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69) (69/124)

<69화>

“어…….”

오블렌 자작이 날 쫓아내겠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아무런 생각도 못 하진 않았는데.

나 왜 이러지……?

혼란스러움에 눈만 깜박이던 중.

불현듯 눈을 사르르 접어 웃은 소년이 내 손을 잡더니 부드럽게 잡아당겨 걷기 시작했다.

억지로 잡아당겼다면 대번에 뿌리쳤겠지만, 내가 몸을 뒤로 기울이기만 해도 충분히 빼낼 수 있을 만큼 연약한 손길이라 외려 그럴 수가 없어졌다.

‘어, 어?’

결국 나는 얼떨결에 소년을 따라 걷게 됐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데, 평소에는 재깍재깍 제 일을 하던 경계심, 본능 등이 지금만큼은 모두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난생처음 만난 이 소년이 결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쿵, 쿵, 쿵.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심장 뛰는 소리에 밀려 저만치 멀어졌다.

시야에 들이차는 것은 색색이 흩날리는 종잇조각. 그리고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아스라한 소년의 뒷모습뿐.

그건 그야말로,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 * *

“테리, 어딨어!”

“테레지아!”

한편,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는 테레지아가 사람들에게 휩쓸려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급히 그녀를 뒤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아직 성인의 절반쯤 되는 몸집의 아이일 뿐이었다.

제힘으로는 저만한 인파를 뚫고 나갈 수 없음을 직감한 제르비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위……!”

테레지아 일행에게는 낮부터 공작이 붙여 둔 호위가 뒤따르고 있었다.

에버딘 기사들의 실력은 익히 알려져 있으니 그들 역시 자신들의 아가씨가 사라졌다는 것쯤은 금세 눈치챘을 터.

하지만 어째서인지 늘 먼발치에서 일행을 주시하고 있던 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한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일이 생겨도 하필 이런 때!

제르비스는 도움받는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이를 악물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칼리오스 역시 제르비스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를 짜증스럽게 노려보았지만 무례하다고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테리! 들리면 대답……!”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이던 그때.

칼리오스는 빼곡한 인파 사이로 언뜻 사라지는 흰 머리칼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어? 방금…….’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한순간 아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이릭?”

* * *

말없이 웃기만 하며 걸어가던 소년이 발을 멈춘 곳은 아까 식사 중 보았던,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는 광장이었다.

“여긴…….”

그제야 이렇다 할 말을 뱉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소년이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그래 봐야 몇 분 안 되는 시간인데, 그새 그와 손을 잡고 있던 것에 익숙해졌는지 손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나 지금 뭐 한 거야?’

그 감각에 화들짝 정신이 돌아왔다.

뒤늦게 내가 일행에게 말도 하지 않고 난생처음 보는, 아니, 사실 가면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으니 본다고도 할 수 없는 이를 따라왔다는 사실이 자각됐다.

그제야 경계심이 반쯤이나마 제 기능을 찾았다. 슬그머니 한 발 물러서며 양손을 등 뒤로 감추자 소년이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 무구한 행동이 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더 멀어지기엔 눈치가 보였다. 스스로도 이런 내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그,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도움받은 게 있으니 그에 대한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그런 생각으로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소년은 잠시 답이 없었다. 그러나 곧 낮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별말씀을요.”

‘으왁……!’

모, 목소리. 목소리 뭐야?

일순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공작님의 목소리도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듯 귓가가 간지러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쯤 되니 정말 상대가 사람이 맞는지 의심되었다.

‘혹시 정말로 유령 아냐?’

조금 전까지 소년의 손이 산 사람처럼 따듯하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티 나지 않게 그를 살피는데, 내가 그러는 동안 뭔가를 망설이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

“네, 네?”

나는 소년을 관찰하던 것을 들킨 줄 알고 화들짝 놀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하마터면 혀 씹을 뻔했네.

그러나 태도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그는 한 손으로 어색하게 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동작이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제게 고마우시다면 혹시……. 아, 그렇다고 제가 대가를 바라고 도와드린 건 아니지만. ……아니, 맞나?”

