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뭐, 그래도.’
그것과 별개로 지금의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황당하고 생소해서 더 크게 와닿았다.
평소 내가 춤을 추던 곳은 에버딘 저택의 연회장, 혹은 무도회장뿐이었다.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시끌벅적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 사이에 섞여 춤을 추는 것은 처음이었다.
춤의 형식도 다양했다. 나와 소년처럼 정석적으로 마주 본 채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고, 열 명이 훌쩍 넘는 이들끼리 손을 잡고 모닥불 주위를 빙빙 돌기도 했다.
얼떨결에 휩쓸려 시작한 춤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즐거웠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발이 꼬여 휘청였다.
“앗.”
소년이 재빠르게 붙잡아 준 덕에 넘어지는 것은 면했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고, 그에게 안기다시피 한 자세가 되는 바람에 놀라 후다닥 몸을 물렸지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소년은 내가 눈에 보일 정도로 펄쩍 뛰며 제게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기분 나쁜 기색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빛에 괜스레 억울해졌다.
‘누가 보면 나 좋아하는 줄 알겠어.’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으나 얼굴에 또다시 열이 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모닥불의 불빛 때문이라고 우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던 곡이 끝났다. 길게 이어지던 플루트 소리와 춤이 멈추자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 쳤다.
그 왁자지껄함이, 분위기가, 사람들의 생기가 좋았다.
‘이래서 다들 축제를 좋아하고 기다리나 봐.’
여러모로 얼렁뚱땅인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춤추는 건 재밌었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아.”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무언가를 바라보던 소년이 흠칫 탄식했다.
의아함에 그를 따라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첨탑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시곗바늘이 곧 오후 8시가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낭패감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소년이 맞잡고 있던 손을 놓고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손이 떨어지는 순간 우습게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유 모를 직감에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름이라도! 이름이라도 알려 줘요!”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가면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대로 가 버리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이름이라도 알아내야…….’
‘다시 만나야 해? 왜?’
‘아, 시꺼!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냐!’
이성과 감성이 속에서 치열하게 싸워 댔다. 그리고 감성이 승리했다. 원래 논리는 무논리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하하.”
그사이, 내가 갑자기 붙잡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소년이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모닥불의 불빛 때문일까. 그의 얼굴이 옅은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내가 착각에 빠져 있는 사이, 소년이 손을 뻗었다. 곧고 길게 뻗은 흰 손가락이 조심스레 얼굴을 감쌌다.
‘어?’
지금 좀…… 가깝지 않나?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나비가 내려앉는 듯한 감각이 이마에 다녀간 후였다. 작게 촉 소리가 나더니 소년의 얼굴이 다시 멀어졌다.
어, 그러니까, 쟤 지금.
‘내, 이마에…… 뽀뽀한 거야?’
너무 놀라서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까스로 입술만 뻐끔거리는 내게 그가 속삭였다.
“내가 누군지 찾아내 줘요.”
“……어, 뭐요?”
“저는 당신이 조금 더 저한테 집착해 줬으면 좋겠거든요.”
그리 말하는 소년의 보랏빛 눈은 어째서인지 서글퍼 보였고, 또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그 까닭을 물을 틈도 없이, 그는 서둘러 몸을 돌려 멀어졌다. 흰 머리카락과 재킷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깐만요!”
한발 늦게 몸이 움직였다. 나는 소년을 쫓아가려 했으나 하필 그때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다.
춤추는 이들의 옷자락이 붕 떠올랐다가 가라앉았을 때, 그는 이미 눈 녹듯 사라진 후였다.
아직도 손에, 이마에 남아 있는 열감이 아니었다면 전부 다 허황한 꿈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이게 대체 다 무슨…….”
“……리!”
“……가씨! 어디 계십니까!”
어안이 벙벙해 중얼거리는데 귓가로 희미한 외침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번개가 치듯 잊고 있던 것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헉, 맞다! 애들 기다릴 텐데! 악! 나 두 번째 춤은 릭이랑 추기로 했는데!”
나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야악!
