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하리엔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최대한 차분한 태도로 이야기를 이었다.
나를 돕고자 했던 유령들의 마음이 내게 전해졌던 것처럼. 하리엔을 돕고자 하는 내 마음이 그녀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진심을 담아서.
“저도 영애께 들은 말이 있으니 몇 번이고 확인을 거쳤어요. 게다가 어젯밤, 우연히 영애와 남작께서 정원에서 나눈 대화도 듣게 되었는데…….”
“…….”
“그때 정원에서는 유령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대신 하녀 한 사람이 급하게 도망치는 듯한 뒷모습을 보았죠.”
꽤 긴 말을 이어 가는 동안, 하리엔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텄나?’
그러자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본다고 애써 봤는데, 역시 사기꾼처럼 들렸나? 그런 건가?
‘이대로 내쫓기면 어쩌지.’
그러면 하리엔이 사라지고, 헤지우드도 덩달아 무너지고, 에버딘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흑흑.
그때 내내 침묵하던 하리엔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공녀님께서는…… 자작저의 사용인들이 숙부님께 매수되어, 저를 미치광이로 몰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무미건조했다.
으앙, 역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나 봐! 내쫓기기 3초 전, 2초 전……!
하리엔이 당장에라도 경비병을 부를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반사적으로 입술이 벌어지며 말이 튀어 나가는 찰나.
“믿어요.”
“거짓말 아닌……! 에?”
뭐라굽쇼?
놀라서 말이 절로 멈췄다.
습, 잘못 들었나? 손으로 귀를 탁탁 두드려 보는데, 하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거 아세요, 공녀님?”
그리 말한 하리엔이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찻물 위에 비친 제 얼굴을 잠잠히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을 흘렸다.
“듣기 좋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미안해하지 않아요.”
“…….”
“듣기 싫어도 전해야 할 진실을 전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주눅이 잔뜩 든 얼굴을 하죠.”
나, 나 과도하게 비굴했나?
당황해 양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자 하리엔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씁쓸한 미소로 변했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모양 좋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역시 그랬군요.”
‘역시……? 아.’
저게 무슨 뜻이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깨달음이 찾아와 작게 탄식했다.
그러네, 왜 잊고 있었을까.
하리엔은 어린 나이임에도 벌써 정식 후계자로 공인받았다. 또래들에 비해 어지간히 똑똑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일 테지.
그런데 그런 하리엔이, 정말 수상쩍은 낌새를 한 번도 느끼지 못했을까?
그보다는 수상쩍은 낌새는 느꼈지만, 명확한 증거도 없는 데다가 주변이 온통 저를 모함하려는 사람들뿐이었으니 미처 확신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는 쪽이 진실이겠지.
‘나야 몇백 년 묵은 유령들 덕분에 반쯤 주입식 교육을 당해서 머리가 컸다지만.’
저게 진짜 천재……! 본 투 비 엘리트!
<확실히 영리하네요.>
어쩐지 하리엔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아 속으로 감탄했다. 나한테도 칭찬이 박한 릭이 짧게 말을 얹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하리엔의 표정은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 쥔 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도 혹시,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
“하지만…… 믿고 싶었는데.”
하리엔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것은 온전한 미소라기보다는 자조에 가까워 보였다. 검은 눈은 눈물이 고인 듯 처연히 반짝거렸다.
그 말에, 표정에.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던 걸까?’
오블렌 자작이 나와 내 어머니를 기만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에게 안기고, 품에 볼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던 시절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래서 우습지도 않은 핑계를 대어 가며 헤지우드 가문의 일에 간섭하려 했나 보다.
“제가 바보 같은 짓을…….”
“바보 같지 않아요.”
“……네?”
그래서 차마 하리엔이 냉소적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하리엔은 물기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누군가의 선한 부분을 믿고 싶어 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
“그 믿음을 배신하고 상대를 상처 입히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죠.”
