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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74) (74/124)

<74화>

이 말에는 훈훈한 뜻도 일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와의 친분을 잊지 말고, 황제가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하려고 들면 좀 말려 봐라…… 라는 뜻에 가까웠다.

내가 <투명 신사 이야기> 종이 인형이랑, 어? 아무튼 이것저것 많이 챙겨 주고 잘해 줬는데 입 씻기만 해 봐라. 죽은 자의 땅 끄트머리까지 따라가서 물어 버릴 테다.

일부러 짓궂게 눈을 빛내자, 칼리오스가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녀. 분부대로 하죠.”

“으, 말 놓은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어색해.”

“편지할게. 받아 줄 거지?”

“그럼, 당…….”

당연하지, 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순간 맞잡은 손을 살짝 돌린 칼리오스가 불시에 고개를 내렸다.

그는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자세를 바로 하긴 했지만, 찰나 손등을 다녀간 말캉한 감촉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 놀러 올 거니까 거창한 인사는 안 할게. 다시 보자. 건강히 잘 있어야 해, 테리.”

무어라 반응할 틈도 없었다. 빠르게 말을 늘어놓은 칼리오스가 냉큼 마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빙글빙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가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더니 금세 멀어졌다.

……방금 뭔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나는 당혹감에 제자리에서 눈만 끔벅였다. 그때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리, 손 좀.”

“응?”

반사적으로 제르비스가 내민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그랬더니 그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손등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칼리오스가 입 맞췄던 바로 그 자리였다.

제르비스는 손등에서 윤기가 날 때쯤에야 손수건을 거두어들였다. 그가 내 손을 놓아주더니 턱을 치켜들고 선언했다.

“……그래도 내가 이겼어.”

“……?”

“나는 에버딘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이긴 거야.”

“으응…….”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닦아 준 건 고맙다. 아무리 내가 이래저래 챙겨 준 게 고마웠다 해도 좀 진한 인사였어.

제르비스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는데 심상찮은 수군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주군. 쫓을까요?”

“……마차를 박살 내면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다. 참아.”

“아, 아니. 전 마차 부수자고는 안 했는데…….”

저쪽은 또 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마차 박살이니, 반역이니. 소름 끼치는 얘기가 들려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내가 자기 말을 못 듣는다고 알고 있을 텐데도 저러는 걸 보니, 본인이 생각해도 조금 전의 발언은 지나쳤죠?

아무리 황실과 에버딘의 사이가 안 좋고, 나도 황제는 싫지만! 고작 인사 하나로 반역 운운하는 건 좀.

‘애치고는 진한 인사이긴 했어도, 칼리오스가 못 할 짓을 한 건 아닌데 왜들 난리람.’

……와중에 칼리오스, 제르비스하고만 악수 안 하고 갔네. 하여간 참 이상한 데서 꿋꿋한 애야.

* * *

아무튼. 제르비스는 칼리오스와 다르게 에버딘 저택에 남았다며 은근히 의기양양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결과적으로 그건 하루 만에 박살 났다.

“좋다…….”

칼리오스와 황실친위대 기사들을 돌려보낸 후, 에버딘 저택은 예전의 고요를 되찾았다.

공작, 제르비스와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고, 식후 운동 겸 검댕이와 뛰어놀고.

이후 다 함께 정원에서 노곤하게 늦가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아드으으을!”

“……?!”

공작이 무언가 기척이라도 느꼈는지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동시에, 커다란 외침이 정원을 뒤흔들었다. 우다다 하는 엄청난 소리도 뒤따랐다.

큰 소리에 놀라 나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켰던 제르비스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빠?”

“이럴 수가, 혈색이 몰라보게 좋아졌구나! 이 아비는 기쁘…… 켁!”

「넌 잠깐 나 좀 보지.」

“야, 잠깐! 잠깐! 너 설마 지금 나 때리려고……! 꺄악!”

아메트리스 후작은 기겁하는 제르비스에게 입술을 쭉 내밀고 달려들다가 공작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작은 후작이 갑작스럽게 제르비스를 맡겼을 때부터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 뒀는지 그를 패기 시작했다.

제르비스는 하마터면 뽀뽀당할 뻔해서인지 조용히 친부가 아니라 공작을 응원했다. 나도 공작의 입장에선 합당한 분노라고 생각했기에 옆에서 몰래 주먹을 말아쥐고 그를 응원했다.

