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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60) (60/124)

<60화>

“……라!”

어디선가 희미한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단검 끄트머리가 남작의 목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복면인이 당혹감을 드러내며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윽……!”

복면 위로 드러난 얼굴이 얼음장 같은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창백했다. 찰나 움직임을 멈췄던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에버딘 공작가의 기사들이 다시 그를 붙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와, 큰일 날 뻔했네.”

“독한 새끼들. 어우.”

기사들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복면인들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자결용 독약도 빼앗았다.

때마침 발레리안도 우두머리 격의 복면인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신음을 흘리는 복면인을 발로 차 기사들에게 떠넘기며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테리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었다. 그러나 발레리안 역시 전투로 인해 정신이 없었기에 쉽사리 확신하지 못했다.

“주군, 정리 끝났습니다!”

발레리안이 미심쩍은 눈길로 저편의 어둠을 응시하던 때 복면인들의 포박이 끝났다.

기사들의 외침을 들은 발레리안은 애써 자세를 바로 하고 검을 집어넣었다. 그가 가볍게 숨을 고르는 사이, 밧줄에 꽁꽁 묶여 한데 모이게 된 복면인들이 저들끼리 말싸움을 벌였다.

우두머리가 라이넬 남작을 죽이려 했던 복면인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왜 멈춘 거냐, 멍청한 놈! 죽였어야지!”

“제, 제 탓이 아닙니다!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들면서 소름이……!”

“저기요, 놀러 나오셨어요? 포로들 주제에 말이 많아, 말이.”

레딘이 웃는 얼굴로 비아냥거리며 그들을 걷어찼다. 그로써 복면인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은 발레리안의 미심쩍음은 한층 깊어졌다.

테레지아의 목소리. 그리고 에버딘 저택에서 이따금 느껴지곤 하던, 누군가 온몸에 찬물을 쏟아붓는 듯하던 감각.

이 모든 게 그저 우연일까?

결국 의구심을 거두지 못한 발레리안이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복면인들을 공 굴리듯 굴리려는 레딘을 제지하던 미하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군?”

“수습 정도는 맡겨도 되겠지. 자결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귀환해라. 먼저 갈 테니까.”

“왜 그렇게 급히…….”

미하일이 발레리안을 붙들려 했으나, 그가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발레리안이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발레리안은 문자 그대로 미친 듯 말을 몰아 에버딘 저택으로 돌아왔다. 세바스찬이 놀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주인님? 왜 혼자 돌아오십니까?”

“말이 쓰러지지 않게 돌보도록. 테레지아는?”

“예? 주무시고 계십니다만…….”

발레리안은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세바스찬에게 말고삐를 넘기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집사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세 개씩 뛰어올라 테레지아의 방으로 향했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자 테레지아의 방문이 보였다. 발레리안은 곧장 문고리를 쥐었다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

미처 몰랐는데, 흰 장갑에 피가 묻어 있었다. 황급히 시선을 내려 옷을 살피니 망토와 옷에서도 희미하게 피 냄새가 느껴졌다.

발레리안은 방문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망설였다.

‘……만약 테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나보다 먼저 도착할 방법은…… 없겠지.’

발레리안의 승마 실력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혔다. 그런 그가 바삐 말을 달려 돌아왔으니, 테리가 정말로 이 밤 중에 저택을 벗어났다면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결국 발레리안은 이 몰골로 아이의 방을 밟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피가 묻은 옷을 모조리 벗고, 찬물을 몇 번이나 뒤집어써 피 냄새를 지워 낸 후 다시 테레지아의 방을 찾아갔다.

끼익-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자, 희미하게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레리안은 굳어진 얼굴로 조심스레 방 안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직후.

“……하.”

한순간에 긴장이 턱 풀렸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허탈한 감정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가득한 방 안. 침대에서 자그마한,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동그랗게 솟은 이불이 들썩이더니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롱…….”

