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애들이 왜 저러나 싶어 얼떨떨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당황이 조금 가시고 나니, 뭐. 본인들이 나서서 짝을 하겠다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어 보여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럼 내가 하리엔이랑 짝을 할까? 아무래도 리벨은 멀린이랑 할 테니까.”
“난 좋아.”
하리엔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리벨과 멀린이 한 팀,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한 팀, 나와 하리엔이 한 팀이 되어 출발선에 섰다.
“자, 참가팀이 모두 제자리에 섰군요! 10을 세면 경기가 시작됩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관객들이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어 하리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 경기, 따로 참가비도 안 받는 거 같던데. 어떤 할 일 없는 부자가 취미로 만든 경기라도 되는 걸까?”
“모르겠어……. 그런데 슬쩍 봤더니 어른들끼리 돈을 걷고 있더라고. 경기 결과로 내기를 하나 봐.”
“아항…….”
하긴, 뭐. 남에게 피해만 안 끼친다면야 거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참가 팀은 우리를 포함해 총 5팀. 경기에 뛰어든 이상 중요한 건 하나였다.
‘이긴다!’
물론 리벨 팀이나 제르비스 팀이 우승한다고 해도 식사권은 따낼 수 있겠지만. 기왕 참가한 거 우승하면 좋잖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0, 9, 8……!”
때마침 사회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하리엔과 어깨동무를 하고 상체를 살짝 낮춰 달려갈 준비를 했다.
“……1! 경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폭죽이 팡, 터지는 소리가 울리며 환호성이 귓가를 먹먹하게 메웠다.
“하나, 둘! 하나, 둘!”
우리는 신호가 울리자마자 곧장 어깨동무를 한 채 발을 움직였다. 엇갈리지 않도록 입으로 수를 세어 가며 걷자 생각보다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철푸덕!
“으, 으아앙!”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라인에서 달리던 팀이 넘어졌다.
남매로 보였는데, 남동생이 넘어지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엉엉 울기 시작해서 더 이상의 진행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 팀은 그렇게 탈락했고, 남은 건 이제 넷. 선두는 리벨 팀이었고 나와 하리엔은 이름 모를 형제 팀과 나란히 끄트머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차이가 크진 않으니까, 실수만 하지 않으면 역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어, 어……!”
“조심해!”
바로 그때, 옆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와 나란히 달리다시피 하던 형제 팀이 발이 꼬여 넘어지고 있던 것이다.
문제는, 그 둘이 쓰러지는 방향이 하필 내 쪽이었다는 거다.
우당탕!
“윽……!”
형제들의 몸이 어깨에 부딪히자 곧장 균형이 무너졌다. 하리엔과 나는 형제 팀과 뒤얽히다시피 해 바닥을 굴렀다.
‘스읍. 쓸렸나?’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지만 넘어진 부분이 아팠다. 가까스로 신음을 삼키고 있던 차에 근처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테리!”
“이 미친, 뭐 하는 거야! 줄 풀면 실격이라고! ……하지만 동의한다!”
고개를 드니 제르비스가 발에 묶어 두었던 줄을 풀어 버리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칼리오스는 그를 질책하려다가 동조하며 함께 오고 있었고.
아, 아니. 줄 풀면 실격이라며. 너희 그래도 괜찮은 거야……?
“테리, 하리! 둘 다 괜찮아?”
저 앞에서 앞서 나가던 리벨과 멀린도 경악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달려와야 할지, 아니면 결승점을 통과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무의식중에 하리엔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
그러자 하리엔도 나를 보고 있었는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나눈 말은 없었지만, 우리의 생각이 같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테리, 괜찮…….”
제르비스가 나를 부축하려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뻗던 순간. 나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리엔과 함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긴다아악!”
“이길 거야……!”
걱정은 고맙지만, 그것과 별개로 제르비스 팀은 알아서 실격당해 줬고! 형제 팀이 쓰러지고, 리벨 팀이 걸음을 멈춘 지금! 잘하면 역전의 기회다!
“뭐, 뭐야! 쟤들 멀쩡하잖아!”
“다시 달리기나 해, 멀린! 이러다가 따라잡히겠어!”
멀린과 리벨은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바삐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하리엔과 내가 상당히 거리를 좁힌 후였다.
당황한 리벨 팀과 눈짓만으로도 호흡이 맞는 우리 팀.
그 사이의 격차가 조금씩 좁혀지더니, 마침내 간발의 차로 내 발끝이 결승점을 먼저 넘어섰다.
“우승팀은…… 3번입니다! 와, 정말 아슬아슬하고 흥미진진한 경기였네요! 축하합니다!”
“와아아아!”
폭죽이 팡팡 터지며 종이 꽃잎이 흩날렸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숨은 가쁘고 얼굴 옆으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넘어진 곳도 아직 아팠지만, 아픔은 이겼다는 성취감과 기쁨에 모조리 지워져 사라졌다.
