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 *
크렘위든 제국의 수도, 위덴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잘 닦인 흰 대로, 그 위를 바삐 지나다니는 금장 마차, 카페에서 한가로이 찻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개중에서도 수도의 가장 비싼 땅 중 하나에 자리 잡은 3층 카페는 전 황궁 요리사 출신 셰프가 차린 곳이었다.
그곳의 깊숙한 개인실에서 묵직한 금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경매의 대금입니다, 남작님.”
쩔그렁-
둥그런 테이블 위로 금화가 담긴 자루가 놓였다. 화려한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자루의 입구를 슬쩍 벌리자 반질반질한 금화가 수북이 쌓인 것이 보였다.
남작이라 불린 여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서렸다. 그녀는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어 테이블에 쏟더니 그중 3할 정도를 남자에게 밀어 주었다.
“‘청소’는 확실히 하고 있겠지? 수수료를 이만큼이나 떼어 가면서.”
“하하,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허투루 일 처리를 하는 놈이었다면 남작님께서 지금까지 거래를 이어 오시지도 않으셨겠죠.”
“알면 잘해. 슬슬 말이 새어 나갈 때가 됐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저희도 수도 경비대에 걸리거나 하면 곧장 모가지잖습니까?”
여자가 턱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남자는 제 몫의 금화를 챙겨 들고 소리 없이 물러났다.
차르륵-
홀로 남은 여자는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금화를 손으로 쓸었다. 금화가 맞부딪치며 내는 맑은 소리는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자는 황금의 빛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녀는 더없이 차가운 눈길로 제 앞에 놓인 돈을 바라보았다.
‘이건 결국 수단일 뿐이야.’
여자, 밀리아 팔론 남작은 몇 년 전 부친의 별세로 작위를 이어받았다.
팔론 남작가는 클라센 후작가의 가신. 밀리아의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클라센 후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고, 그녀는 어릴 적부터 그런 아비가 못마땅했다.
‘왜 굳이 다른 사람 밑에 있어야 하지?’
제힘으로 어렵사리 쟁취한 것을 누군가에게 바치고 굽신거리는 일은 밀리아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하여 그녀는 남작위를 물려받은 후, 비밀리에 용병을 고용해 얼음고래를 밀렵하고 그 뿔을 갈아 ‘이리트 염료’를 만들어 냈다.
염료의 일부는 판매하고, 다른 일부는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들에게 은밀히 선물하여 인맥을 쌓는다.
그로써 최종적으로는 클라센 후작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당당히 팔론가의 이름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것.
그것이 밀리아의 목표였다.
똑똑.
밀리아가 창 너머로 위덴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의지를 다질 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약속 시간이 곧입니다.”
“……그래. 가자.”
기왕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최고를 갈망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밀리아가 모자를 고쳐 쓰고 방 밖으로 나왔다. 또 다른 ‘연줄’을 만들 시간이었다.
* * *
“……저 지금 되게 웃기지 않아요?”
「아닙니다, 아가씨. 잘 어울리십니다.」
“다른 데 보지 말고. 내 얼굴 보면서 다시 말해 봐요, 레딘.”
“……큽.”
어쭈? 웃어?
절로 눈이 가느다래졌다. 레딘은 내게 제 얼굴이 안 보일 줄 알고 이젠 대놓고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그 반응이 짜증 나긴 했지만, 차마 그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정말…… 웃겼기 때문이다.
<……눈사람?>
‘젠장.’
레딘에 이어 릭이 확인 사살을 했다. 우울하게 시선을 내려 다시금 내 모습을 확인했다.
‘……발이 안 보여.’
몸통과 팔다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꺼운 외투를 대체 몇 개나 껴입은 건지.
지금 내 모습은 그야말로 이동형 베개였다.
「……대신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 테리. 알겠니?」
‘네!’
시간을 조금 전으로 돌려서.
공작에게 동행 허락을 받아 낸 이튿날. 나는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국경으로 이동했다.
‘와아.’
국경 장벽 위에 올라 난생처음 눈에 담은 동토는, 그야말로 ‘광활하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렸다.
눈이 멀 정도로 희게 빛나는 눈밭이 지평선까지 빼곡히 펼쳐져 있었다. 에버딘도 제국 내에서는 추운 지방에 속하지만, 동토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피부가 엘 듯 차가웠다.
‘엣츄.’
찬 바람이 계속해서 코끝을 간질이는 통에 나도 모르게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고작 그뿐이었는데 호위 기사 둘과 공작은 곧장 사색이 되었다.
‘털 외투! 외투 가져와!’
