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 *
“저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전부 이자들이 시켜서 그런 겁니다!”
공작의 손에 의해 에버딘 저택까지 끌려온 라이넬 남작은 필사적으로 제 무죄를 주장했으나 소용없었다.
전날 내 편지를 받은 하리엔이 자작 부부와 함께, 사용인들이 숨겨진 금화를 파내는 현장을 덮친 후였으니까.
“나, 남작님께서 거절하면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주인님!”
현장에서 잡힌 탓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사용인들은 사색이 되어 빌었고, 그들이 지닌 금화에 모두 같은 일련번호가 찍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금화에 찍힌 일련번호가 같다는 건 전부 한 사람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돈을 찾았다는 뜻이니까. 은행에 일련번호 조회를 의뢰하면 돈을 찾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는 뜻!
‘텄네요, 텄어. 이중으로 꼬리 자르기를 했을 줄이야.’
하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안타깝게도 배후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은행에서 돈을 찾은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니 그는 수도의 한 평민이었다.
그는 어느 날 길을 거닐던 중, 얼굴을 모르는 이에게 부탁을 받고 그자가 가진 보석을 은행에 가져가 금화로 바꿔 주었다고 했다.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보석을 한 움큼 받았고, 그 뒤로 다시 만난 일은 없었다고.
‘그,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어서……. 저랑 신장이 비슷한 남자였다는 것 정도밖에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에 엮일 줄 알았다면 부탁도 안 들어줬죠!’
공작은 그에게서 단서를 얻는 것을 포기하고 복면인들을 추궁했으나, 그들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배후는 찾지 못했으나, 라이넬 남작의 죄는 밝혀졌다. 그는 외부 세력까지 끌어들여 하리엔을 위협하고 자작가를 삼키려 한 죄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헤지우드 영애.”
남작의 사형이 결정되기 며칠 전, 하리엔과 헤지우드 자작 부부가 에버딘 저택에 다녀갔다.
자작 부부는 믿었던 남작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가문을 삼키려 했다는 소식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빤히 놓인 증거를 두고도 남작을 감싸려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공작과의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슬그머니 하리엔을 불렀다.
“아, 공녀님.”
내 부름을 들은 하리엔이 반색했다. 그녀는 자작 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동시에 하리엔의 어깨 너머로 가까워지는, 반투명한 유령을 응시했다.
<어휴, 피곤하다. 역시 여기만큼 편안한 곳이 또 없다니까.>
내내 하리엔의 곁을 지키던 셀레나가 어깨를 돌리며 눈을 찡긋했다. 레일라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존재감 역시 조금은 희미해진 것이 느껴졌다.
속상하긴 했지만 슬퍼하기보다는 고마워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녀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등 뒤로 엄지를 치켜세워 준 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 제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네?”
“괜찮냐고 물어보시려던 거잖아요?”
어…… 어떻게 알았지. 나 또 얼굴에 할 말 다 써 놨니?
당황해 얼굴을 더듬거리는데, 하리엔이 빙긋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에 내려앉았다.
“전 정말 괜찮아요. 나쁜 건 속인 사람이잖아요. 그렇죠?”
“…….”
“그러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라이넬 남작이 나쁜 놈이었고,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걸 막으려면 필요한 일이었다지만.
자작 일가의 입장에서는 결국 내 고발로 인해 믿고 의지하던 이를 잃은 게 아닌가 싶어 조금 미안했다.
머리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막상 저렇듯 창백해진 이들의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편해서.
하지만 하리엔은 일전에 그녀가 스스로를 자책할 때 내가 건넸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녀는 조금 여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강인했다.
그걸 늦게나마 발견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맞닿은 손에서 흘러드는 온기가 심장 구석구석까지 데우는 느낌이었다.
웃음은 전염된다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내 입가에도 웃음이 피어났다.
그래, 별 쓸모도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보다는 하리엔과 자작 부부의 안전을 기뻐하는 게 백 배는 더 보람찬 일이겠지.
그런 생각으로 하리엔과 손을 맞잡은 채 헤헤 웃었다. 새삼 이 온기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 그리고 이거 말인데요.”
그때 하리엔이 손을 거두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뭔가 싶어 살펴보니 라이넬 남작이 그녀에게 건넸던 목걸이였다.
