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테리, 표정이요.>
갑작스러운 남작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힌 것인지 릭이 빠르게 지적했다. 그 덕분에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을 가장했다.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잘했어, 곰돌이!
속으로 안도하며 슬쩍 릭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하리엔도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작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숙부님.”
발랄한 목소리와 화사한 미소가 일품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남작을 경계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나조차 깜빡 속을 뻔한 정도였다.
저것이 천재의 표정 관리……!
‘나도 배워야지.’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쭉 늘려 보다가 남작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가 껄껄 웃었다.
“저번에 무도회장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참 귀엽게 생기셨습니다. 하리 빼고 이렇게 칭찬해 본 사람은 처음이에요.”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과 행동을 했다면 고맙다며 웃어넘겼겠지만, 고까운 사람이 하니 그냥 어이없었다.
야, 내가 너 보라고 귀엽게 생긴 줄 알아? 어디서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남의 얼굴 보고 이렇다 저렇다 지껄이냔 말이야, 어?
그렇게 쏘아붙이며 ‘릭, 물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난 잠깐의 충동으로 큰일을 망치지 않는 어른이니까…….
진정을 위해서 입바람을 후 불자 앞머리가 팔랑 들렸다가 도로 내려앉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셀레나와 레일라를 향해 눈짓했다.
‘셀레나, 레일라.’
내 신호를 받은 레일라는 즉시 라이넬 남작 곁으로 가서 섰고, 셀레나는 하리엔 뒤로 가서 섰다.
남작에게 티타임을 방해받아 기분이 별로인 것과 별개로, 상황 자체는 우리에게 더없이 유리했다.
원래는 하리엔에게 부탁해서 남작을 불러들이고, 그 틈을 타 레일라를 붙여 둘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딱 맞는 순간에 제 발로 찾아와 주시다니.
아주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으핫, 으하핫!
<테리, 또 표정이 이상해졌잖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너무 티가 납니다.>
……핫.
“어? 뭔가…….”
한편. 미리 이야기해 뒀지만, 역시 유령이 근처에 있으니 한기가 느껴지는지 하리엔이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남작이 다정하게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말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자면 조카를 걱정하는 이상적인 숙부 그 자체였다.
라이넬 남작이 목소리를 낮추어 하리엔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레일라가 그의 속삭임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하리. 네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당분간 매일 들릴 생각이니까. 얼마든지 나를 의지해도 좋아…… 라는데?>
‘아항…….’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믿지 말고 나만 믿고 의지해라, 그렇게 고립되라, 이거지?
“정말요? 감사합니다, 숙부님.”
하리엔은 감명받았다는 듯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의 품에 안겼다. 남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그 틈을 타 슬쩍 고개를 튼 그녀가 내게 짧은 웃음을 내비쳤다. 나도 남작의 시선을 끌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마주 웃어 주었다.
헹, 하지만 과연 네 뜻대로 될까? 어디 두고 보자고, 이 사기꾼아.
* * *
그렇게 며칠간 감시를 붙여 둔 결과. 어지간한 것에 대해선 전부 알아낼 수 있었다.
<사용인들은 각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보수를 찾아간대. 누군가는 부엌 찬장 구석에서, 누군가는 뒷문 아래 흙을 파내는 식으로 말이야. 보수는 금화였대.>
<네 말대로 환풍구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내면, 하리엔 옆에 붙어 있던 사용인이 자기는 못 들었다면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물건을 떨어트려서 위협하면 동료들이 그 근처에서 아무도 못 봤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해서 넘어간다고 하네.>
<나빠, 나빠!>
“역시 그랬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또 무슨 연락 오면 얘기해!”
<응!>
유령들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테라스의 유리문을 닫았다.
유리문 너머, 에버딘 저택에서부터 헤지우드 저택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유령들의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캬, 다시 봐도 장관이라니까.’
셀레나와 레일라가 헤지우드 저택 근처에 자리 잡은 후.
내가 직접 그들을 방문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도록, 에버딘 저택의 유령들은 조금씩 힘을 보태서 헤지우드 저택까지 일렬로 이어지는 줄을 만들었다.
마치 유령 그 자체가 줄 역할을 하는 줄 전화기 같은 모양새랄까.
셀레나와 레일라가 자작저 쪽 줄의 끝에 서 있는 유령에게 할 말을 전달하면, 그 유령이 다음 유령에게 말을 전하고. 다음 유령이 또 다음다음 유령에게 말을 전하고…….
