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러네.’
본래 그럴 의도로 행동한 게 아니었던지라 양심이 조금, 아주 조금 찔리지만…….
하리엔이 다치지 않길 바랐던 것도 분명 진심이고, 이제부터는 진짜 친구가 되면 되는 거지. 그, 그렇겠지?
어쨌든, 마음이 맞는 또래가 늘어났다니 괜히 마음이 충만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친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건가.
아무튼 인맥도, 친구도 다 얻었다! 이런 걸 두고 토미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고 하던데.
‘기다려, 엄마!’
기쁜 마음에 콧바람이 절로 났다.
오블렌 자작이 날 쫓아냈다며 희희낙락할 동안, 나는 매일매일 자작령의 땅문서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지막에 웃는 게 누구인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안다, 이거야!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매달고 후후 웃는 틈을 타 칼리오스가 내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그의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큼. 그럼 나도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 공녀?”
“안 돼요.”
웃음을 그치고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칼리오스가 짐짓 상처받은 듯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울상을 지었다.
“……왜 아메트리스 후작 영식은 되고, 나는 안 되는데?”
“그야 당연히, 저랑 제리는 동등하게 말을 놓고 지낼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황태자 전하의 이름을 동네 친구처럼 막, 함부로 부를 수가 있겠어요.”
<요컨대 황태자 이름을 동네 친구처럼 막, 함부로 부르고 싶다는 말이네요.>
조용히 해, 이 눈치 좋은 자식아. 보이지 않게 손을 내려 릭의 귀를 쭉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난감한 표정을 유지했다.
‘동등한 친구가 되면 나중에 황제가 이상한 짓을 저질렀을 때 장난식으로라도 짜증 한 번은 낼 수 있겠지.’
거의 다 넘어왔다. 너는 나한테 넘어온다, 넘어올 것이다…….
속으로 열심히 주문을 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찰나 망설이던 칼리오스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공녀도 나를 ‘카오’라고 불러도 좋아. 말도 편하게 해.”
“그래, 카오!”
아싸! 이제 모르는 척 황태자한테 대들어도 한 번은 빠져나갈 구실이 생겼다!
신나서 냉큼 공대를 그만두자 칼리오스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뭔가 굉장히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데.”
“에이, 착각이야. 설마…… 친구를 의심하는 거야?”
“그, 그럴 리가 있나.”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이자 칼리오스가 움찔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후후, 황태자를 마구 놀려먹을 수 있다니 이거 참 짜릿한데?
아무튼 테이블 주위의 분위기는 이 이상 풀어질 수 없을 정도로 훈훈해졌다. 모두가 들뜬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멀린이 불쑥 손을 들어 올리며 제안했다.
“아, 그러면 건국 기념일에 다 같이 만나서 놀지 않을래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뭐야? 웬일로 좋은 아이디어를 다 냈네.”
“너무 좋다!”
리벨과 하리엔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벌써 9월의 초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건국제가 벌써 코앞이구나.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네.’
건국 기념일에는 제국 전역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사방을 크렘위든의 문양이 새겨진 삼각형의 깃발로 장식하고, 거리를 따라 노점들이 빼곡히 들이찬다며 멀린이 신나서 설명을 이었다.
“여럿이 한 팀을 이뤄야만 참가가 가능한 게임도 있으니까, 다 함께 참석하면 더 재밌을 거예요.”
“난 좋아.”
“나도!”
“테리가 가면, 나도.”
리벨과 하리엔이 긍정하고, 제르비스는 나를 슬쩍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제르비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멀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웃는 얼굴임에도 칼리오스는 홀로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그가 머들러를 휘휘 저으며 입을 삐죽였다.
“나도 함께 건국제에 참석할 수 없다면 기쁘겠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건국 기념일이 오지 않았으면 싶기도 해.”
“왜?”
“그야, 나는 건국제가 끝나면 수도로 돌아가야 하니까. 처음부터 건국제 때까지만 에버딘령에 머물기로 하고 내려왔던 거야.”
“아.”
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하긴, 칼리오스가 저래 보여도 이 나라의 황태자다.
애초에 황제가 칼리오스를 보낸 건 에버딘을 압박하기 위함이었고, 표면적으로나마 감시는 끝났으니 그도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긴 했다.
나른히 눈을 깜박인 제르비스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어쩐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거 잘된 일이네요. 하루라도 빨리 건국 기념일이 되었으면.”
“영식,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지?”
