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 말을 듣는 순간 없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내밀한 속내가 남의 손에 까발려졌다는 생각에 사나운 분노가 치밀었다.
<당신이 뭔데……!>
릭은 반사적으로 소리치다가 흠칫 입을 다물었다.
평소의 정신 나간 부랑자 같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거지 유령은 어딘지 오만하고, 또 권태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신’처럼.
<당신…… 뭡니까?>
긴장된 물음에 거지 유령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디 하고픈 말이 있다면 해 보라는 식의, 묘하게 고압적인 태도였다.
릭은 잔뜩 경계심을 세우다가 마지못해 추측 하나를 내뱉었다.
<설마 악령이라도 되는 겁니까?>
<뭐? 악령? 푸하핫!>
그러나 정작 시선으로 답을 독촉하던 거지 유령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커다랗게 웃어 젖혔다.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에 릭이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는 순간, 거지 유령이 구부정하던 허리를 폈다.
<내게 악령이라…….>
고작 그뿐이었는데, 직후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노인처럼 쭈글쭈글하던 얼굴은 물이 차오르듯 매끄러워졌다.
눈가를 다 덮던 더벅머리가 허리께까지 자라나 찰랑거렸고, 먼지가 툭툭 떨어지던 누더기는 상서로운 빛을 흘리는 흰 천으로 변모해 조각 같은 몸을 휘감았다.
그 모든 변화가 눈을 한번 깜빡할 시간에 이루어졌다.
<무슨.>
릭은 제 앞에 선 이를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반라에 가까운 차림의 남자는 그야말로 신의 사랑을 받는, 신의 사랑을 받아 만들어진 가장 완벽한 피조물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신, 그 자체에 가까워 보이는 모습.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하데스.”
더는 거지 유령이라 부를 수 없는 남자가 나직이 웃었다.
“너희가 죽은 자의 땅이라 부르는 곳과 모든 망령의 왕이다.”
<……!>
거대한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릭은 한참이나 남자, 하데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물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째서, 그런 몰골로 여기 있는 겁니까?>
그 물음에 하데스가 사납게 입매를 비틀었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금빛 눈이 흉흉히 번뜩였다.
“건방지게도 나를 보필하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없앤 것들이 어떻게 망해 가는지 지켜보려고.”
듣는 것만으로도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 차디찬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말에서 숨기지 않은 잔혹함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자꾸만 입술이 굳어지려 했으나 릭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으며 항변했다.
<그건 에버딘 공작이 아니라 황제의 탓이었습니다.>
모르티아 일족을 토벌한 것은 발레리안 에버딘. 하지만 그 토벌을 명한 것은 현 황제다.
그러니 따지고 보자면 모르티아 일족이 죽게 된 것은 황제의 탓에 가까웠다.
그러나 하데스는 가당찮다는 듯 실소했다.
“내가 인간들의 사사로운 사정까지 헤아려야 하나?”
그 ‘비인간적인’ 웃음에, 릭은 그제야 새삼 눈앞의 남자가 절대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너랑 그 아이는 지켜보고 있자니 좀 재미있어서 말이지.”
금빛 눈이 흥미로 빛났다. 릭은 하데스가 뱉은 말에 흠칫했다.
‘그 아이’라면, 설마.
<……테레지아?>
“그래. 네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 말이다.”
하데스는 꼭 시험하듯이 릭을 응시했다.
릭은 하데스가 자꾸만 제 속내를 들쑤시고 긁는 이유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이윽고 차분히 말문을 뗐다.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어차피 저는 죽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테레지아는 어쩌면 릭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었지만, 그는 그럴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최근 며칠 동안 의미 없는 소망을 주기적으로 짓밟은 덕에 그는 제법 덤덤히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질서를 어지럽힐 생각이 없습니다.>
릭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하데스는 망령들을 다스리는 왕. 그러니 자신이라는 망령이 산 사람이 되겠다며 설치지는 않을까 싶어 친히 경고한 것이리라.
불가능한 일을 꿈꾸지 말라고.
테레지아의 곁에 나란히 서고 싶다는 바람은 가당찮다고.
<그러니 안심하시길. 테레지아의 시간과 저의 시간이 다르다는 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음 한편이 칼에 찔린 듯 욱신거렸으나 신에게 대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은 자신의 바람으로 인해 테레지아까지 위험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억지로 고개를 수그린 것에 가까웠지만.