그렇게 아메트리스 후작은 한참이나 이불의 먼지를 털듯 얻어맞은 후에야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그가 퍽 가련하게 훌쩍거렸다.

“와, 진짜 때리네…….”

「내 저택의 사용인들을 곤란하게 하며 여기까지 곧장 달려온 죄는 안 물었다. 다행으로 알아.」

“독한 새끼…….”

후작은 내가 수도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왔는지 아냐며 투덜거리다가,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체념하고 몸을 일으켰다.

제르비스는 그제야 후작에게 다가가 그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제리. 너는 아비가 맞고 있는데 말려 주지도 않고…….”

“내가 건강해져 봤자…… 공작님한텐 아무 소용도 없잖아.”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아무튼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아들.”

아메트리스 후작이 제르비스의 머리를 휘적휘적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제르비스를 돕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해졌다.

그때 후작이 제르비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에버딘 저택의 공기와 흙이 우리 아들한테 딱 맞는 것 같은데 그냥 사위로…….”

「뭐?」

“……삼아 달라는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가 공작이 살벌하게 내뱉은 한 음절에 급하게 말을 바꿨다. 표정은 안 보여도 말에 담긴 살기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법.

방금 흑표범을 맞닥뜨리고 백 텀블링을 하는 여우의 환영이 잠깐 보인 것 같기도.

후작도 방금은 조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큼. 아내도 막 아메트리스령 경계를 넘었다고 하고, 어지간한 일들은 다 처리해 뒀으니 제리를 이만 후작저로 데려갈까 해서. 애초에 나랑 아내가 집을 비우게 돼서 부탁한 거기도 하고.”

“아하, 후작저로…… 네?”

놀라서 제르비스를 돌아보자 그는 방금 세상이 무너진 걸 목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며 칼리오스를 놀려 댄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

처음의 충격이 가셨는지, 제르비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갈등 되나 보네.’

아무리 에버딘이 마음에 들었어도, 아들이 건강해졌다는 소식에 서둘러 달려왔다는 후작 부인을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

한참이나 침묵하던 제르비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나야 해요?”

“네 엄마와 비슷하게 도착하려면, 아무래도 그렇지.”

“그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테리랑 둘이서 시내에 놀러 가고 싶어요.”

제르비스가 시무룩하게 말하곤 내 손을 맞잡았다. 미간을 팍 구긴 공작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후작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끼어들었다.

“그래, 그래! 대신 호위들 꼭 대동하고, 너무 떨어지면 안 된다.”

「누구 마음대로…….」

공작은 대번에 으르렁대며 후작의 팔을 쳐 내려 했다. 하지만 웃음기를 지운 후작이 빠르게 뭔갈 속삭이자 공작이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뭐지……?’

슬쩍 셀레나를 쳐다봤으나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엿듣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스읍, 궁금한데.

「……다녀오거라. 미하일이나 레딘 중 한 사람은 꼭 데려가고.」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공작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외출을 허락했다. 후작은 빙글빙글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점심 먹고 출발할 거니까, 그 전까진 돌아오렴.”

“응. 가자, 테리.”

고개를 끄덕인 제르비스가 날 보며 웃었다.

몇 시간 후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그의 청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나는 미련을 털고 그를 따라 발을 뗐다.

“잠깐 방에 들리자.”

“왜?”

“기왕 외출하게 된 김에, 건국제에서 따낸 팔찌가 얼마쯤 할지 물어보러 가려고.”

* * *

테레지아와 제르비스가 저만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발레리안이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자기, 나 없는 사이에 언제 이렇게 젊고 휘황한 무지갯빛 새 애인을 들였…….”

「정말 죽고 싶나?」

“쯧, 재미없는 놈. 공녀가 언젠가 ‘이놈의 집구석!’ 하고 뛰쳐나가도 난 모른다.”

발레리안의 얼굴 옆에서 반짝이는 글씨를 놀리던 제론 아메트리스가 혀를 차며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발레리안은 어깨를 툭툭 털어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싸늘히 물었다.

「그래서, 테레지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헛소리라면 너부터 위험해질 줄 알아.」

‘애들 보내고 단둘이 얘기 좀 하지? 자칫하면 공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너.’

제론이 속삭였던, 경고에 가까운 말.

그것이 바로 제르비스가 테레지아에게 불순한 감정을 품었다는 걸 알면서도, 발레리안이 그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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