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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59) (59/124)

<59화>

놀랍게도 인기척의 주인은 에버딘 공작과 기사들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데, 그들은 제복까지 각을 맞춰 입고 있었다.

내 어깨에 매달려 있던 릭이 조용히 운을 뗐다.

<테리. 조금 전에 저 사람들, 분명…….>

‘그래. 라이넬 남작이라고 했어.’

릭도 들었다니 잘못 들은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공작님이 이 시간에 라이넬 남작의 위치를 파악해 둘 이유가 있나?’

저 사람들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무리 봐도 훈련을 하러 갈 시간도, 그럴 만한 차림새도 아니었다.

누가 아리에타 백작을 체포하거나, 그 비슷한 일을 할 때만 입던 제복을 차려입고, 훈련, 을…….

‘어?’

그 순간 묘한 직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혹시 그때…….’

「어두운데 그렇게 혼자 나가면 위험해. 걱정했잖니.」

무도회 날. 공작은 자작저 정원에서 하리엔과 남작을 염탐하던 날 찾아냈었다.

만약 그가 나를 찾아낸 시점보다 조금 더 일찍 정원으로 내려왔다면. 그리고 그도 때맞춰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던 거라면?

내내 속으로 눈치 없다, 바보다 하며 놀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에 가까웠다.

그는 내가 아는 어른 중에서도 유독 무르고 다정한 축에 속하니까. 그게 신기하고 좋아서 그런 거지.

실제로 <투명 신사 이야기> 관련 사업을 진행해 주던 공작은 바보라기보단 오히려 유능하고 영리한 쪽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그러니 공작이 무도회 날, 하리엔과 남작의 대화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뒤를 캐기 시작한 거라면 이 기묘한 상황이 모두 설명된다.

‘저쪽도 연락책에 대해 알아냈구나!’

아무래도 유령들을 이용하는 걸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방법이 없던 나와 달리, 어른이고 권력자인 공작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상대적으로 많겠지.

계속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의심이 싹텄다면 알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건 사람의 행동으로 벌어진 일이고, 행동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니.

‘아무튼 잘됐다.’

사실 공작에게 이 일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게 최선이 맞다. 내가 유령을 본다는 걸 숨겨야 한다는 사실 탓에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지.

그런데 내가 굳이 핑계를 댈 필요도 없이, 알아서 남작의 뒤도 캐고 연락책도 체포하러 가는 중이라니.

나로서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공작도 남작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유령들을 굳이 소모시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쪼오금 남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괜히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 연락책을 놓치는 일은 없을 테니 만족스러웠다.

그때, 기사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던 공작이 돌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히익.’

나는 급하게 머리를 아래로 집어넣고 숨을 죽였다. 덩굴이 두터워 담벼락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손이 보이지 않으리라는 게 다행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공작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테리가 깨기 전에 상황을 정리하고 복귀한다.”

“존명.”

기사들의 깍듯한 대답 뒤로 정갈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들의 기척이 저만치 멀어졌을 때쯤 내 기력도 바닥났다.

“아이고.”

덩굴을 부여잡은 덕에 가까스로 추락을 면하며 땅을 디뎠다. 손과 팔이 온통 저릿해서 주먹을 쥐락펴락해야 했으나 마음만은 상쾌했다.

“잘됐다, 그치?”

웃는 얼굴로 릭에게 물었다. 그는 내 볼을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그러게요. 당신이 위험하게 나서지 않아도 잘 정리될 모양입니다.>

“역시 착하게 살면 하늘이 돕나 봐. 하늘조차 인정한 나의 선량함이란.”

<……착해요? 당신이요?>

“그럼 달리 누구겠어?”

<저라든가.>

“우와, 뭐래.”

<이러면서 대체 뭐가 착하다는 겁니까.>

“그렇게 따지면 너나 나나 마찬가지 아냐?”

릭과 입씨름을 하며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막 발을 떼던 차.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만 보내도 괜찮으려나……?’

물론 이제는 공작과 기사들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때리고 다니는 쪽에 가깝겠지.

하지만 라이넬 남작이 ‘배후’에게 받았다던, 묘한 느낌이 드는 목걸이를 생각하니 뭔가 묘하게 찝찝했다.

하리엔이 받은 목걸이는 천만다행으로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다지만, 그 ‘배후’라는 사람이 또 다른 이상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진짜 악령이라도 든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해?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들은 모습이 유령처럼 변하긴 했지만, 엄연히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악령이 위협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이었다.

“…….”

<테리? 왜 갑자기 멈춰 선 겁니까?>

“……안 되겠다. 가자, 릭! 검댕이도 따라와!”