릭은 이것이 테레지아를 위한 최선임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부디 이 답이 하데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니, 넌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렇게 사물을 제 몸 쓰듯이 쓸 수는 없었겠지.”
<……예?>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살아 있다고?’
내가…… 산 사람이라고?
영원히 이루어질 일이 없다고 생각한 소원이 갑작스레 코앞까지 다가왔다. 릭은 전에 없이 다급한 심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렇다면 혹시 제가 누구인지도…….>
“내가 네가 물으면 답해야 하는 존재인 줄 아는 것이냐?”
하데스는 릭의 말을 싸늘히 일축했다. 살기에 가까운 위압감에 말문이 막혀 릭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하데스가 돌연 스스로 조성한 분위기를 깨며 빙긋 웃었다.
“뭐, 그래도 너는 피해자에 가까우니 좀 더 자비를 베풀어 주마.”
조금 전과는 판이한, 변덕스럽다는 감상마저 불러일으키는 태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 종잡을 수 없고 두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되어서 테레지아와 함께 축제에 가고 싶다고 했지?”
안 그러려 해도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데스는 릭이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을 구경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잠시나마 네게 인간의 몸을 만들어 주마. 기한은 저녁 8시까지, 대신 누구의 몸을 가지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예?>
“아, 테레지아에게 네가 누군지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런 금제를 걸어 둘 거니까.”
<아니, 그렇게 제멋대로……!>
릭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말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항의하려 했다. 찰나 눈앞의 존재가 신이라는, 더없이 두려운 존재라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당황스러웠으니까.
하지만 하데스는 릭의 말을 무시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엄지와 중지가 맞부딪히며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빛이 릭을 감쌌다. 놀란 그는 양팔을 교차해 눈을 가리려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콰당!
“윽……!”
얼얼한 고통에 신음하던 릭이 한발 늦게 찬물을 뒤집어쓴 듯 굳어졌다.
넘어질 때 나는 커다란 소리, 곰 인형이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통증, 신음이 목을 울리는 느낌.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감각들에 얼어붙어 있던 릭이 황급히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움직임을 멈췄다.
“……아.”
릭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거울 속에는 테레지아와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희고 고운 얼굴, 달빛으로 실을 자아낸 듯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 보랏빛 눈이 비현실적이었다.
무의식중에 거울을 향해 손을 뻗으니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더없이 충격적인지라 릭은 한참이나 갈라진 손끝을 바라보았다.
이건 대체 누구의 얼굴과 몸일까.
“자, 어쩔 테냐.”
그때 들려온 하데스의 말이 릭을 거울 속에서 현실로 건져 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데스가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해맑은 얼굴로 개미를 짓눌러 죽이는 아이처럼. 혹은 독이 든 사과를 내미는 뱀처럼.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잠깐이나마 그토록 바라던 소원을 이뤄 볼 테냐. 골라라.”
* * *
하데스가 내민 것이 독일지, 약일지 알 수 없었지만. 결국 릭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제 인간 모습이 ‘누구’의 것일지 알 수 없으니, 혹시 모를 소란을 막기 위해 가면을 착용한 채 테레지아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가까스로 하데스가 말한 8시에 맞춰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곰 인형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릭은 멋대로 테레지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을 때, 그녀가 눈을 댕그랗게 떴던 걸 기억하며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설령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같은 행동을 했을 거란 사실을 알아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애들이라니까.>
릭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시 거지 유령의 모습으로 돌아온 하데스가 분위기에 맞지 않게 낄낄거렸다.
릭은 그를 째릿 노려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두렵기도 했고, 어쨌든 그의 도움 아닌 도움 덕에 찰나지만 테레지아와 춤을 출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릭이 반응하지 않자 시시하다며 혀를 찬 하데스가 몸을 느릿느릿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다시 빈 술병이 들려 있었다.
<아, 오늘 있었던 일이나 나에 관한 건 발설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한번 두고 보자고.>
<……뭘 말입니까?>
릭의 불안한 물음에, 방문 밖으로 반쯤 빠져나갔던 하데스가 고개만 뒤로 쭉 뺐다. 그가 릭을 보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좋아하는 그 아이가 널 알아볼 수 있을지, 없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