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까지?’
실제로 공작은 생각만으로도 정말, 아주, 매우 싫다는 듯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것이 의아해 스푼을 내려놓고 물었다.
“어딜 가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질문의 형태를 빌리고 있긴 하지만, 사실 공작이 대답하지 않으려 들면 유령을 동원해서라도 알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공작이 선선히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에버딘의 후계자인 이상 어느 정도는 알아 둬야 하는 일이니까.」
앗, 뭔가 인정받은 기분. 마음이 들뜨자 입꼬리도 슬금슬금 올라가려 했다. 애써 웃음을 참고 점잖게, 후계자답게 물었다.
“큼. 무슨 일이신데요?”
「얼음고래족을 만나러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얼음고래……?”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공작이 부연해 주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순한 돌고래인데, 이마에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뿔이 자라나는, 동토의 영물이란다.」
아하, 돌고래라. 거기에 뿔…….
‘음?’
으으음?
왜인지 공작이 설명하는 ‘얼음고래’의 외양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일까?
<꾸웅.>
“…….”
기분 탓…….
「테리?」
기분…….
<꾸우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믿기지 않아 아가 고래를 보았다가, 공작을 보았다가, 다시 아가 고래를 보았다.
<……공작의 설명을 듣고 그림을 그리면 딱 저 모습이 되겠는데요?>
혼란에 정점을 찍어 준 것은 릭의 중얼거림이었다. 그까지 그렇게 말하자 더는 부정할 수가 없어졌다.
동토의 영물이라는 애가, 왜 에버딘령 한복판에 있냐……?
* * *
간신히 당황을 추스르고 공작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요구했다. 그러자 그가 낮에 아메트리스 후작이 했다는 말에 설명을 곁들여 이야기해 주었다.
‘최근 암시장에 이리트 염료가 드문드문 풀리고 있어. 얼음고래족은 제국과 교류하지 않는데 말이지.’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현재 제국과 얼음고래족의 관계, 그리고 이리트 염료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해.」
이리트는 ‘무지개’라는 뜻을 지닌 고대어로, 이리트 염료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얼음고래의 뿔로 만들 수 있는 가루를 뜻했다.
얼음고래는 크렘위든 제국의 경계 너머, 사방이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평범한 사람은 살지 못하는 동토에만 서식한다.
그런 얼음고래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유일한 인간. 그들이 바로 얼음고래족이었다.
「그들은 차가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추위에 강하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 폐쇄적인 성향이 강하지.」
이리트 염료로 옷과 집 등을 장식하는 얼음고래족의 존재가 알려진 건 몇백 년 전, 탐구욕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무지갯빛 찬란함에 마음을 빼앗긴 제국은 교류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로 인해 앙심을 품고 동토를 정벌하겠노라 나선 황제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추위, 그리고 동토의 기후와 지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얼음고래족의 전술에 밀려 후퇴했다.
실패가 몇 번이나 이어지자, 결국 제국에서는 이리트 염료를 포기했다. 사실상 능력이 부족해 패한 것이지만, 대외적인 명분은 ‘그깟 염료 안 쓰면 그만이다, 치사해서 안 가져.’였다고.
아무튼, 그 이후로 동토에 섣불리 발을 디디는 제국인은 없었다.
혹독한 추위는 전투는커녕 너무나도 쉽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곤 했고, 간혹 추위를 이겨 내더라도 얼음고래족은 몇 번이고 신성한 땅을 침범하고 훼손한 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했으니까.
그렇게 얼음고래족, 그리고 이리트 염료에 관한 이야기는 서서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 가는 듯했다.
암시장에 돌연 이리트 염료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이리트 염료가 경매에 풀리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이라더군. 하지만 염료가 탐난다고 돈 많은 놈들끼리 쉬쉬하느라 지금에서야 이야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거지.’
원래는 더 일찍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일 때문에 후작이 돌아오는 시기가 늦어졌다고 공작이 말했다.
「흔적을 워낙 교묘히, 삼중 사중으로 비틀어 놔서 배후가 누군지는 밝혀내지 못했다는구나. 하지만 흔적이 동부로 이어져.」
동부와 동토의 경계 대부분은 에버딘령에 속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왜 후작이 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을 꺼냈는지 이해가 갔다.
‘이리트 염료는 얼음고래의 뿔로 만드는 거지. 만약 누군가 얼음고래를 밀렵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쪽에서도 슬슬 알아챘을 거다. 자칫하면 이 일을 에버딘에서 한 짓이라 오해하고 쳐들어올지도 몰라.’
