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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64) (64/124)

<64화>

뜻밖의 반응에 당황해서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도 뭔가 대단히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진짜 뭐지? 하필 미나는 물을 더 가져오겠다고 자리를 비워서 물어볼 수도 없고.

나 친구들이랑 놀러 가기로 했다고 말한 것밖에 없는데……?

“……그.”

한참의 침묵 끝에, 공작이 머뭇머뭇 입을 떼는 순간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민망한 얼굴로 황급히 목을 가다듬더니 다소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구나. 알았다.」

“어…… 네에.”

「눈에 띄지 않게 호위들을 붙여 줄 테니 조심히 다녀오렴.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재밌게, 잘…….」

글의 내용만 보면 더없이 상냥하고 다정한 어른인데, 공작의 얼굴은 꼭 버림받은 검댕이 같았다.

이럴 땐 내가 공작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붉게 달아오른 그의 눈가를 보자 퍼뜩 직감이 스쳐 갔다.

‘뭐, 뭔진 모르겠는데 삐졌다.’

확실하다. 저건 분명 토미가 나한테 뭔가 서운할 때 보이던 반응이다……!

공작이 뭔가에 마음이 상한 건 확실한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던 차였다.

“크흠.”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한 세바스찬이 종이를 꺼내어 빠르게 글씨를 휘갈겨 썼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저, 아가씨. 그러면 혹시 그날 밤늦게까지 친구분들과 계실 생각이십니까?」

“아마 아니지 않을까요……? 다들 저녁 먹으면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말에, 세바스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가 평소와 달리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속도로 글을 써 내렸다.

「사실 건국제의 진정한 볼거리는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연극도 있고, 밤에만 판매하는 음식들도 많지요. 호수에서 배를 빌려 탈 수도 있고요.」

“헉. 정말요?”

「그렇지요? 하지만 아무리 호위가 있다고 한들, 그렇게 늦은 시각까지 아가씨를 바깥에 홀로 둘 수는 없으니…… 주인님께서 같이 가 주시면 어떻습니까?」

세바스찬이 공작을 힐끔거리며 종이를 열심히 흔들었다. 그게 꼭 릭을 안 넘겨줬다고 상심한 검댕이를 달래는 내 모습같이 보인다면 착각일까?

저 눈빛, 행동, 분위기…….

‘헛.’

설마!

그 순간 한 가지 가정이 벼락처럼 머릿속에 내리꽂혔다.

‘나한테…… 놀러 가자고 하려고 했던 건가?’

그런데 내가 나갔다 오더니 다른 사람이랑 놀러 가겠다고 해서 물에 설탕을 빠트린 당나귀 처지가 된 거고……?

‘오, 오메.’

물론 약속이라는 게, 먼저 말한 사람이 우선되는 게 맞긴…… 한데.

최근 온기가 필요하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쓸 때마다 공작이 착실히 곁을 지켜 줘서일까. 그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마음 한구석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콕콕 쑤셨다.

결국 세바스찬과 함께 열심히 공작을 달래기 시작했다.

“세바스찬 말이 맞아요! 아무리 기사들이 지켜 준다고 해도, 저녁에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겠죠?”

「맞습니다, 아가씨. 어쩜 이리 똑똑하신지!」

“그러니까 혹시, 공작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랑 축제에 가지 않으실래요? 친구들이랑 저녁 먹고 헤어진 뒤에 만나서 연극도 보고, 배도 타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정말 멋진 생각이로군요!」

“와아!”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극적인 능력을 보여 준다던가. 미리 말을 맞춘 것이 아님에도 세바스찬은 딱 맞는 타이밍에 적절히 호응을 던져 주었다.

고마워요, 세바스찬! 당신은 역시 최고의 집사……!

다행히 우리의 눈물겨운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시무룩하게 떨궈져 있던 공작의 고개가 슬금슬금 올라오더니 제자리를 찾았으니까.

“흠.”

공작은 점잖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듯 자꾸만 헛기침했지만, 들뜬 기색은 감출 수 없었나 보다. 그가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로 친절히 물어왔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건 그렇고, 고기는 이 정도 크기여도 괜찮니? 더 작게도 자를 수 있는데…….」

“거기서 더 작게 썰면 그냥 다지는 거 아니에요……?”

* * *

한편, 테레지아가 시무룩한 발레리안을 열심히 달래던 그 시각. 테레지아의 방.

“…….”

