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뻔뻔하게 거짓을 내뱉는 라이넬 남작의 모습.
그 광경으로 인해 나는 이 모든 것이 남작이 의도적으로 꾸민 일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익숙한 환멸감이 찾아왔다.
‘오블렌 자작 같은 놈이네.’
명색이 내 친부라면서 나를 방치하고, 자작가의 재산을 해 먹은 오블렌 자작이나.
보이지 않는 걸 보인다고 거짓말하며 조카를 겁주는 저놈이나. 쓰레기라는 점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쓰레기의 사정이나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하리엔이 울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사태의 원흉임이 확실한 남작에게 매달려서.
잔뜩 겁에 질려 있는 하리엔의 얼굴을 눈에 담자 속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저게 숙부라는 사람이 할 짓이야?’
생각보다 몸이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빽 목소리를 높였다.
“헛…… 으븝!”
‘헛소리하지 마, 이 사기꾼아! 뒤로 구르면서 봐도 유령 없잖아!’
<테리, 뭐 하는 겁니까! 당신이 유령을 볼 수 있다고 광고라도 할 생각이에요?>
그러나 목소리의 근원을 찾으라고 보냈던 릭이 때맞춰 돌아와 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헉,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발 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온몸의 피가 식는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마터면 남작을 감시하고 있던 거랑 내가 유령을 본다는 거, 둘 다 들킬 뻔했네.’
잘 키운 곰돌이 하나 열 사람 안 부럽다! 기특함에 릭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며 급하게 기척을 죽였다.
다행히 남작은 하리엔의 울음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보였다. 그는 허공을 향해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몇 가지 중얼거리더니 아이를 다정히 다독였다.
“이제 괜찮다, 하리. 곧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잠시나마 놈을 쫓아냈으니까.”
“정말요……?”
“그래. 그러니 우선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자꾸나. 네게 해 줘야 할 이야기도 있고, 줄 것도 있으니…….”
와, 하다 하다 이제는 성불 사기까지?
야! 네가 유령 하나 성불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냐? 유령 성불시키고 몇 시간 뻗어 있어 봤냐고, 앙?
그깟 말 같지도 않은 옹알이 몇 마디로 되는 일이 아니란 말이야!
……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 기척을 냈다가는 이렇다 할 증거도 잡지 못했는데 남작의 경계만 올리는 꼴이 될 게 뻔했다.
그래서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삭이며 그들이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갔네요.>
릭은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나는 그의 손이 떨어지는 즉시, 일말의 이성을 동원해 숨죽여 소리를 질렀다.
“저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아이고, 속 터져! 여덟 평생 유령을 볼 줄 안다고 거짓말하는 놈은 또 처음이네!
열불이 뻗쳐서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데 릭이 잔소리했다.
<테리, 욕은 안 됩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세요.>
“……네 말이나 내 말이나 똑같은 뜻이잖아.”
게다가 왠지 릭이 한 말을 들었을 때가 더 기분 나쁠 것 같은데.
떨떠름하게 릭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럴 때 보면 나보다, 아니 적어도 나만큼은 성격 나쁘다니까, 쟤.
그래도 덕분에 마음과 머리는 조금 식었다. 한숨을 푹 쉬고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 목소리를 내던 사람은 찾은 거야?”
<사람의 존재는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아슬아슬하게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옷자락만 봤어요. 옷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하녀인 것 같더군요.>
“이런…….”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곰 인형인 릭이 성인의 발걸음 속도를 따라잡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마음은 남작의 수염 한 올만큼도 없었다.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생각하자, 테레지아 에버딘. 생각!
그렇다면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릭, 둘을 따라가서 남작이 하리엔한테 뭐라고 말하는지 엿듣고 와. 나는 혹시나 자작저에 머무는 유령이 없는지 다시 찾아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람은 따라잡을 수 없어도, 문밖에서 대화를 엿들을 수는 있지.
‘라이넬 남작, 조진다.’
감히 내 앞에서 유령을 볼 수 있다고 사기를 쳐?
정작 나는 이 능력 때문에 내 잘못이 아닌 죄책감까지 떠안았는데. 자기 일 아니라고 막 써먹는다 이거지? 확 물어 버릴 테다.
속으로 이를 갈며 릭의 등을 떠밀어 보냈다. 그가 모퉁이 너머까지 잘 가는지 확인한 후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테리.”
“어엄마야악!”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온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어올랐다.
목에서 덜컥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언젠가처럼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레리안 에버딘 공작.
아까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 설마…….’
방금 부른다고 곧이곧대로 반응했냐……?
