에 눈을 가리는 데 동의한다면 족장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 어찌하겠나?”

그 말에 공작이 잠시 나를 돌아보았다. 민망함에 손가락을 얼른 다시 붙이자 그가 여인에게 대답했다.

「좋아. 기왕이면 꿀 우유도 부탁하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라.」

……지금 저거 나 두 번 죽이는 거 아니야?

* * *

자신을 부족장이라 소개한 중년 여인의 지시에 따라, 공작과 기사들은 순순히 검을 풀어 그들에게 넘겼다.

얼음고래족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기사들이 대놓고 물었다.

“주군, 그래도 검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자들이 저희가 탄 썰매를 절벽에 밀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명색이 에버딘의 문장을 달고 있는 놈이 맨손으로 제압할 자신이 없나 보지?”

“에이, 그건 아닌데. 그래도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단 좋잖아요.”

레딘은 너스레를 떨며 눈을 찡긋했다.

사실 조금 걱정됐는데 공작과 기사들의 대화를 듣자 미미하게 남아 있던 두려움마저 씻은 듯 사라졌다.

하긴, 평소에 저 사람들이 하는 훈련을 생각하면 검이 없어도 서넛쯤은 무난히 때려눕힐 수 있을 거다.

무기를 수거한 얼음고래족 사람들이 제 옷자락을 찢어 눈가리개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을 착용하고 더듬더듬 썰매에 올라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도착했다.”

부족장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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