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감동이나 애잔함은 다 파괴되어 버렸지만, 결과적으로는 웃는 얼굴로 레일라를 배웅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아직은 주먹을 쥐어야만 힘이라고 할 만한 것을 끌어낼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레일라의 몸체에 동그란 주먹 자국을 남겨야 했지만…….
‘……나 이러다가 평생 때리는 게 아니면 능력 못 쓰는 거 아냐?’
좀 더 자라면, 힘을 다루는 게 익숙해지면 주먹 안 쥐어도 되겠지? 그렇겠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도 성불시키는 건 성공했다.
레일라는 웃는 얼굴로 떠났고, 나는 그녀가 본래의 세계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짧게 기도했다.
하지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하루가 지나자 알게 모르게 레일라의 빈자리가 느껴져 다시 서글퍼졌다.
후원에서 검댕이에게 기댄 채 멍하니 햇빛을 쐬다가, 조심스레 셀레나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저어, 셀레나.”
<응? 왜?>
“셀레나도 언젠간…… 떠날 거죠?”
엄마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가까운 사람을 영영 떠나보내서 그런가. 자꾸만 울적함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 게 셀레나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뒤늦게 내 발언을 후회하며 셀레나의 눈치를 보는데, 그녀가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령답게 차가운 손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은 더없이 따듯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난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떠나야 하지 않겠어?>
“힝, 언제요……?”
<글쎄, 너랑 메리가 결혼하면?>
“그럼 평생 결혼 안 할래…….”
<그건 좀. 네가 그렇게 말하면 누가 엄청 슬퍼할걸.>
으잉? 저게 뭔 소리람.
셀레나에게 한껏 어리광을 부리던 중이었는데,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말이 들려왔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관심이 그쪽에 쏠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누가요?”
<글쎄, 누굴까.>
하지만 셀레나는 곧장 딴청을 피우며 답을 회피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붙들고 답을 캐물으려 했는데, 하필 미나가 다가오는 바람에 또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아가씨. 베스 님이 내일 입고 나갈 옷을 가져오셨대요.」
“지금 갈게요!”
그래도 한껏 어리광을 부린 덕분인지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슬픔이 물러간 자리를 채운 것은 기대감이었다.
드디어 내일, 친구들이랑 건국제에 간다!
* * *
에버딘 저택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후로는 새벽같이 먹을 걸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져 늦게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놀러 가는 날이라서 그런가?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일찍부터 눈이 반짝 떠졌다.
오늘은 건국제 날!
“좋은 아침이에요!”
「어머, 일찍 일어나셨네요.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데미트와 오델리아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헤헤, 고맙습니다. 미나도 축복 많이 받길!”
크렘위든 제국의 건국 기념일은 가을의 한중간이고, 데미트는 가을과 추수의 신이다.
그래서 보통 건국 기념일에는 ‘데미트의 축복이 있길’ 하고 인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은 제국 내에서도 싸늘한 기후가 두드러지는 에버딘이었다.
동토 바로 옆에 자리한 탓에, 겨울이 깊어지면 가끔 얼어 죽는 사람도 나온다고.
그런저런 이유로, 에버딘 영지에서는 데미트보다는 겨울의 신 오델리아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오늘은 건국 기념일이니까 데미트도 잊지 않고 언급하는 것이다.
미나에 이어 다른 사용인들, 공작과도 건국 기념 인사를 주고받은 후 아침을 먹었다. 이후에는 베스와 함께 외출 준비를 했다.
베스가 건국제를 위해 만들어 준 옷은 활동성이 두드러지는 디자인이었다. 장식이 없는, 몸에서 살짝 떨어지는 품의 블라우스와 가벼운 스커트가 굉장히 편했다.
미나는 베스가 옷을 입혀 주는 내내 심각한 고민에 잠겨 있더니, 결국 결연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나누어 땋아 주었다.
“좋습니다. 완벽해요.”
「아, 베스 님. 그러고 보니 아가씨의 겨울옷을 좀 더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가능하실까요?」
“공녀님의 의뢰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어떤 것들을 원하십니까?”
「우선 외투랑…….」
두 사람이 진지하게 겨울옷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슬쩍 빠져나와 협탁에 앉은 릭에게 다가갔다. 반들반들한 화병에 얼굴을 비춰 보는 척하며 슬쩍 말을 걸었다.
“진짜 안 나갈 거야? 이번에 안 가면 내년에야 갈 수 있을 텐데.”
<말했잖습니까. 건국 기념일이니만큼 어마어마하게 혼잡할 텐데, 당신이 저를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리는 게 더 위험하고 섭섭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혼자서 심심할 텐데.”