“……?”

머뭇대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갑자기 제풀에 놀라 당황하더니, 별안간 심각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며 중얼거린다.

그래서 의도를 가지고 날 도와준 게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혼란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리자, 시선을 느꼈는지 소년이 급하게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음, 그러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앗, 셀레나가 저건 전형적인 사기꾼들이 하는 말이랬는데. 설마……!

“괜찮으시다면 저랑 춤 한 번만 추지 않으실래요?”

엥?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춤…… 이요?”

“네, 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소년이 나긋이 되풀이하며 빙긋 웃었다. 가면 탓에 어찌 보면 반 토막짜리 웃음이었는데도 심장이 덜걱거렸다.

사실 소년이 나를 도와준 대가로 돈을 요구하리라 생각했다. 혹은 돈이 아니더라도 뭔가 이득을 취하려 들 줄 알았지.

하지만 정작 그가 대가랍시며 요구한 것은 고작 춤 한 번이었다.

뭔가 수상한 의도를 지녔다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아무런 가치 없는 보상 아닌가?

그야말로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입 밖으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갔다.

“어어…….”

“좋다는 뜻인가요? 고마워요.”

“네? 그게 아니, 어…….”

조금 전까지 어색하고 초조해하던 모습은 다 어디 갔는지. 기쁘다는 듯 미소 지은 소년이 냉큼 내 손을 붙잡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할까 했지만, 춤 한 번 춰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버렸으니 섣불리 나가려 드는 것보다는 그냥 곡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추다가 빠져나가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았다.

‘아까부터 구경하고 싶기도 했으니까.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 애랑 있으면 이상하게 자꾸만 바보처럼 행동하게 되니까, 차라리 빠르게 한 곡을 추고 멀어지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싶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의구심은 끝없이 자라났다.

먼저 춤을 추자며 손을 내밀었으니 어느 정도는 춤을 잘 추겠거니 막연히 상상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소년은 음악에 맞춰 어색하게 몸을 돌리다가 말고 또 한 번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그의 발이 내 발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앗, 미안해요.”

하마터면 내 발을 밟을 뻔했다는 걸 깨달은 소년이 황급히 사과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자그맣게 덧붙였다.

“……몸을 움직여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자꾸 실수하게 되네요.”

저게 무슨 뜻일까 고민하다가 반짝 깨달았다.

‘얘도 운동 되게 안 하나 보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시선을 슬쩍 내리자 반듯하고 곧게 뻗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니 나와는 전혀 다른, 단단한 골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으.’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해 황급히 다시 시선을 제자리로 돌리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똑같이 운동을 안 하는데 얘만 이렇게 몸이 좋을 일인가. 이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편해져야 하는 게 보통인데, 지금은 갈수록 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온몸이 간질간질한 감각을 못 견디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건 그렇고, 이름이 뭐예요?”

눈앞의 이 아이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면 이 불편함도 사라지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음…….”

하지만 소년은 내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곤란하다는 듯한 웃음과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름 정도면 되게 간단한 질문 아닌가?

의아했지만 본인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하니 구태여 캐묻진 않고 다른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럼 이름 말고. 나이는?”

“아직 성인이 안 된 건 확실해요.”

“그건 눈으로 봐도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사는 곳은요?”

“어, 에버딘령……?”

“……거참 넓은 데 사시네요.”

이외에도 여러 질문을 던졌으나 소년의 대답은 죄다 두루뭉술하거나, 뜬구름 잡는 것들이었다.

좀 삐걱거리긴 하지만, 귀족들이 주로 배운다는 사교댄스를 아는 것과 묘한 분위기를 보니 귀족가의 자제인 것도 같은데. 그것도 결국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는 없어 추측에 불과했다.

분명 상대를 파악해 보려고 시작한 대화였는데. 어째 파악은커녕 의문만 더 잔뜩 얻어 온 기분…….

‘진짜 뭐 하는 놈이지……?’

근데 왜 나는 또 얘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드는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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