하리엔은 그것을 내게 건네주며 속삭였다.
“공작님께서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다며 돌려주셨지만…… 공녀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요.”
“크흐흠! 케헴!”
아, 아니, 이 사람아. 혹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위험천만한 발언을?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면 책임질 거야?! 잉?!
나는 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근처에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은 없었다.
하리엔도 그것을 미리 확인하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혹시 공녀님께서만 발견하실 수 있는, 공범의 흔적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받아 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정 뭔가 발견하지 못하시면 파셔도 괜찮아요. 이래 봬도 가격이 꽤 나갈…….”
“아유, 그렇게까지 부탁하시니 제가 또 어쩔 수 없네요.”
진작 그것부터 말씀하시지. 나는 행여 하리엔의 마음이 변할세라 냉큼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이미 <투명 신사 이야기> 관련 사업으로 적잖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내게 목걸이를 건넨 하리엔은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자작 부부에게로 뛰어갔다. 그들은 하리엔의 양손을 다정히 잡아 주었다.
“공녀님과 인사는 잘 나누고 왔을지 모르겠구나.”
“그나저나 하리 너,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면 재깍재깍 우리에게 말해야 한다. 또 혼자서 끙끙 앓다가는 아주 호되게 혼날…….”
“여보. 걱정을 하든지 혼을 내든지 둘 중 하나만 해요.”
“걱정만 해 주시면 안 돼요?”
“……하여간 누굴 닮았는지. 됐다, 집에 가자.”
그들은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심장 한구석이 휑하니 뚫린 듯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따듯했던 것 같은데.
<왜 그래요, 테리?>
“으응, 그냥.”
한 손을 심장께에 올리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릭이 의아함을 표했다. 이제는 작은 점이 되어 버린 자작 일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 보고 싶어서.”
왜인지, 오늘따라 엄마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 * *
“같이 자요!”
「……응?」
발레리안은 밤늦게까지 이번 일에 관련한 일들을 처리하다가 말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집무실 문을 뻥 차고 들어온 테레지아를 마주해야 했다.
그는 아이에게 문을 발로 막 차면 안 된다고 타이를까 고민하다가 이유를 먼저 묻기로 했다.
「테리, 혹시 무슨 일…….」
“같이 자요!”
“…….”
하지만 테레지아는 꿋꿋이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발레리안은 침묵 당했다.
‘뭐지?’
테레지아가 이렇게 이유도 없이 무작정 우기고 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저는 혼자서도 푹 잘 수 있어요! 어른이니까!’라고 말하고 다니던 아이가 아닌가.
그런 아이가 이렇듯 다짜고짜 같이 자자고 주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아하니 제 입으로 털어놓을 생각은 없어 보이고, 어쩐다.
발레리안이 고민에 잠긴 사이. 그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테레지아의 고개가 점차 베개 위로 가라앉았다.
베개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눈만 빼꼼히 내놓은 아이가 울 것처럼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오늘만 같이 자면 안 돼요……?”
“…….”
“너무 바쁘시면 저 잠들 때까지만 곁에 있어 주셔도 괜찮은데…….”
“…….”
“……으윽. 이 이상은 물러설 수 없어요!”
울먹이던 것은 연기였는지, 애원이 통하지 않는다 싶자 곧장 눈썹이 옹골찬 모양새로 기울었다.
발레리안은 결국 그 협박 아닌 협박에 굴복해 웃음을 꾹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네가 불편하지 않다면 같이 자자.」
“고맙습니다!”
대번에 신난 얼굴이 된 테레지아가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걸음을 떼었다. 발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서린 표정으로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집무실에서 일하다가 납치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발레리안은 우선 테레지아를 침대에 밀어 넣고 간단히 씻었다.
그가 가운을 걸친 채 욕실 바깥으로 나오자 침대에 앉아 있던 테레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감탄을 흘렸다.
“호…….”
「테리? 왜 그러니?」
“아. 새삼 왜 일찍 결혼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발레리안은 테레지아의 말이 의아했으나 선선히 답해 주었다.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기도 하고, 나를 마음에 뒀다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아닌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경쟁하다가 경쟁이 너무 심해서 다 나가떨어진 것 같은데…….”
테레지아가 심각하게 중얼거렸으나, 발레리안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터느라 미처 듣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