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 *
방에 들러 다이아몬드 팔찌를 챙긴 뒤, 제르비스가 원한 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와 거리를 가로지르며 아련하게 ‘그땐 이랬었는데……’라며 하하 호호 추억 여행을 하다 보니 금세 보석상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썩 괜찮았다. 오히려 팔찌가 얼마쯤 하려나, 하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저, 공녀님. 죄송하지만 이 팔찌……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지? 하핫.
“투명한 수정 위에 어떤 가루를 발라 반짝거리게 만든 것 같은데…….”
“……수정?”
“예, 수정이요.”
“아하하, 제리. 나 방금 헛걸 들은 것 같은데. 아니면 귀가 이상해졌나?”
최근에 너무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그런가.
내가 벌써 청력에 문제가 생길 나이가 아닌데, 아직 푸릇푸릇할 나이인데…….
하하 웃으며 손바닥으로 귀를 탁탁 쳤다. 물에 들어간 적은 없으나 귓구멍에 물이 차 있기라도 한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잘못들은 게 맞다는 말은 여전히 들려오질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제르비스를 쳐다보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
“…….”
“……진짜야?”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문 채 눈만 도르륵 굴리던 제르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살짝.
하지만 그 작은 동작이 내게는 태산만큼 거대하게 다가왔다.
털썩.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반쯤 엎드리다시피 한 상태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엄마 보고 싶어……!’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다. 기껏 열연까지 펼쳐 가며 사기꾼을 혼내 줬는데, 내가 사기를 당하다니.
“권선징악은 옛말이야. 이 세상은 썩었어……!”
“맞는 말이긴 한데…… 왜 그래, 테리?”
앗, 그러고 보니 제르비스는 풍선 다트 노점 주인이 사기꾼이었다는 걸 모르지.
그가 쩔쩔매며 말을 걸어 준 덕에 간신히 실망에서 빠져나왔다. 몸에 힘이 없어 비틀비틀 일어나며 탄식했다.
“하, 인생. 비자금 생긴다고 좋아했는데 텄네…….”
“비자, 예? 공녀님,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거 도로 주세요…… 흐흑.”
결국 들어올 때와 달리 무거운 걸음으로 보석상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딸랑, 하고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도 괜스레 원망스러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꿈을 꾸었습니다…….’
비자금 생기면 건국제 때 닭 꼬치 만들던 요리사 아저씨를 에버딘 저택으로 스카우트해 올까 했는데. 짧지만 행복한 꿈이었다.
보석상 앞에 서서 잠시 애잔하게 먼 곳을 응시하던 때, 제르비스가 나를 불렀다.
“테리.”
“응?”
“그, 있잖아…….”
시선을 내리자 제르비스가 앞에서 시선을 내린 채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보였다.
보아하니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긴장한 기색이지. 볼도 좀 빨간 것 같…….
“……?”저게 뭐지?
“……까 봐, 조금 걱정돼. 그래서…….”
제르비스가 무어라 열심히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내 신경이 온통 그의 어깨 너머에 쏠려 있는 탓이었다.
제르비스의 등 뒤. 정확히는 허공에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동물, 아니 유령이 있었다.
‘뿔 달린…… 돌고래?’
분명 전체적인 형태는 책에서 본 흰 돌고래를 닮았는데, 이마에 나무 밑동처럼 생긴 짧은 뿔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왠지 당황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돌고래 유령이 나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꾸웅?>
나와 눈이 마주친 돌고래 유령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마치 경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테리? 입이 마름모가 됐어.”
“핫.”
제르비스의 음성이 불쑥 다시 가까워졌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너무 대놓고 유령과 눈을 맞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제르비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해도 될까?”
제르비스가 양손을 모아 꼼지락대며 물었다. 문제는 저게 ‘뭘’ 해도 되냐고 묻는 건지 모른다는 거다.
‘뭔지는 몰라도 나름 용기 내서 말할 것 같은데. 딴생각하느라 못 들었다고 하면 속상하겠지……?’
뭐, 제르비스가 뭔가 이상한 걸 요구할 애도 아니고. 친구니까 딱히 거절할 마음도 들지 않아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럼. 당연하지.”
“……고마워.”
그러자 제르비스의 얼굴에 사르르 미소가 번졌다. 그 특유의 붉은 눈가가 유달리 돋보였다.
