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여러 사람, 아니, 유령의 도움을 받아 정리해 본 바로.
우선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였다.
하나, 라이넬 남작과 자작저 사용인들 사이의 유착 관계 증거 찾기.
둘, 라이넬 남작의 공범이 누군지 알아내기.
셋, 하리엔이 다치지 않게 지키기.
‘셋 다 어렵잖아!’
으아아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여기는 에버딘 저택이었다.
괜히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긴 싫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침대를 푸샥푸샥 때리며 분을 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하리엔과 나는 사는 곳도 다른 데다가, 보호자가 없으면 마음대로 나다니기도 힘든 어린애였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난감한데, 하필이면 에버딘령의 유령 대부분은 에버딘 저택에 몰려 있었다.
이는 곧 내가 부리거나 협박할…… 아니, 협조를 구할 만한 유령도 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셀레나나 토미처럼 아주 강한 유령일지라도, 머무는 곳을 함부로 떠났다가는 힘을 잃고 유령의 모습마저 잃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런 일을 강요하기는 좀.
‘내가 같이 움직이면 헤지우드 저택에 두고 올 수는 있는데…….’
그런다 한들 에버딘 저택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무르는 동안은 힘이 차차 깎여 나갈 것이다.
물론 누군가 헤지우드 저택과 라이넬 남작을 감시해 준다면 해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칫 셀레나나 레일라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떡하나 고민하며, 정원에서 검댕이와 놀아 주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나 보내 줘! 내가 남작을 감시할게!>
별안간 폭탄이 떨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에?”
놀라서 손에 힘이 탁 풀렸다. 그 바람에 땅으로 떨어질 뻔한 릭을 검댕이가 재빨리 물어 붙잡아 주었다. 릭이 질색했다.
<으, 침.>
“흙바닥 구르고 전신 빨래 당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
릭은 얌전해졌다. 곰돌이의 존엄을 지켜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검댕이의 턱을 긁어 주고, 다시 레일라를 돌아보았다.
허공에 거꾸로 누워 있는 그녀는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반신반의하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진심이에요?”
레일라가 이미 유령이라 망정이지. 사실 이것은 또다시 죽을 수도 있는 일에 나서 달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염치없음에 차마 묻지 못했는데. 레일라는 티끌만큼의 어둠도 없는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응. 며칠 고민해 봤는데 역시 괜찮을 것 같아. 어차피 여기까지 넘어왔던 이유도 처치한 지 오래고. 미처 해 보지 못해서 아쉬웠던 것들도 네 옆에 머무르면서 어느 정도 해 봤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정녕 홀가분해 보였다.
<나는 셀레나처럼 강하지는 않으니 아마 일이 끝나면 더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네가 나를 성불시켜 줘.>
그 말에 고맙다며 웃어야 할지. 아니면 미안하다며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헤이튼 아저씨 때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심란하지는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헤이튼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성불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을 맞대고 지낸 기간도 짧았다. 그래서 그를 보내 줄 때는 나 또한 홀가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일라는 에버딘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난, 꽤 오래된 인연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심지어 나를 위해 희생을 자처하겠다고 하니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이것이 내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지 싶어, 죄책감에 절로 고개가 떨구어졌다.
이들은 유령이지만, 동시에 내게는 친구였다. 몸은 차게 식어 땅에 묻혔을지언정, 여전히 내게는 따스한 친구.
<테리.>
그때 어깨로 다정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셀레나였다.
<너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도왔지.>
언뜻 엄마로 착각할 만큼 상냥한 음성에 어쩔 수 없이 코끝이 시큰해졌다. 가만가만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길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너를 돕게 해 줘. 희생이 아니라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기쁠 거야.>
“…….”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해 줘.>
눈물을 참다가 슬쩍 시선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레일라와 셀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웃어 보였다. 평소에는 호들갑을 떨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바쁘던 자루 모양 유령들도 따스한 기색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보면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결국 한 손으로 시큰한 코를 꾹 움켜쥔 채, 그들을 따라 웃어 보였다.
“웅. 고마워요, 다들.”
<……코맹맹이 소리 납니다, 테리.>
“……시끄러워, 망할 곰도리.”
<방금 또 발음 샜는데.>
“아, 진짜!”
* * *
「할 말이 있는데, 단둘이 만날 수 있을까요?」
유령들과의 논의를 끝마친 후 하리엔에게 곧장 편지를 썼다. 그녀는 흔쾌히 좋다는 말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채비를 마치고, 품에는 릭을. 양어깨에는 셀레나와 레일라를 대동한 채 위풍당당하게 저택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두 인영이 잽싸게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끔벅였다.
“……제리? 황태자 전하?”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였다. 두 사람은 나와 같은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래서 합리적인 추론을 했다.
“혹시 두 사람 짰어요?”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는 칼같이 부정했다. 그 모양새마저 닮아 있었지만, 더 지적하지는 않았다. 한시가 바쁘니까.
“네, 뭐. 그러시다면 굉장한 우연이네요. 아무튼 비켜 주시겠어요? 이러다가 늦을 것 같은데.”
여전히 활짝 열려 있는 마차의 문을 눈짓하며 방긋 웃었다. 그러나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는 꿋꿋이 제자리에 선 채 요구했다.
“같이 갈게.”
“동행하게 해 줘, 공녀.”
“안 돼요.”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리엔과 유령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저들에게 굳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제르비스는 내게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하리엔은 이 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아 했다. 그렇다면 지켜 줘야지.
두 사람은 여전히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는 릭을 양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며 단호히 걸음을 내디뎠다. 릭 때문에 직접 손을 뻗어 너희를 밀어낼 수 없으니 알아서 비키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릭은 묘하게 의기양양해했다.
<역시 올려다보는 것보다는 내려다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하여간 쟤도 참 성격 나쁘다니까.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마차에 올랐다.
무도회처럼 밤늦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가 아니었기에 공작이 동행하지 않아도 헤지우드 저택을 방문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셀레나, 레일라. 괜찮아요?”
<응. 아직은 딱히? 네가 옆에 있어서 그런가.>
<나도.>
마차에서 내리기 전. 속삭이듯 물은 말에 셀레나와 레일라가 안심하라는 듯 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서, 그들을 힐긋거리며 정원 한편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하리엔이 자그맣게 미소 지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재빨리 살피자 그녀의 목에는 며칠 전 남작이 준 것으로 보이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확실히…… 신기한 느낌이네. 릭의 말대로.’
정신을 집중하자 목걸이에서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릭의 말대로 마도구는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운.
‘유령이라기엔 미약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또 친숙하고.’
끄응. 고민하다가 하리엔이 나를 보며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는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하리엔이 사용인들을 손짓으로 밀어낸 후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릭을 무릎 위에 앉히고 빙긋 웃으며 찻잔을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차도, 초대도.”
“별말씀을요. 어차피 저도 숙부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려 드리려 했거든요.”
사실 이미 다 들었지만…….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으니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하리엔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하리엔은 악령을 멸할 방법이 없다는 숙부의 말에 실망하긴 했지만, 의연하게 자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오히려 부모님께 폐를 끼치진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아이를 남작 같은 사람이 해치게 놔둘 순 없다고.
부디 내 이야기가 라이넬 남작을 무작정 깎아내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길 바라며, 하리엔의 이야기가 끝난 후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 헤지우드 영애.”
“네, 공녀님.”
“저는 유령의 기운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하리엔이 기억난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눈에서 나를 향한 믿음이 묻어났다.
그래서 용기 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헤지우드 저택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제가 만났던 라이넬 남작께서는 유령을 전혀 보거나 느끼지 못하셨어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