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발레리안은 행여 테레지아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며, 머리와 몸의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후에야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가 어색함을 누르며 자리를 잡자, 테레지아가 꾸물꾸물 그의 옆자리로 다가와 누웠다.
발레리안은 몸을 옆으로 돌려 아이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올려 덮어 주었다. 그리고 어설픈 손짓으로 토닥여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 주면 되니?」
“결혼 생각은 없으셨다면서, 어째 이런 건 또 익숙해 보이시네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이렇게 재워 주셨거든.」
테레지아의 물음에 조곤조곤 답을 해 주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에,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누가 뭐라 해도, 네가 내 아들이길 바란다면 넌 내 아들이다. 그걸 잊지 마라.’
한없이 강인하고 다정했던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유일하게 아꼈던 것이 에버딘이었다.
그렇기에 발레리안은 현 황제의 견제를 묵묵히 감내해서라도 에버딘을 지키고 싶었다. 어차피 그 덕에 운 좋게 이은 목숨이었으니, 그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아이 덕에, 무작정 참고 감내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한없이 고마워서, 발레리안은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를 다독였다.
일정한 토닥임에 서서히 졸음이 몰려오는지, 테레지아는 시선을 천장에 둔 채 잠긴 목소리를 냈다.
“저는 자작…… 님이 아니라 엄마가 재워 줬어요.”
테레지아는 습관적으로 ‘님’ 자를 떼고 말하려다가 뒤늦게 덧붙였다. 발레리안은 그것을 눈치챘으나 여상히 답했다.
「……그래?」
“네에……. 맨날 바쁘다고, 저녁 먹고 나면 밖으로 나갔거든요. 그래서 엄마랑 둘이서만 잤어요.”
졸음에 반쯤 취한 탓인지, 테레지아는 평소라면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았다.
발레리안은 순간적으로 이불을 찢을 듯 움켜쥐려다가 급하게 손에 힘을 풀었다. 대신 이를 악물었다.
‘밤마다 정부와 그 아이를 만나러 나갔나 보군.’
처음 테레지아를 마주했을 때부터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 이후 조사를 통해 오블렌 자작가의 실상을 알게 되었을 때.
발레리안은 오블렌 자작의 목을 꺾고 싶은 만큼이나 저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어쨌거나 에버딘을 지키고자 하는 이기심으로, 아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자작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것이 맞으니까.
‘그때로 돌아가면…….’
아니,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테레지아를 더 일찍 그 집에서 빼 왔을 것이다. 그딴 작자들이 있는 곳에 아이를 일분일초라도 더 놔두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지만.’
발레리안은 씁쓸히 자조했다. 아이가 이쪽을 쳐다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테리가 지금 그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가 감추고 있는 것들을 다 눈치채고 말 테니까.
이후로도 테레지아는 잠기운이 그득한 목소리로 친모에 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저희 엄마 진짜 예뻐요. 공작님보다는 아니어도, 공작님만큼은 예뻐요.”
“가끔은 저 재워 주다가 먼저 잠들기도 했어요. 그 바람에 팔에 깔려서 낑낑대기도 했고…….”
“……옆에 누구 있으니까 따듯하다.”
테레지아는 결국 자그마한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눈을 감았다.
발레리안은 아이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숨소리를 죽이며 가만히 잠든 얼굴을 지켜봤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나 보군.’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던가.
테레지아를 보고 있자면, 발레리안은 이따금 친모인 이피아 오블렌이 궁금해졌다. 그녀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살아 있었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하긴.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이 아이를 만날 기회도 애초에 없었으려나.’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발레리안은 작게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웅…….”
그때 테레지아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려 콧구멍을 가렸다.
“으으.”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머리카락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거슬리는지, 테레지아는 잠결에 미간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발레리안은 웃음을 꾹 참으며 조심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얼굴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자 한껏 일그러져 있던 아이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졌다.
그 작은 변화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온통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먼저 온기가 필요하다고 청한 것은 테레지아였음에도, 정작 자신이 아이의 따스함을 한껏 나눠 받는 기분이었다.
발레리안은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담은 시선으로 테레지아를 지켜보다가 불현듯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쯤 말해 주려나.”
금빛 시선이 잠든 아이의 어깨 너머, 협탁 위에 앉은 곰 인형에게 찰나 머물렀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어들인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내가 부모로서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아직은.’