“큽.”

발레리안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띤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정신이 없던 중에 잘못 들었던 게 틀림없다. 하긴, 테레지아가 어떻게 그 먼 곳까지 따라올 수 있단 말인가. 과히 흥분한 나머지 헛것을 들은 듯했다.

그렇게 결론 내린 발레리안은 행여 아이가 깰까 조용히 뒷걸음질 쳐 방을 벗어났다. 마침 말을 진정시킨 세바스찬이 그를 찾아왔다.

“기사단이 돌아왔습니다, 주인님.”

“아, 지금 가지.”

* * *

달칵.

“…….”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길 기다리다가 슬쩍 한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갔나?

<테리, 이제 일어나도 될 것 같은데?>

“푸하!”

레일라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몸을 벌떡 일으켜 앉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양손을 모아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숨을 할딱였다.

“와, 진짜 무서웠다…….”

<용케 안 들켰네요. 엄청 티 났는데.>

그러게. 이게 되네.

릭이 시비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을 던졌지만 반박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만큼 조금 전의 상황은 아찔했다.

“하마터면 따라갔다가 온 거 들킬 뻔했네.”

공작이 라이넬 남작의 흉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원래는 방으로 돌아와 얌전히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남작의 ‘배후’가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패들을 쥐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한 상황에 차마 공작가 사람들을 떠밀 수가 없었다.

‘검댕아, 달려!’

‘컹!’

그래서 결국 검댕이의 등에 올라타 공작과 기사단을 쫓아갔다. 하리엔의 일로 근처에 퍼트려 둔 유령들 덕분에 가까스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영지 외곽의 한 여관에 도착한 후. 근처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공작 일행의 전투를 주시했다.

‘진짜, 가끔 보면 다른 사람 같다니까.’

검을 뽑아 든 에버딘 공작은 그야말로 투신처럼 복면인을 몰아쳤다. 저 모습만 보면 대체 누가 저 사람이 딸기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채겠냐고…….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차이에 입을 헤 벌리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소란이 일어나더니 복면인 한 사람이 라이넬 남작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놀란 와중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이 일의 중요한 증인이기도 한 라이넬 남작을 죽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레일라!’

그래서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라이넬 남작의 곁에 있던 레일라는 용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바로 복면인을 덮쳤다.

푸르스름한 레일라의 몸이 복면인을 정면으로 통과했다.

‘윽……!’

유령이 산 사람의 몸을 통과해 지나가면 찰나 얼음 호수에 빠진 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된다는 걸 노린 것이었다.

다행히 내 의도는 잘 먹혀들었다. 유령의 차가움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복면인이 몸서리치는 사이, 기사들은 재빠르게 그를 붙잡아 눌렀다.

‘히익.’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 안심하려던 찰나, 공작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기겁하며 검댕이를 끌어안고 나무 뒤로 숨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들켰을 거다.

공작이 혼란한 와중에도 내 목소리를 들은 듯이 반응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레일라를 챙겨서 검댕이의 등에 올라 황급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막 창틀을 넘는데, 문고리가 덜컥이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발바닥까지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공작은 문고리를 놓더니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덕분에 매무새를 정돈하고 이불을 뒤집어쓸 시간을 벌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해결됐네.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됐을까?>

레일라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다가 황급히 숨을 참았다. 아니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

이불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눈가와 코끝이 시큰거렸다.

역시 이번 일로 인해 힘을 거의 다 소진한 것인지, 레일라는 다른 자루 모양 유령들과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어깨 위에서 찰랑이던 단발도, 긴 신관복도 온데간데없었다. 내 머리 위에 릭이 올라선 것보다도 크던 키는, 이제 내가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

그 모습을 보니 이미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테리?>

호의로 가득 찬 저 동그란 눈만은 여전해서, 나는 애써 눈물을 참고 활짝 웃어 보였다.

“응! 고마워요, 레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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