‘챙겨 온 걸로는 모자랍니다, 선배님!’
「여기 있는 아동용 외투들, 전부 사겠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몸에는 두툼한 털옷과 털 외투가 총 일곱 겹이 걸쳐져 있었다.
옷을 한계까지 껴입은 탓에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손끝을 퍼덕이며 항의했다.
‘두 개만 벗으면 안 돼요? 이대로면 한 발 내딛자마자 바로 굴러갈 것 같은데.’
「안 돼. 하나라도 벗는다면 두고 갈 거야.」
그러나 공작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에버딘 저택에 덩그러니 남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불만을 억누르고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그랬더니 공작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리고, 기사들은 대놓고 폭소하는 게 아닌가.
하여간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말이야, 어? 애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으쇼?
당장에라도 그렇게 따지고 싶었으나 내가 유령을 못 보는 척하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로다.
<꾸웅…….>
한편, 아가 고래가 내 머리 위로 축 늘어진 채 기운 없는 울음을 흘렸다.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니까…….’
유령은 죽은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죽은 장소에서 일정 거리 이상 움직이면 존재가 닳고 힘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원래는 아가 고래에게 그림과 몸짓을 동원해 스무고개 식으로 정보를 알아낸 후, 릭만 데리고 동토로 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어쩜 이렇게 말이 안 통할 수가.’
<꾸우웅.>
소통의 한계는 둘째 치고, 아가 고래는 죽은 당시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밀렵꾼들에게 잡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는 일 자체가 큰 혼란이었던 것 같다.
눈물 쏙 빠지는 노력 끝에 밀렵꾼의 본거지가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라는 것은 알아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게다가 아가 고래는 내가 동토에 가게 되었다고 손짓 발짓을 동원해 열심히 설명하자 어떻게든 나를 따라오려 했다. 힘을 소진할 수도 있으니 안 된다는 어필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릭, 그리고 아가 고래와 함께 이동했다. 염려했던 대로 아가 고래는 에버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비실비실해졌다.
‘애초에 죽은 곳부터 에버딘 중심까지도 상당한 거리를 이동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라도 두고 와야 하나 싶었지만, 늘어진 와중에도 지느러미로 내 머리통을 꽈악 붙잡은 걸 보니 떨어질 생각이 없나 보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테리, 다시 한번 물을게.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니? 아메트리스 후작도 제 자식을 맡길 때 그랬으니, 우리도 한 번쯤은 기별 없이 쳐들어가도 괜찮을 거란다.」
동토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공작이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 려다가, 팔이 굽혀지질 않아 만세 하며 당당하게 외쳤다.
“에버딘의 후계자는 번복하지 않아요. 저도 갈 거예요!”
* * *
“버, 버…….”
번복합니다,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옥.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입술이 얼어붙어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도 콧구멍 빼고는 제 몸으로 다 가리고 있잖습니까.>
“코, 코, 콧.”
<콧구멍까지 막으면 진짜로 죽어요.>
으앙,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
나는 동토를 밟은 지 반나절도 안 되어 자연은 위대하다는 걸 뼈저리게, 몸소 깨달아야 했다.
신기함에 눈밭 위로 뽁뽁뽁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던 처음 10분의 기억이 이젠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옷을 이렇게 껴입고 있는데도 이가 떨릴 수가 있냐.
결국엔 큰소리친 보람도 없이, 나처럼 털외투를 걸친 공작의 옆구리에 짐짝처럼 들려 이동했다. 수치스러웠지만 손발이 움직이질 않아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묵어야겠군.”
“예, 주군. 불 피우겠습니다.”
나와 달리 공작과 기사 둘은 외투 두 겹으로도 그럭저럭 추위를 견뎌 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작의 외투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기를 얼마. 기사들이 솜씨 좋게 피워 낸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불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있으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불길에 손발을 녹이다가 문득 의아해져 물었다.
“그런데 왜 불을 세 개로 나눠서 피우는 거예요?”
「그게 얼음고래족이 사용하는 ‘신호’거든. 정확한 마을 위치를 모르니, 조금씩 이동하면서 매일 신호를 보내면 저쪽에서 발견하고 살피러 올 거야.」
“아하.”
공작은 설명을 늘어놓으며 기사들이 건넨 스튜 그릇을 다시 내게 건넸다. 불 앞에 앉아 따듯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자 추위가 한결 가시는 기분이었다.
공작과 기사들이 식사를 마치고 침낭을 펼 자리를 다듬는 사이 밤이 찾아왔다.
릭을 품에 안은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중.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얼떨떨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