테레지아가 마음 놓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환경을, 상황을 만드는 것은 보호자인 그의 몫이었다.
발레리안은 다시금 온 힘을 다해 아이를 지켜 내겠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겼다.
‘부디…….’
내게 내려졌다는 저주가 이 아이 하나만큼은 비껴가기를.
작게 기원한 발레리안은 테레지아의 머리카락을 깔끔히 정돈해 주고 손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이가 그의 손을 답삭 붙잡는 것이 먼저였다.
“……테리?”
혹여 깼나 싶어 자그맣게 불러 보았으나 테레지아는 도로롱, 하는 코골이로 답했다.
원래도 두 사람의 힘은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테레지아가 잠들어 있기까지.
몸을 슬쩍 뒤척이기만 해도 뿌리칠 수 있었지만, 발레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흘러드는 여린 온기가, 긴 세월 전쟁터를 전전하며 잃었던 것들을 하나둘 되살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걸 소중히 여기는 마음, 사소한 것들에서 느끼는 기쁨, 규칙적인 숨소리가 주는 안정감 같은 것들.
항상 날이 서 있던 발레리안의 속내를, 테레지아의 손에서 흘러드는 몽글몽글한 온기가 부드럽게 감쌌다. ‘나른하다’라는 생각이 드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딜리안 모르티에.」
곰 인형의 발치에 놓인 목걸이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이 달빛에 찰나 반짝였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도 미약해서, 깊은 잠에 빠진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다.
* * *
라이넬 남작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하리엔은 멀린과 리벨에게 그간 그들을 피해 다녔던 이유를 설명하고 사과하고 싶다며 다과회를 주최했다. 나, 제르비스, 그리고 조금 의외지만 칼리오스도 초대받았다.
“……그렇게 됐던 거야. 너희에게는 정말 미안해.”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하리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녀는 멀린, 그리고 리벨을 무작정 피해 다니며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에 적잖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나 멀린과 리벨은 똑똑하고 좋은 친구들이었다. 멀린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왜 네가 사과를 해? 사과해야 할 건 네 숙부라고!”
“맞아. 하리, 우리한테 미안해하지 마. 오히려 내가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너를 다그치기나 하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리벨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리엔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그러자 멀린도 후다닥 달려와 하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따듯한 반응에 하리엔의 눈에 눈물이 핑 고이는 건 당연지사였다.
‘짜식들…….’
아주 귀엽군…….
그 흐뭇한 광경을 구경하다 보니 절로 마음이 훈훈해져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쓱 훑었다.
릭도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은근슬쩍 나를 따라 했다. ……참나.
그렇게 한바탕 사과가 난무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간신히 울음을 그친 하리엔이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공녀님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진심이에요.”
“아이, 제가 뭘요. 라이넬 남작을 체포한 건 공작님이신데…… 헤헤.”
아, 이거 참. 칭찬을 들으니 몸이 꼬이는구먼. 부끄러웠지만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헤벌쭉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테리, 그러다가 입 찢어지겠습니다.>
……거, 얘가 또 분위기 좋을 때 초를 치네. 릭을 힐끔 흘겨보고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리엔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공녀님 말고 ‘테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그 호칭은 너무 딱딱하잖아요, 저희 사이에.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어머…… 그럼 저도 편하게 하리라고 불러 주세요, 테리.”
“어! 그럼 나도! 나도 멀린이라고 불러!”
“저도 리벨이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리엔의 친구는 제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하리엔에 이어 멀린, 리벨이 앞다투어 이름을 허락했다. 조금 당황스러워 눈을 깜박이고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대외적으로 친해 보이려면 그편이 더 좋지 않나 싶어서 말을 꺼낸 것뿐인데.’
나와 달리 저렇게 순수하게 친구가 생겼다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어디 있을지 모를 양심이 욱신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헉, 설마 나…… 쓰레기?!
“테리, 턱.”
“핫.”
제르비스의 말을 듣고서 쇄골 근처까지 떨어졌던 턱을 황급히 닫았다.
내 표정을 보고 테이블 위의 허공에서 깔깔 웃던 셀레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 보이자 그녀가 슬그머니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나를 보며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제르비스 말고도 친구가 생겼네, 테리!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