잠깐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아니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조금 전의 나를 벌하듯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일단 일행들한테 해명부터 하자는 마음에 사람들 사이를 조심조심 헤쳐나갔다.
“저기, 아이고. 잠시만 지나갈, 으악, 게요!”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다치지 않고 춤판을 빠져나왔다. 숨 고를 새도 없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내달리다가 문득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누군지 찾아내 줘요.’
아직도 입술이 다녀간 자리가 홧홧한 느낌이었다.
* * *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건국제 거리와 반대로, 사람들이 죄 빠져나간 거주지 쪽은 평소보다도 고요했다.
에버딘 저택 역시 주인과 후계자, 그리고 그 호위들이 빠져나간 탓에 한산했다. 덕분에 누군가는 경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2층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어둠 탓에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테레지아의 방 창문은 열려 있었다. 반투명한 흰 커튼이 밤바람에 소리 없이 살랑거렸다.
턱.
흰 손이 불쑥 창턱 위로 얹힌 것은 그때였다. 직후, 휙 하고 흰 인영이 솟아오르더니 방 안으로 착지했다.
“하…….”
그것은 머리카락도, 재킷도 새하얗게 빛나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생소한 눈길로 제 양 손바닥을 응시하던 때였다.
뎅- 뎅- 뎅-
8시를 알리는 종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소년의 모습이 흰빛에 휩싸였다.
어두운 방을 환히 밝히던 빛무리는 점차 작아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빛에 휘감겼던 은발의 소년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상당히 음산하게 생긴, 붉은 리본을 맨 곰 인형뿐이었다.
<…….>
모습이 바뀌는 것과 동시에, 숨이 차고 심장이 빠르게 뛰던 감각도 촛불이 꺼지듯 훅 사라졌다. 그 기이한 감각을 곱씹던 곰 인형의 귓가로 툴툴대는 말이 흘러들어왔다.
<8시까지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딱 맞춰서 돌아오다니 간도 크지.>
곰 인형, 릭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베드 벤치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거지 유령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렇듯 고급스러운 방이 아니라 뒷골목이 더 어울릴 법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님을 알기에 릭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긴장시켰다.
<그래서.>
그에 화답하듯 거지 유령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퀭하던 눈에 형형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삐뚜름히 턱을 괬다.
<짧게나마 인간으로 살아 본 기분은 어떠냐, 곰돌아.>
그 말에 릭은 시선을 내려 제 손을, 아니, 이제는 손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흰 솜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유령에서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에서 유령이 된 기분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릭은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은 고작 몇 시간 전, 누군가의 어린애 장난 같은 변덕과 호기심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 * *
몇 시간 전.
<테리는 잘 놀고 있으려나.>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릭이 문득 혼잣말했다.
테레지아에게는 ‘검댕이와 함께 있겠다’라고 했으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검댕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서, 릭은 뉘엿뉘엿 노을이 다 질 무렵까지도 창틀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릭의 곁에서 알짱거리며 그를 귀찮게 하던 셀레나와 다른 유령들도 그가 아무런 반응을 해 주지 않자 하나둘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정적 속에 남겨졌다.
<……분명 아메트리스 후작 영식과 황태자가 수작을 부리고 있을 텐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릭이 자조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추잡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해 놓고서, 정신을 잠깐 놓으면 다시 이 꼴이었다.
릭이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리를, 생각을 비우는 데 집중하고 있을 때.
‘그’가 찾아왔다.
<혼자서 뭘 그렇게 구시렁거리느냐.>
릭은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라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지 유령이 언제나처럼 자유분방한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다가오고 있었다.
숱한 경험으로, 릭은 유령들에게 시달리지 않으려면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어 말없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시당하거나 말거나. 창 아래에 털썩 주저앉은 거지 유령이 직후 검지로 그를 척 가리켰다.
<너.>
어쩐지 섬뜩한 목소리에 릭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기괴한 미소를 띤 거지 유령이 그의 속내를 아주 정확히 후벼 팠다.
<인간이 되고 싶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