“테리, 넘어졌는데 그렇게 뛰면 어떻게 해……!”
“야, 너희! 치사하게 이러기야?! 걱정해 주는 사람을 이용하는 법이 어딨어!”
일행들이 제각기 소리치며 달려왔으나 지금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환히 웃는 얼굴의 하리엔과 마주 보며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만세!”
아, 기분 끝내준다!
* * *
다소의 고난은 있었지만 우리는 무사히 호수 변 레스토랑의 식사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인삼각 경기 우승자라고 하자 특별히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 자리로 안내받았다. 노을이 뉘엿뉘엿 내려앉고 있는 호수는 장관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멋있었다.
“다들 한 입 한 입 나랑 하리엔한테 감사하면서 먹도록.”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요리에 뿌듯함을 느끼며 너스레를 떨자, 포크를 집어 들던 멀린이 질린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우. 알았다, 알았어. 쟤 생긴 건 말랑한데 승부욕이 장난 아냐. 무서울 지경이라니까.”
“무서우면 알아서 잘하렴.”
“……저 정도는 되어야 유령 공작가에서도 살아남는 거구나.”
고된 승리 뒤의 식사는 꿀맛이었다. 아이들과 재잘재잘 떠들며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어느새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아.”
“맛있었다!”
모두가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을 때쯤 거리에도 하나둘 등이 켜졌다.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불빛이 반짝거리는 호수를 구경하고 있는데, 호수 저편에 펼쳐진 광장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저기는…… 춤추는 곳인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꽤 자유분방하게 춤을 추고 있었는데, 가면을 쓴 이들도 있었다.
“테리는 곧 공작님이랑 연극 보러 간다고 했나?”
“어? 어, 맞아.”
배가 불러서 그런가. 조금 멍하니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리벨이 불쑥 던진 물음에 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리벨이 뭔가를 고민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우리, 헤어지기 전에 저쪽에서 조각배 만들기 체험까지만 하고 가지 않을래?”
“좋아!”
조각배 만들기라니, 재밌겠다는 생각에 냉큼 수락하고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밀지 마요!”
“좀 지나갑시다, 아이고!”
밖으로 나오니 낮보다 사람이 더 많아져 있었다.
낮에는 그래도 걸음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자칫하다간 사람들 사이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멀린은 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를 보고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다 같이 움직이다간 다치겠는데…….”
“어쩔 수 없지. 반으로 갈라지자. 나는 얘네랑 같이 움직일게. 너희도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고, 조각배 만들기 체험장에서 만나자.”
“알았어.”
결국 우리는 하리엔의 의견대로 나누어 이동하기로 했다. 리벨, 멀린, 하리엔이 함께 움직이고 나는 제르비스, 칼리오스와 함께 움직였다.
“손잡을래, 테리?”
“그게 좋겠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단단히 맞잡고 인파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밖에서 볼 때도 아득한 인파였는데, 직접 뛰어들어 보니 배는 더 막막했다.
“잠시, 으풉. 만요. 지나가요. 잠시만요.”
나는 두 사람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렇게 힘겹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데 적응해 갈 때쯤, 일이 터졌다.
“지금부터 남은 상품들을 반값에 판매합니다! 파격 세일! 두 번 다시 없을 기회!”
한 노점에서 소리친 말에 사람들의 파도가 크게 꿈틀댔다. 내가 불길함을 감지하고 목소리를 높이려 했을 때는 이미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의 손을 놓친 후였다.
“테리!”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의 경악한 목소리가 멀어졌다. 내 음성이 그들에게 닿길 바라며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고 섰다.
“난 괜찮아! 혹시 못 찾으면 체험장에서 봐!”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인파에 완전히 휩쓸렸다. 세상이 어찌나 빙글빙글 돌아가던지 멀미가 다 나려고 할 때쯤.
“어?”
허공을 아무렇게나 휘적거리던 팔이 부드러운 손길에 붙들렸다. 그것을 미처 깨닫기도 전, 다리와 옷자락 사이에 이리저리 치이던 몸이 옆으로 쑤욱 빠져나갔다.
‘어…… 얼라리요.’
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되레 얼떨떨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 사람의 홍수로부터 날 구해 준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부터 하려고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감사합…….”
그러나 직후, 시야에 들어온 광경으로 인해 내뱉으려던 말과 생각이 모두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가면?’
머리가 새하얘졌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만큼 지금 눈앞에 선 이의 분위기는, 신비했으니까.
섬세한 금색 문양이 새겨진, 얼굴을 반쯤 가리는 가면 위로 흰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보랏빛 눈이 가면 사이로 언뜻 반짝였다.
“쉿.”
새하얀 달을 등진 소년이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내게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훗날 돌이켜 보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라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