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72) (72/124)

<72화>

* * *

이름 모를 소년이 사라져 버린 후.

나는 서둘러 일행에게 돌아갔으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뛴 보람도 없이 여러 사람에게 돌아가며 혼나는 신세가 되었다.

“대체 어디 갔던 거야, 테리?”

“네가 너무 늦길래, 우리끼리라도 조각배를 만들어 띄웠어. 같이 하고 싶었는데…….”

친구들한테 혼나고.

「아가씨, 저희 정말 걱정했습니다…….」

「아가씨도 걱정되고, 주군께 조져질 제 목숨도 걱정되고…….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공작과의 약속 장소까지 동행해 준 호위 기사들에게 혼나고.

「뭐? 인파에 휩쓸려 길을 잃었었다고? 호위들은 대체 뭘 하고…….」

「……단체로 잠에 빠졌었다, 라. 다들 수면은 오늘 충분히 보충한 것 같으니 며칠쯤 안 자도 쌩쌩하겠네. 그렇지?」

보고를 들은 공작에게 호위 기사들과 나란히 혼이…… 나진 않고, 나는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는 잔소리 몇 마디만 들었다.

내가 인파에 휩쓸렸을 때, 호위 기사들이 단체로 졸아 기억이 없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희한하네, 정말…….’

그나저나 곱씹을수록 기묘하네.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소년, 그리고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다 같이 잠들어 버렸다는 호위 기사들.

이게 과연 다 우연일까?

‘흐으음.’

대체 걔는 정체가 뭐람. 힘을 숨긴 유령, 뭐 그런 거라도 되나.

고민에 잠긴 사이, 기사들을 한바탕 질책한 공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손을 잡고 다니는 게 좋겠구나.」

“헤헤, 네! 다음에는 친구들 손을 더 꽉 잡고 있을게요.”

「……제르비스랑 황태자 전하는 빼고 잡으렴. 아무튼, 연극 시간 다 됐다. 들어가자.」

공작의 말대로, 반지하 공연장 앞에서는 직원이 서둘러 입장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공작과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 적당한 자리에 앉으니 이쪽을 힐끔거리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 때보다도 사람들이 많은데, 괜찮은가?’

걱정되는 마음에 공작을 돌아보았으나, 공작은 평온한 얼굴로 저택에서 가져온 바구니를 꺼내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사람들의 시선이 아무렇지 않아졌나 보다. 기쁜 마음에 방싯 미소 지으며 그가 건네는 꿀 우유 잔을 받아 들었다.

이내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자 공작에게 쏠렸던 시선들도 무대를 향했다. 나도 그제야 상념을 지우고 연극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연극 제목은 <재투성이 공주의 호수>.

주인공 재투성이 공주는 은색의 긴 곱슬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미인.

하지만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잃고, 악독한 새 왕비와 새언니들에게 구박받는 기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울지 말아요, 공주님.’

매일매일을 눈물로 지새우던 그때 요정이 나타나고, 재투성이 공주는 요정의 도움으로 옆 나라 왕자의 생일 무도회에 참석하게 된다.

왕자와 재투성이 공주는 서로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요정의 마법은 자정이 되면 풀려 버리는 탓에 재투성이 공주는 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왕자는 공주가 떨어트리고 간 구두 한 짝을 줍는다.

요정의 존재를 세상에 밝힐 수는 없었기에, 공주는 왕자가 자신을 찾아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구두의 주인과 결혼하겠소!’

왕자는 공주를 찾기 위해 대륙의 모든 여인을 만나 보겠다 선언한다.

재투성이 공주는 하루빨리 자신의 차례가 오길, 그래서 그가 자신을 찾아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제가 그 구두의 주인입니다, 왕자님.’

재투성이 공주의 차례가 오기 직전. 검은색 긴 곱슬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바다 건너 왕국의 공주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자신이 왕자의 사랑이라 주장했고, 왕자는 구두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간다.

구두는 놀랍게도 여인의 발에 꼭 맞았다. 게다가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생일 무도회에서 보았던 이와 놀랍도록 흡사한 생김새까지.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나의 사랑이야!’

왕자는 그 여인이 자신이 찾던 이라 확신하고,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다. 그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재투성이 공주가 깊은 숲속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두 사람은 엇갈려 버린다.

극이 그렇게 마무리되나 싶었으나…… 대망의 결혼식 날!

‘공주여, 처음 만났던 날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합니까?’

‘당연하지요. 바다의 깊음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거짓말! 나는 숲의 푸르름에 관해 얘기했소! 당신은 누구기에 거짓으로 나를 기만하는가!’

약혼 기간에 위화감을 느낀 왕자가 약혼자를 추궁하고, 결국 가짜임이 드러난 검은 머리카락의 공주는 벌을 받아 바다로 내쫓긴다.