“그조차 이해 못 하실 만큼 아둔한 분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지금 말 다 했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잘 지내고 있던 칼리오스와 제르비스가 또다시 아웅다웅했다.
나는 끌끌 혀를 찼다. 둘이 성격이 은근히 비슷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상극인 것 같단 말이지. 동족 혐오인가?
“테리, 저 둘은 왜 저래? 제리가 누구한테 저렇게까지 비아냥거리는 건 또 처음 보네.”
“그을쎄…….”
멀린 역시 희한한 눈으로 칼리오스와 제르비스를 바라보며 내게 속삭였다. 그런데 나도 모른단다…….
멀린과 내가 나란히 칼리오스와 제르비스를 구경하는데, 옆에서 리벨과 하리엔이 나란히 키득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나는 알 것 같은데.”
“역시 그렇지?”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붙인 채 보란 듯 나를 힐끔거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얼굴을 보니 알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
뭐, 저 둘의 생각이 맞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그냥 못 들은 척해야지.
내가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리벨과 하리엔이 에이, 하며 웃는 걸 그만두고 곁으로 다가왔다. 리벨이 문득 내 품에 안긴 릭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인형은 계속 들고 다니네. 혹시 애착 곰 인형이야?”
“음, 뭐. 일단은?”
에버딘 저택에 온 후에야 만난 거긴 하지만, 어찌 보면 애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리벨이 본격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내며 가까이 얼굴을 숙였다.
“한번 안아 봐도 돼? 뭔가 신기하게 생겼다.”
“나도.”
“어…….”
리벨이 먼저 나서자 하리엔도 수줍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눈을 깜박이다가 슬그머니 흰 정수리로 시선을 내렸다.
‘미나가 빨래하는 것도 안 좋아했지? 검댕이가 핥는 것도 싫어하고.’
아무래도 릭은 다른 사람 손이 닿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미안함을 담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말한 대로 애착 곰 인형이라서. 얘는 아주 섬세하고 까탈스러워서 다른 사람 손을 타는 걸 별로 안 좋아해. 미안.”
“그렇구나……. 뭘 그런 걸로 미안하다고 그래. 괜찮아.”
“진짜 아끼는 인형인가 보네. 사이 좋다.”
다행히 하리엔과 리벨도 가볍게 물어본 것이었는지 순순히 손을 거두어 주었다. 릭을 지켜 냈다는 사실에 왠지 뿌듯해져서 의기양양하게 속삭였다.
“어때. 나 잘했지?”
<…….>
“릭?”
얘가 왜 대답이 없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몇 번 더 불러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저기요, 여보세요. 거기 유령 없나요?”
<……아.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결국 손을 움직여 인형의 정수리를 똑똑 두드리고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단순히 내 부름을 못 들은 것도 아니고, 조금 전에 다른 사람들이 저를 만지려 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야. 무슨 생각을 하길래 좀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을 못 해?”
<그냥, 별일 아닙니다. 그보다 왜 불렀는데요?>
“내가 조금 전에 너의 순결을 지켜 줬단다, 곰돌아.”
<거짓말이죠?>
“……너무 당연하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너 내가 그렇게 못 미덥니?”
<음, 아무래도…….>
“진짜 혼난다.”
<잠깐! 잘못했습니다!>
얄밉게 구는 게 괘씸해서 등을 슬쩍 떠밀자 릭이 다급히 항복을 외쳤다. 그러게, 흙바닥 구르기 싫으면 시비를 걸지 말았어야지.
‘그나저나 요즘따라 자주 저러네.’
착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최근의 릭은 곧잘 상념에 빠져 불러도 모르곤 했다.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내가 웬일로 먼저 나서서 자기를 지켜 주냐며 아닌 척 좋아했을 텐데.
‘고민이라도 있나.’
4살짜리 유령이 할 법한 고민이라…….
‘……음.’
미안하다, 릭!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너라면 혼자서도 잘 이겨 낼 수 있을 거란다. 난 널 믿어! 절대 내가 이유를 몰라서가 아니야!
* * *
그날 저녁.
나는 에버딘 저택으로 돌아와, 공작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에 약속이 생겼음을 알렸다.
“저 건국 기념일 날 친구들이랑 축제 가기로 했어요!”
챙그랑.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공작이 쥐고 있던 나이프가 접시 위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내가 먹을 고기를 썰어 주다가 말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금빛 눈은 부릅떠진 채였고 얼굴이 창백했다.
……어, 어라. 반응이 왜 저러지?
‘꼭 나한테 두 번째 파트너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