미소 띤 얼굴의 그가 내 손을 천천히 잡아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어, 잠깐. 뭐?
“힉.”
칼리오스가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좀 더 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르비스는 묘하게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내 손을 놓아주었다.
당황해서 손바닥을 감싸 쥔 채 머리 위로 물음표만 띄우고 있자니, 그가 쑥스럽게 웃었다.
“덕분에 안심이 됐어. 꼭 편지할게, 테리.”
“어? 어, 응. 그, 그래.”
내 입으로 허락해 놓고 갑자기 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답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요즘 작별 인사로 뽀뽀하는 게 유행인가……?’
다음에 하리엔이랑 리벨한테 물어봐야지. 으, 아직도 닭살 돋아 있는 기분이야.
* * *
제르비스는 점심 식사 후 후작과 함께 에버딘 저택을 떠났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택에 머무는 객의 수는 그대로였다.
……나한테는 유령도 객이나 마찬가지니까.
<테리.>
“…….”
<쟨…… 뭡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릭의 물음을 듣자 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그동안 토미나 셀레나 같은 강한 유령들 덕분에 본인의 미련을 빌미로 들러붙는 유령이 하나도 없어서 깜박했다. 유령은 원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미련 때문에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걸.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갓 태어난 것처럼 작은 크기의 돌고래 유령이 구슬프게 우는 게 보였다. 검고 동그란 구슬 같은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이 돌고래 유령은 아까 시내에 나갔을 때, 제르비스의 어깨 너머로 눈이 마주쳤던 아이였다. 내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공작저까지 따라왔는데…….
<꾸우우웅.>
……솔직히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냐고! 난 심장이 돌로 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 심장이 돌로 되어 있어도 저걸 보고 모진 소리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꾸웅…….>
“앗, 아니. 너한테 뭐라고 한 게 아닌데. 울음 좀 그쳐 볼래, 아가야? 아니면 왜 우는지라도 알려 주면…….”
살살 달래 봤으나 돌고래 유령은 인간 유령과 달리 말이 통하지 않았다.
돌고래 유령이 뭔가 말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하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게 그뿐이듯, 돌고래 유령도 내 감정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듯했다.
꾸웅꾸웅 울면서 지느러미로 수정 팔찌를 툭툭 치는 걸 보니, 단순히 내가 유령을 본다는 이유로 따라온 건 아닌 것 같긴 하다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난감하네.”
<그러게요. 여기서 남쪽 바다까지는 거리가 상당한데,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릭과 나란히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신기한 듯 돌고래 유령을 기웃거리며 살피던 셀레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파서 우는 건가?>
“응? 아프다고요?”
<응. 여기 봐. 이 자체로 뿔인 줄 알았는데 잘 보니까 잘린 단면 같아.>
“헐.”
셀레나의 말에 급히 무릎을 세워 돌고래 유령의 이마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정말로 뭔가에 뿔이 잘린 건지 단면에 쓸린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그것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왈칵 분노가 치밀었다.
동물들은 너무 착하고 순수한 나머지 애초에 유령이 되는 경우 자체가 극히 드물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애 뿔을 잘라? 이건 뭐 오블렌 자작을 뛰어넘는 쓰레기잖아!
<꾸우웅…….>
“앗, 미안.”
너무 화가 나서 허공에 주먹질을 좀 했더니 고래가 또다시 울음을 터트려 한바탕 달래 줘야 했다.
무서워하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나를 계속 쫓아다닐 것 같아서, 우리는 돌고래 유령을 편의상 아가 고래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가 고래가 간신히 울음을 그치자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시무룩한 아가 고래를 달고 식당으로 내려가자 공작이 맞이해 주었다.
「좋은 저녁, 테리.」
“좋은 저녁이에요, 공작님!”
건국제 때 닭 꼬치를 두 개나 먹었다는 이야기를 미나가 들은 걸까. 오늘 저녁은 다소 삼삼한 음식들 위주로 나왔다.
시무룩하게 수프 위로 후추를 탈탈 들이붓는데, 뭔가 고민하던 공작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테리.」
“네?”
「아무래도 당분간 내가 저택을 비워야 할 것 같은데, 널 여기 혼자 두기엔 조금 불안해서……. 내키지는 않다만 아메트리스 후작저에 가 있으면 어떻겠니?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고.」
“으잉?”
날 아메트리스 후작의 손에 맡길 생각까지 할 정도로 오래 자리를 비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