왕자는 후회막심한 심정으로, 뒤늦게 재투성이 공주를 찾아 숲으로 향하는데……!

뭐, 대충 이런 줄거리라며 무대에 오른 사회자가 열정적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속으로 감탄 아닌 감탄을 흘렸다.

‘와, 뭐 이런 막장극이 다 있지.’

헤이튼이 들었다면 개연성은 다 말아먹어 놓고 말만 그럴싸하게 늘어놓는다며 펄펄 뛰었을 법한 내용이었다.

물론, 이건 글이 아니라 극이니까 어느 정도의 조잡함은 그러려니 넘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과연 공작도 그럴까?

최근 몇 년은 부유한 평민보다도 못한 생활을 했다지만, 그래도 나름 최고위 귀족으로 자라 온 사람인데.

“저, 공작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공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극 내용이 너무 별로라고 느껴지면 나가도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엥.’

하지만 공작은 의외로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사회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 있을 만큼.

공작의 표정은 평소처럼 덤덤했으나 금색 눈은 더없이 반짝거렸다. 사회자가 추임새를 넣어 극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순간에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꽉 움켜쥐기까지.

‘의외네…….’

나는 하려던 말을 도로 속으로 삼킨 후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재밌으면 된 거지.

마침 한바탕 설명을 늘어놓은 사회자가 무대 아래로 내려가고 분장한 배우들이 등장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재투성이 공주였다.

‘은발…….’

재투성이 공주의 은색 머리카락.

그것을 보고 있자니 아까 보았던 소년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통 연극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 눈은 무대를 향해 있었으나 정신은 온통 아까 만난 소년에게 쏠려 있었다.

결국 연극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대신 쌓였던 의문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대체 정체가 뭘까, 걔?’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얼버무리고는 대뜸 뽀뽀하고 튀었지.

‘그러고 보니, 가면도 쓴 놈이 가발을 안 썼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다시 생각하니 수상함 그 자체잖아? 아까의 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놈을 내버려 뒀던 거냐.

소년에 관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공작님이 아닌 사람이랑 춤추는 건 릭이랑 제일 먼저 하기로 했는데!’

걔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를 춤판으로 이끌어서 덩달아 휘말렸지…….

꼭 이럴 때만 양심이 아팠다. 잠시 심장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다가 결심했다.

‘일단은…… 숨기자, 응.’

안 그래도 요즘 릭이 이상하게 우울해 보이는데, 내가 자기랑 약속한 것까지 어겼다는 걸 알면 아예 드러누워 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적어도 릭의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는 다른 사람과 춤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나으리라.

‘미안…….’

대신 내가 잘해 줄게…….

속으로 변명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디 릭이 후일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속상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재밌으셨어요, 공작님?”

「뭐, 음. 어느 정도는…….」

‘……재투성이 공주가 충격받고 쓰러질 때 같이 울었으면서.’

분명 연극 중간에 공작이 몰래 장갑에 눈물을 찍어 내는 걸 보았지만, 테레지아는 착한 아이답게 모르는 척 방실방실 웃었다.

어쨌거나 그라도 연극을 즐긴 듯 보여 다행이었다.

“그럼 저희 이제 배 타러 가요! 세바스찬이 불꽃놀이는 꼭 호수 중간에서 봐야 한다고 했잖아요. 얼른얼른!”

테레지아가 발레리안의 손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는 아이의 신난 얼굴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배를 타러 가는 길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테레지아는 낮에 있었던 일들, 특히 풍선 다트 게임에서 1등을 했다는 걸 자랑스레 늘어놓으며 상품으로 받은 다이아몬드 팔찌를 보여 주었다.

발레리안은 내심 팔찌보다 아이의 눈이 더 빛난다고 생각했으나 보호자답게 착실히 맞장구쳐 주었다.

밤이 되자 노점에서 내놓는 상품들도 달라졌다. 낮에는 달달한 디저트 종류의 음식 위주였다면, 지금은 양념을 발라 구운 닭 꼬치처럼 매콤하고 짭짤한 음식 위주였다.

“……맛있겠다.”

테레지아는 지글지글 익어 가는 닭 꼬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발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미나가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했잖니.」

“…….”

그 말에 테레지아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미련 탓에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아이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울상을 짓고 쳐다보는 것보다, 세상사를 전부 체념한 얼굴로 침만 졸졸 흘리는 게 두 배는 더 불쌍해 보였다.

발레리안은 끝내 항복하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나만 먹겠다고…….」

“약속! 약속할게요! 맹세!”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이 돌아왔으나 그조차 귀여웠다.

발레리안은 자그마한 웃음을 흘리며 아이의 손에 닭 꼬치를 들려 주었다.

나중에 하녀의 잔소리를 듣다가 귀에서 피가 날지언정, 지금만큼은 닭 꼬치를 받아 들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히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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