“컹!”

<예? 아니, 위험한 일에 안 끼어들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봐요!>

* * *

“그나저나 라이넬 남작이 그렇게 속 시커먼 사람이었다니. 역시 사람은 소문으로만 판단할 게 못 되나 봅니다.”

“레딘, 시끄럽다. 집중해.”

“어차피 저희 말소리는 그치한테 들리지도 않는걸요.”

“우리 귀엔 들리잖나! 하여간 너는 사람이 너무 가볍……!”

미하일은 미행 중에도 쉴 새 없이 쫑알대는 레딘을 질책했다.

발레리안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모퉁이 너머의 풍경에 집중했다. 금빛 눈이 어둠 속에서 매섭게 빛났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그는 현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드릭 라이넬의 뒤를 쫓는 중이었다.

테레지아의 추측대로, 발레리안은 헤지우드 저택에서 우연히 남작과 하리엔의 대화를 목격했다.

‘저건…… 마치 하리엔 헤지우드가 겁먹기를 바라는 것 같군.’

원래라면 미처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발레리안도 이제는 한 아이의 부모였다.

만약 테레지아가 모종의 이유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면, 그는 가장 먼저 아이를 다독이고 진정시키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보호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발레리안은 반 유령이자 뛰어난 기사답게, 어느 정도의 흉흉한 기운이나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작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는 어떠한 나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언가가 있다고 거짓말하며 제 조카를 겁주고 있는가?

그러한 이유들로 발레리안은 에버딘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조사에 착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작이 최근 수상쩍게 행동한다는 정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움직입니다.”

레딘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아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든 미하일이 작게 속삭였다.

모퉁이 너머, 후드를 뒤집어쓴 라이넬 남작이 경계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골목 그림자 속으로 바삐 걸음을 움직였다.

발레리안은 남작이 어느 정도 멀어지게 두었다가, 수신호로 기사들과 함께 다시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남작은 중간중간 사설 마차를 빌려 타기도 하며 상당히 멀리까지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랑바드 공작령과 맞닿아 있는, 에버딘 공작령 북쪽 끄트머리의 한 여관 뒷문이었다.

여관 뒷문 앞에 도착한 남작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발레리안과 기사들은 여관 근처의 수풀에 몸을 숨기고 긴장을 유지한 채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얼마 후.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과 로브 등으로 외모를 철저히 감춘 세 사람이 남작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라이넬 남작이 반색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세 사람 중 가운데에 서 있던 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속삭였다.

“진척은?”

“전부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마 지원을 요청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겁니다.”

남작의 자신만만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이가 품에서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내 남작에게 건넸다.

주머니가 남작의 손바닥과 부딪치며 희미한 짤랑,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순간 발레리안이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체포해라!”

“예, 주군!”

그의 명에 기사들이 재빠르게 수풀을 뛰쳐나가 그들을 덮쳤다.

“무, 무슨!”

남작이 기겁하며 물러났고, 복면인들은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더니 곧장 검을 뽑아 들며 대응했다.

‘예사 실력이 아니야.’

발레리안은 가운데 서 있던 복면인을 향해 달려들며 생각했다.

처음 그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것을 받아치던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과 수적 열세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싶더니, 딴에는 근거 있는 자신감인 듯했다.

하지만 상대의 실력이 어떻든, 발레리안 에버딘의 앞에서는 예외였다.

평소에는 얌전하기 그지없으나 검을 쓸 때의 발레리안은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운 입매가 삐딱하게 비틀렸다. 그가 검을 재차 휘두르는 동시에 반지를 꾹 눌렀다.

「자신감도 상대를 봐 가며 내세워야 하는 법이야.」

“……!”

복면인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발레리안은 그 말을 기점으로 그야말로 미친 듯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섬뜩한 살기를 담고 있는 데다가 빠르며 묵직했다. 복면인의 몸이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기사들이 다른 두 명을 마저 제압하고, 달아나려는 라이넬 남작을 무릎 꿇렸다.

이대로면 수월하게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사들에게 붙들려 있던 복면인 하나가 그들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단검을 뽑아 들고 라이넬 남작을 향해 덤벼들었다.

남작이 고문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입막음을 위해 죽이려 드는 것이었다.

“이런……!”

“안 돼!”

기사들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복면인의 움직임이 워낙 빠른 데다가, 발레리안은 복면인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를 제압하기 위해 발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라이넬 남작은 경악한 듯 눈을 부릅뜨고 제게 달려드는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단검이 막 그의 목을 파고들려던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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