일순 머리가 아찔해져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틀렸다. 이건 진짜 빼도 박도 못 해.
하지만 난 아직 털어놓을 준비가 안 됐는데! 공작가에 내린 저주도 못 풀었고……!
“저,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일단 어떻게든 변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막 입술을 떼던 차였다.
달칵.
공작이 한발 먼저 반지를 눌렀다. 깃펜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글씨를 수놓았다.
직후 이어진 말은, 아니 글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두운데 그렇게 혼자 나가면 위험해. 걱정했잖니.」
“네?”
「적어도 다음부터는 어딜 가는 건지 말이라도 해 주렴. 한참 찾았어.」
“어…….”
이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이며 공작을 다시 관찰해 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담담했다.
아까는 내 착각이었나? 아무리 그래도 왜 저렇게 태연하지?
어, 혹시 내가 본인 그림자를 보고 놀랐다고 생각한다거나……?
「그리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그림자 때문에 무서웠지?」
헐. 진짜네.
‘착한 바보…….’
착해서 고마워요, 공작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알아서 착각해 주겠다니 천만다행이었다. 더 부정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헤헤 웃으며 팔을 뻗었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그런데 저희 벌써 집으로 돌아가요?”
일부러 저택 말고 집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내뱉었다. 진심이 반쯤 담긴 나름의 애교였다. 내가 당신이랑 공작가를 이만큼 좋아해요, 하는.
그러자 눈을 한번 깜박인 공작이 푸스스 웃으며 나를 안아 들었다. 가볍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더 있고 싶니?」
“음, 조금만 더요. 하리엔한테 인사도 해야 하고, 리벨이랑, 멀린이랑…….”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아자.’
덕분에 릭이 남작과 하리엔의 대화를 엿듣고 내게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도 벌었다.
나는 그렇게 공작에게 안긴 채, 그의 선한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 * *
“끄으응.”
피곤해…….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아무래도 헤지우드 자작저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후유증인 듯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본능적으로 꾸물거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데,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어깨를 붙들었다.
<테리, 일어났습니까?>
“아니……. 자…….”
<자는 사람이 대답을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눈 뜨자마자 어제 있었던 일 설명해 달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히잉, 엄마…….”
<귀여워도 안 되고, 전 당신 엄마가 아닙니다. 일어나라니까요.>
하지만 릭은 끈질기고 단호했다.
젠장, 지금만큼은 유령이고 싶다. 그러면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고통과는 작별할 수 있을 텐데.
물론 그러면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고통뿐 아니라 거의 모든 감각을 잃어버리겠지……. 흐흑.
“으, 차거.”
결국 그의 등쌀에 못 이겨 몸을 일으키고 세수를 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니 그래도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좋아, 준비됐어. 남작이 뭐래?”
미나가 아침 쟁반을 두고 나간 후. 침대 위에 반듯이 앉아 물었다. 그러자 릭이 설명을 시작했다.
‘수도에 가서 백방으로 유령을 없앨 방법을 알아봤다. 하지만…… 유령을 완전히 멸할 방법은 없다더구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잠시 쫓아내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으니, 내가 너를 지켜 주마.’
‘이 목걸이가 유령의 기운을 어느 정도 막아 줄 거다. 꼭 몸에 지니고 다니렴.’
릭의 전해 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그거였다.
남작이 본격적으로 하리엔을 제게 의지하게 만들려는 듯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건넨 목걸이에서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
릭은 목걸이가 마도구 같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수상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릭의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증거를 찾아야 해.”
라이넬 남작이 무언가를 꾸민다는 건 확실했다. 사용인 대부분이 매수되어 있을 확률도 높아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작 부부가 원인을 알아보려 저택을 몇 번이나 뒤집어 엎었다는데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을 수는 없겠지. 다들 쉬쉬하며 입을 맞춘 게 아니고서야.
다만 의아한 것은, 남작에게는 자작저의 사용인 대부분을 매수할 만한 돈이 없다는 점이었다.
곁에서 잠자코 대화에 귀 기울이던 셀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알려 주었다.
<전 헤지우드 자작은 철저하게 장자를 우선하는 사람이어서, 차남인 라이넬 남작에게는 작위 빼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들었어. 현 자작이 그런 남작을 안쓰럽게 여겨서 유산 일부를 떼어 주려 했는데도 거절했다던데? 아리에타 백작이 지나가듯이 자존심을 세우자고 궁핍을 택한 머저리라고 비웃었던 기억이 나.>
그럼 사용인을 매수한 돈은 다 어디서 난 거지?
‘……혹시 공범이 있는 건가.’
이거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