나, 그리고 내 어머니는 분명 오블렌 자작에게 속았다. 상냥한 미소와 다정한 손길에 속절없이 속아 넘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믿은 우리의 잘못이겠는가?
‘아니.’
나쁜 마음을 먹고 속여 먹으려고 든 놈이 잘못한 거지.
속은 사람이 잘못했다고 지껄이는 것들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인지 몰라서 그럴 수 있는 거다.
약한 건 속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등쳐 먹을 생각뿐인 오블렌 자작 같은 놈들이지.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이 모든 일에 하리엔의 책임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다고.
다른 말들을 믿어 주지 않더라도, 이 말만은 꼭 전해지기를 바라며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다행히 그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하리엔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툭 흘러내렸다.
그로써 모든 고뇌와 망설임을 털어 낸 듯이, 그녀가 홀가분하게 웃었다.
“……네. 고마워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밝아지는 미소였다.
* * *
이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 그 자체였다.
하리엔은 근심 걱정을 모두 털어 내고 신뢰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나는 그녀의 그런 신뢰 덕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 지금 걸고 있는 목걸이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뭔가 범상찮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운을 떼는 것도 한결 수월해졌다.
“정말요? 이것도 숙부님께서 주셨던 건데…….”
하리엔이 놀란 얼굴로 곧장 목걸이를 풀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제야 내내 신경 쓰이던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목걸이를 쥔 손을 슬쩍 내려 릭도 볼 수 있게끔 조절했다.
‘역시 뭔가 찜찜한데…….’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뭘까, 꿀이 한 스푼 정도 덜 들어간 우유 같은 이 애매함은…….
목걸이에는 분명 ‘어떤’ 기운이 배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라이넬 남작이 좋은 의도로 건넸을 리도 없고.
다만 고민되는 건, 이 알 수 없고 반쯤은 낯선 기운이 영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무지하게 수상하긴 한데, 동시에 무해해 보인다. 그게 문제였다.
“으으으음.”
<위험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결국 한참의 고민과 릭의 의견도 더해서, 하리엔에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좀 수상하긴 하지만, 사람을 해하는 물건은 아닌 것 같으니까 돌려드릴게요. 다시 거는 편이 나을 것도 같고요.”
“확실히 목걸이를 걸고 다니지 않으면 제가 숙부님을 의심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겠죠.”
“네. 부탁드려요.”
하리엔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녀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거는 사이 나는 바짝 다가가 계획을 속닥거렸다.
“그리고 당분간 자작저에서 좀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싶어도 너무 무서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할게요, 공녀님.”
하리엔은 내 모호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가 유령을 본다는 사실을 숨기고, 희미하게나마 기운이 느껴진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사실 유령을 본다는 거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거나 거의 같은 뜻이긴 한데…….’
그럼에도 이렇듯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하리엔이 못 미덥다거나 그녀가 나를 껄끄러워할까 봐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걱정은 아메트리스 후작을 만났을 때 이미 저 멀리 휘휘 던져 버렸다.
하지만.
‘제르비스 때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래도…….’
적어도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털어놓고 인정하는 건…… 에버딘 사람들 앞에서가 처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다들 언제나 한결같이 나를 좋아해 주고, 나를 위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니까.
되도록 그들에게 가장 먼저 비밀을 털어놓고, 사과하고 싶었다. 일전에 다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일이 잘 해결된다면, 그때는 믿을 만한 사람들 한정으로 털어놔도 되려나?’
아직은 그저 미약한 가능성일 뿐이지만 심장이 도근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런 감상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니까. 일단은 라이넬 남작부터 조지고 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라이넬 남작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들떴던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차분해진 태도로 하리엔과 혹시 모를 위협을 경계하자고 다짐을 주고받았다.
그때 멀리 물러나 있던 하인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전혀 달갑지 않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가씨. 라이넬 남작님께서 방문하셨답니다.”
하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이넬 남작이 정원을 가로질러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리, 여기 있었구나. 오, 공녀님께서도 계셨군요.”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두 눈만은 탐욕과 경계로 음침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