주인이 자리를 비운 방은 어둑하기만 했다. 거기에 창틀에는 섬뜩한 생김새의 곰 인형까지 앉아 있어 한층 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곰 인형, 릭은 창틀에 앉은 채 조용히 밖을 내다보았다. 아마 그가 사람이었다면 무척이나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될 만큼 우울한 기색이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셀레나가 스르륵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자루 같은 형태가 된 레일라도 슬그머니 릭의 옆자리로 향했다.

<야…… 괜찮아?>

<요즘 정말 왜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평소라면 테리를 따라서 식당으로 갔을 텐데 방에 남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두 사람은 평소답지 않은 릭의 모습에 조심조심 말을 붙였다. 그러나 릭이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가 보세요.>

<혹시 테리가 네 마음을 몰라 주는 게 속상해서 그래?>

<…….>

셀레나가 던진 물음에 릭이 멈칫 굳어졌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속내와 달리 밤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릭의 입에서 끝내 자조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럴 자격이나 있으면 다행이죠.>

질투도 동등한 ‘인간’일 때나 성립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릭은 인간이 아니었고,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큰 유령이었다.

테레지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홀로 어딘가를 나다닐 수조차 없는, 힘없는 유령.

‘……나는 당신에게 짐이 아니라 도움이 되고 싶은데.’

테레지아에게 인간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이러한 무력감과 자괴감은 끊임없이, 조금씩 릭을 갉아먹고 있었다.

릭은 테레지아에게 안겨 있는 대신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떨어트리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것보다, 자신이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테레지아의 친구가 늘어날수록, 그녀가 자랄수록. 릭이 따라갈 수 있는 곳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지금이야 테레지아가 어리니 자신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식으로 이런저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남은 지식을 부여안고 있는 것이 전부인 그와 달리 그녀는 점차 제 세계를 넓혀갈 것이다.

릭이 유령인 이상, 그는 결코 테레지아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지 못한다.

그 사실이 요즘따라 사무치게 아팠다. 아마 그녀와 함께하고픈 마음이 커질수록, 아픔도 함께 자라나겠지.

‘추해지지는 말자.’

릭은 시큰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이 열등감과 자괴감은 결국 그가 온전히 떠안고 가야 할 문제였다. 그는 제 자괴감에 휩쓸려 테레지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짐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건국제 때도 방에 남아 있을 겁니다.>

만약 릭이 따라간다면, 테레지아는 그를 신경 쓰느라 맘 편히 축제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팔과 손은 그를 붙잡기 위해 묶일 테고, 행여 잃어버리거나 떨어트리지는 않을까 항상 신경을 기울여야 하겠지.

릭은 제 욕심을 채우고자 테레지아의 행복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온전히 웃지 못하는 테레지아의 모습을 보는 게 더 괴로울 테니까.

그건 차마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마음이었던지라, 셀레나와 레일라는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 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부생, 부생, 부생…… 응?>

하지만 남들이 심각하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유령도 있었다.

광인처럼 음이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빈 술병을 손에 쥐고 휘적휘적 방을 가로지르던 거지 유령이 멈칫했다.

<…….>

노래를 그친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등을 보인 채 창틀에 앉아 있는 곰 인형을 응시했다. 한순간 반투명한 푸른 눈에 안광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거지 유령은 빈 술병을 입술에 대고 기울이더니 다시 술에 취한 듯 흥청망청 걸어 방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 * *

얼마 후. 마침내 레일라를 떠나보내야 하는 밤이 찾아왔다.

“……그리울 거예요, 레일라.”

우이씨. 최대한 슬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어른스럽고 침착하게 배웅하려 했는데!

입술을 앙다물고 애써 눈물을 참고 있자니 레일라가 그 마음 다 안다는 듯 웃었다.

<이 모습이 된 거에 대해 별생각 없었는데. 손이 없어서 못 쓰다듬어 주는 게 좀 아쉽네.>

“그렇게, 흡, 아무렇지 않, 흑,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아이고, 지금 울면 아침에 눈 다 부을 텐데. 그동안 다들 고마웠어. 덕분에 미련 하나 없이 상쾌하게 간다!>

레일라는 결국 눈물이 터져 버린 날 달래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내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유령들이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조심히 가십시오.>

<재밌었어!>

<내키면 또 놀러 와!>

<멍청아, 죽은 자의 땅으로 가는 놈이 어떻게 돌아와? 뒤질 때 뇌 빼고 뒤졌냐?>

<너무해! 잔인해! 너무해!>

“……크흥.”

분명 슬펐는데 유령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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