<검댕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으응.”
검댕이랑 같이 있으면 축축해지기 십상이라고 싫어하지 않았나. 뭔가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처럼 찜찜한데.
하지만 본인이 한사코 괜찮다는데 내가 더 말을 얹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 결국엔 물러났다. 확실히, 인파에 떨어지기라도 해 곰 인형이 손상되면 릭에게까지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는 편이 좋겠지.
「아가씨. 저택 앞에 영식, 영애들께서 정문 앞에 도착하셨대요.」
“앗, 지금 가요! 다녀올게, 릭. 검댕이랑 잘 놀고 있어!”
그때 미나가 친구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목소리를 높여 대답한 뒤, 릭을 한번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네고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 아래서 기다리던 공작의 손을 잡고 제르비스, 칼리오스와 함께 정문으로 나가자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앗. 안녕하세요, 공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멀린과 리벨, 하리엔이 공작을 발견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공작은 그들에게 화답하듯 손을 한번 흔들어 주더니 불쑥 말했다.
「디프린 자작 영애, 헤지우드 자작 영애. 잠깐 이쪽으로.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이요……?”
리벨과 하리엔은 놀란 얼굴로 나와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를 따라 저만치 멀어졌다.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공작을 따라갔던 두 사람은 잠시 후 까르르 웃으며 돌아왔다.
‘무슨 얘기를 한 거지?’
궁금한데 물어 봤자 안 가르쳐 주겠지? 아니었으면 애초에 저 둘만 따로 데리고 가서 얘기하지도 않았을 테니.
‘뭐, 나쁜 일을 시킬 사람은 아니니까.’
발레리안 에버딘이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금세 궁금증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떠나기 전, 그가 다정하게 미소 띤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다녀오렴, 테리. 기사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호위할 테지만 혹시 모르니 항상 주위를 경계해야 한다.」
“네! 다녀올게요!”
「그래, 저녁에 보자.」
공작과 인사를 나눈 후, 친구들과 함께 에버딘 중심가로 향했다.
분명 베스의 의상실이나 엠앤제이 서점을 오갈 때마다 지나다녔던 거리인데, 오늘은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우와…….”
중심가의 전경을 눈에 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지며 감탄이 흘러나왔다.
“참가비는 한 게임에 10코퍼지만, 상품은 1골드! 지금 바로 일확천금에 도전해 보세요!”
“남부에서 들여온 특별한 향신료를 맛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먹기만 하면 몸에서 열이 후끈후끈! 추위를 이겨 내기엔 딱이랍니다!”
“연극! 연극 보세요! 1년에 단 하루, 오늘만 3할 인하된 가격으로 모십니다!”
멀린이 말했던 대로였다. 길을 따라 온갖 노점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고, 머리 위에서는 색색의 삼각형 깃발이 펄럭였다.
난생처음으로 마주하는 열띤 활기에 저절로 마음이 들떴다. 어디부터 갈까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는데, 제르비스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테리, 우리 손 잡자. 혹시라도 길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
“아, 그럴까?”
좋은 생각 같아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칼리오스도 손을 내밀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겠지. 내 손도 잡아.”
쟤네가 웬일로 마음이 맞는담.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두 사람의 손을 맞잡으려던 찰나. 리벨과 하리엔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더니 나를 뒤로 휙 끌어당겼다.
‘오, 오잉.’
깜짝이야. 놀라서 눈을 끔벅이는데,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도 나 못지않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리벨과 하리엔은 팔짱을 낀 팔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며 나란히 웃었다.
“손잡는 것보다는 팔짱이 더 안전하니까. 그렇지, 테리?”
“얼른 가자. 다 돌아보려면 오늘 하루를 꼬박 걸어 다녀도 부족해.”
너희 힘이 참 세구나……. 그보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왜 미묘하게 단호해 보이지? 착각인가?
뭔가 수상했으나 말만큼은 타당했기에, 나는 더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선선히 발을 떼었다.
리벨과 하리엔이 어쩐지 분한 기색의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를 힐끔거리며 쿡쿡 웃었다.
“원래는 지켜보는 쪽이 더 재밌지만, 오늘은 공작님한테 부탁받았으니까.”
“맞아, 맞아.”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이 신경 쓰였지만,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화려해 금세 잊었다.
등 뒤에서 멀린이 “얘들아, 이런 거지 같은 분위기 속에 나만 남겨 두고 가지 마……!” 하고 외치는 것도 같았지만, 으음. 착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