‘그럼 그들이 누굴 가장 먼저 족치려 들겠어?’
‘당연히…….’
동부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에버딘 공작. 그리고 그 후계자.
‘나네.’
에버딘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무게인지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지금까지는 권리니, 자격이니 하는 것만 생각했지 ‘책임’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 그들의 대표가 된다는 건 이렇게 무거운 일이었구나.
권리를 주장하려면 후계자로서의 의무부터 다해야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저, 아까 이번에 얻은 다이아몬드 팔찌를 들고 보석상에 다녀왔는데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공교롭게도 내가 건국제에서 얻었던 팔찌에 발려 있다던 무언가가 이리트 염료인 듯싶어 공작에게 팔찌를 건넸다. 미간을 좁힌 채 팔찌를 살피던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이군. 후작이 증거라며 나누어 주고 간 거랑 똑같아. 그 노점 주인에 대해서도 따로 알아봐야겠구나.」
공작은 곧장 세바스찬을 불러 건국제 노점 주인들의 신상을 조사해 오라 일렀다.
나는 공작에게 노점 주인의 인상착의를 설명해 주고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럼 쟤도…… 밀렵꾼에게 잡혀서 죽은 거겠구나. 인간이 나빴다.’
착잡한 심정으로 아가 고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저 아이를 유령으로 만들 만큼 컸던 걸까.
그렇다면 공작의 일을 도와주는 게 곧 저 아이의 복수를 이뤄 주고, 동시에 에버딘이 누명을 쓸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리라.
‘밀렵꾼에게 죽은 거라면, 본거지 위치나 그런 걸 조금은 알고 있지 않을까?’
아가 고래가 당황하며 시내를 헤매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아는 게 많지는 않을 듯싶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동토에 내가 소통할 만한 유령이 한둘이라도 있으면 밀렵꾼을 찾아내기까지의 시간이 훨씬 단축될 것이다.
밀렵꾼을 빠르게 찾아낼수록 에버딘이 위험해질 가능성도 줄어들 테고.
결론을 내리자마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저도 따라갈래요!”
「……뭐?」
공작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평소의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더없이 살벌한 인상이 되었다.
저건…… 딱 봐도 ‘안 돼’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군.
「안 돼, 테리. 위험해.」
오, 맞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표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은 같이 지냈구나.
그런데 지금은 한가롭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눈을 치켜뜨고 반박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공작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잖아요? 얼음고래족은 제국인이 동토를 밟는 걸 싫어한다면서.”
「선대 공작께서 우연히 얼음고래족 노인을 구한 적이 있어. 행여 침략 재개의 빌미로 쓰일까 봐 황실에는 알리지 않았지만, 덕분에 내겐 그들과 대화할 방법이 있으니 위험하지 않다.」
호오. 어쩐지 제국 사람치고 너무 아무렇지 않게 얼음고래족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하더니, 그런 일이.
그럼 더 문제없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공작님 옆에 붙어 있으면 안 위험하다는 소리네요?”
「……그게 아니더라도 동토는 성인들도 버티기 어려워하는 곳이야. 폐렴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니.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네가 에버딘을 지켜야지.」
“그게 더 위험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얼음고래족이고, 공작님을 밀렵꾼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려 들 텐데.”
「……그건.」
지금이다! 내내 반대하던 공작이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틈을 타 몰아붙였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에버딘의 후계자니까, 이번 일에 대한 오해를 풀면서 겸사겸사 얼굴도장도 찍고 친해지면 좋잖아요.”
「그렇지만…….」
“그래도 기어코 저를 혼자 두고 가시겠다면 더한 위험함을 보여 드릴 겁니다.”
「테리. 위험한 일에 혼자 나서지 않겠다고 나랑 며칠 전에 약속…….」
“그러니까! 요청하고 있잖아요, 도움!”
「…….」
“제가 동토에서 폐렴에 걸리는 게 빠를까요, 아니면 잠옷만 입고 밖에서 밤새워서 감기 혹은 독감 혹은 폐렴에 걸리는 게 빠를까요.”
「…….」
“저 지금 왼쪽 양말 벗었어요. 어어, 오른쪽도 벗겨진다. 반, 반의반, 반의반의 반…….”
이후로도 논리와 협박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 결과. 공작에게서 동행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공작과 나의 동토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