물론 중간에 제가 더 흥분해서 이야기를 과장하려 드는 유령 몇몇 때문에 난항을 겪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 모두가 힘의 소실을 각오하고 나를 돕고 있는 광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리엔에게도 알려야겠다.’
나는 테라스 문을 닫고 돌아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를 펼쳐 하리엔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영애, 사용인들이 남작과 거래하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몇몇 장소와 시간을 알려 줄 테니까 자작 부부께 그 모습을 보여드려요.」
자고로 가장 좋은 증거는 현장 급습이라고 배웠다.
혹시나 어린애 말이라 허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면 믿겠지.
편지를 다 쓰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사용인을 통해 편지를 전했다가는 내용이 유출될지도 몰라서 검댕이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잘 부탁해, 검댕아!”
“컹!”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검댕이는 꼬리를 붕붕 흔들며 정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 부근 사람들은 검댕이가 공작저에서 기르는 아이라는 걸 알고, 목에는 에버딘 인장이 달린 리본도 묶어 줬으니 염려 없음이다.
검댕이는 신기하게 사람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으니까,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하리엔에게 편지를 잘 전달해 줄 거야.
‘그럼 이제 남은 건…….’
남작에게 이런 일을 꾸밀 만한 자금을 대 준 공범.
“……레일라도 연락책만 언뜻 봤댔지.”
<그랬었죠.>
유령들 덕에 어지간한 일은 전부 파악했지만, 안타깝게도 공범의 정체는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남작에게 찰싹 붙어 다니는 레일라도 금화를 조달하는 연락책만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냐. 연락책을 붙잡아서 잘만 추궁하면 공범도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스읍. 그런데 당장 오늘 밤이랬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고.’
문제는…… 남작이 연락책과 만나는 게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는 거다.
게다가 나한테는 그 사람들을 잡을 힘이 없다.
레일라한테 듣기로는 연락책도 상당히 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자랬는데.
‘확 거기를 차 버려……?’
어린애라고 방심한 틈을 타서 급소를 가격하면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다리 길이를 가늠해 봤다.
……짧네, 젠장.
허공에 발차기하다가 뒤로 자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뭐라도 휘둘러 볼까?’
무기를 손에 쥐면 괜찮으려나 싶어 슬쩍 연무장으로 향했다.
목검이든 뭐든 일단 쥐고 휘둘러 볼 생각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목마를 자처하는 바람에 사탕만 잔뜩 받고 나왔다.
게다가 분명 중간에 누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 떨궜을 때, 연무장 바닥이 파였어, 응…….
그거 들고 설치다가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연락책이 아니라 내 발등이 먼저 아작 날 것이다…….
나름 머리를 싸매 쥐어 짜낸 방법들이 모두 장렬히 실패했다. 이걸 어쩐담?
<공작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요?>
“이 일을 설명하려면 유령을 볼 수 있다거나, 느낄 수 있다거나 뭐 그런 걸 다 밝혀야 하잖아. 그렇다고 또 자작저에서 사용인들 수작을 확인하고 공작저에 연락을 넣을 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어렵네요…….>
“그치…….”
릭과 나란히 마주 앉아 심각하게 고민을 이어 갔다. 늘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았던 릭마저도 이번엔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겠는지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 몰라! 일단 덮쳐!”
<너무 대책 없잖아요!>
“그게 사실인데 뭐 어쩔 거야!”
릭의 말대로 마땅한 대책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남작이랑 연락책을 놓아주는 것보다는 낫잖아?
“컹컹!”
편지 전달을 끝내고 돌아온 검댕이가 있으니 호위나 도망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다.
현장에서 소리를 질러서 경비병들이라도 불러 모아 볼 작정으로 몰래 나가려고 했는데…….
‘……잠깐, 뭐지?’
늦은 밤, 덩굴을 타고 담벼락 위에 막 올라서려던 차.
담벼락 바깥쪽에서 적잖은 인기척과 속삭임이 들려와 황급히 움직임을 멈췄다.
‘뭐, 뭐야. 도둑? 아니면 설마 황제가 암살자라도 보냈나?’
그럴 일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싶은 마음에 담벼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빼꼼히 눈만 내밀었다.
담벼락 바깥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라이넬 남작은?”
“지금 막 저택을 나섰다고 합니다.”
‘엥.’
그들은 검을 찬 채로 기척을 죽이며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도둑도 아니고, 암살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공작님이랑…… 기사단 사람들이잖아?’
댁들이 왜 거기서 나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