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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54) (54/124)

<54화>

“크렘위든 제국 최고의 연기였어, 릭.”

<그거 칭찬입니까, 놀리는 겁니까?>

“으음. 둘 다……?”

<와중에 당당하기까지.>

“그게 내 장점이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투덜거리는 릭에게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팔에 힘을 꾹 주었다. 그리고 기둥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주위를 살핀 후, 폴짝 뛰어 다음 기둥 뒤로 이동했다.

‘아무도 없겠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하긴, 다들 한창 무도회를 즐길 시간이긴 하지.

이곳은 저택의 후원과 이어지는 회랑이었다.

자작 일가의 방 근처를 지키던 기사들은 릭을 무도회 참석자의 분실물로 간주하고 무도회장 입구의 테이블에 놓아두었다.

이후 릭은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교대하는 틈을 타 도망쳐 내게 돌아왔고, 지금은 함께 후원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참이었다.

후원이 무도회 참석자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장소는 아니긴 하지만. 괜히 여기저기 저택을 염탐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가는 남작의 경계심이 커질까 염려되어 은밀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기둥 너머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 채, 시선으로 저택 위쪽을 빤히 응시했다.

“화분을 떨어트릴 만한 장소라…….”

하리엔이 겪은 일들이 유령의 짓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확인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렇다면 화분 역시 인간의 짓일 가능성이 크다.

‘하리엔이 후원 바깥쪽을 따라 걷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해.’

후원 바깥쪽으로 사각형을 그리며 이어진 산책로의 북쪽은 헤지우드 저택과 바짝 붙어 있었다.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저택 옥상에 올라가 화분을 떨어트린다면, 산책로를 걷던 이에게 충분히 맞을 법한 거리였다.

“역시…….”

누군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리엔을 해치려 드는 것이 틀림없어.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바스락-

고요하던 후원에서 별안간 자그마한 기척이 들려왔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릭을 더 강하게 끌어안고 기둥 뒤로 바짝 붙어 섰다.

‘누구지?’

긴장해 숨을 죽였다. 그사이, 정체불명의 인영이 조심조심 풀 밟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걸음 소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보아서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사람은 아닌 거 같고. 아무래도 막 헤지우드 저택에서 나온 사람 같은데…….

‘라이넬 남작인가?’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라이넬 남작이 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상한 계획을 세우는 건가?

그런 생각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기둥 너머를 아슬아슬하게 내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 읍.”

<테리. 소리를 내면 어떡합니까.>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얼떨떨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기겁한 릭이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 작은 소리가 새어 나간 것인지, 정원을 배회하던 인영이 이쪽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달을 가리던 구름이 물러나며 상대의 얼굴 위로 빛을 드리웠다.

“……거기 누구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상당히 익숙했다. 릭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채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시야에 비친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리엔……?’

정원에 서 있는 자그마한 인영은 분명 하리엔 헤지우드였다.

* * *

부스럭.

“응?”

하리엔은 무도회를 즐기며 웃던 중, 문득 종이가 구겨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을 내렸다. 시선이 향한 곳의 끝에는 제 손이 있었다.

하리엔은 뒤늦게 손바닥에서 이물감을 느끼고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 위에 끄트머리가 구겨진, 자그마한 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하리엔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런 쪽지를 쓴 적도, 손에 쥔 적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이런 게 손에 있었던 거지?

자신이 모르는 새 일어난 일.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본능적인 섬뜩함이 찾아들었다.

표정을 굳힌 하리엔이 쪽지를 손안에 꾹 말아쥔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근처에는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황태자와 후작 영식이 생각보다 친절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또래들뿐이었다.

“앗. 영애, 어디 가세요?”

“조금 지친 것 같아서요. 마저 이야기 나누세요.”

하리엔이 뒷걸음질 치자 몇몇이 순진하게 물어 왔다. 그녀는 그들에게 애써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내젓고 빠르게 구석으로 향했다.

기둥 뒤에 숨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하리엔이 몰래 쪽지를 펼쳤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쪽지에는 필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삐죽빼죽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친구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면 혼자서, 조용히 후원으로 나와라.」

“흡……!”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하리엔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쪽지를 내팽개쳐 버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눈물과 함께 꾸역꾸역 삼켜냈다. 시야가 눈물로 인해 흐릿해졌다.

‘왜…….’

왜 자꾸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혹시 나도 모르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를 정말로 상처 입힌 건 아닐까?

죄책감이 점점이 소녀를 갉아먹었다. 하리엔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집어 들고 소매 안에 숨겼다.

어느새 하리엔의 눈빛은 ‘후계자’답게 단단해져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주먹을 세게 말아쥐며 이를 악물었다.

‘친구들까지 다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하리엔이 잘못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아무 관련 없는 친구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리엔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헤지우드 영애는요?”

“아, 잠깐 쉬러 간다고 했는데, 아마 테이블 쪽에…… 어라? 없네요?”

하리엔과 어울려 놀던 또래 영애들이 뒤늦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하리엔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는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관심을 돌려 버렸다.

* * *

‘하리엔……?’

쟤가 대체 왜 여기 있지?

한창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시간에. 그것도 그 무도회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하리엔이 왜 이런 인적 없는 후원에 나와 있는 거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머리를 굴렸다.

기이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리엔 헤지우드…….”

“……!”

희끄무레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에 스며 있는 악의가 얼마나 짙은지, 순간적으로 어깨가 파드득 튀어 올랐다.

‘뭐, 뭐야? 설마……!’

배수구 앞에서 했던 생각이 진짜인 건가? 하지만 여긴 복도도 아닌데 어떻게?

“도,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그때 하리엔도 나와 같은 걸 들었는지 창백한 얼굴로 양손을 꾹 맞잡았다. 그녀는 덜덜 떨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말을 이으려 애썼다.

“내가 무슨, 잘못을…….”

“너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죽여 버릴 거야!”

“꺄아아악!”

하리엔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형형한 말이 화답하듯 허공을 찢어발겼다. 그녀는 결국 작게 비명을 지르더니 양손으로 귀를 막고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러다 실신하겠어요!>

릭이 다급히 외쳤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수상함이고 뭐고 일단은 하리엔부터 진정시키고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하리!”

누군가 한발 먼저 경악한 얼굴로 저택에서 달려 나왔다.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라이넬 남작이었다.

“하리, 대체 이게 무슨……. 왜 이런 데 혼자 나와 있는 거니. 한참 찾았잖아.”

남작이 정원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은 조카를 향해 황급히 몸을 숙였다. 하리엔이 퍼뜩 고개를 들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수, 숙부님……. 흐으윽.”

“진정하고 말을 해 보렴. ……혹시 또 그 유령 때문이니?”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섬뜩한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조용히 릭을 바닥에 내려놓고 속삭였다.

“릭. 분명 회랑이나 근처에서 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을 거야. 될 수 있으면 얼굴도 보고 오고, 무슨 수를 쓴 건지 알아보고 와.”

<알겠습니다.>

릭은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 안쪽에 붙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하리엔의 말소리가 들려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라이넬 남작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숙부님, 목소리가. 목소리가…….”

“……역시.”

하리엔의 말을 들은 라이넬 남작이 얼굴을 굳히며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겁에 질린 하리엔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저, 저기 있…… 는 건가요?”

“그래. 저기서 너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구나.”

라이넬 남작이 하리엔을 다독이며 형형히 눈을 빛냈다. 그의 모습은 위협에 두려워하는 조카를 듬직하게 감싸는 숙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좋지 않은 의미로.

‘……와, 연기 죽인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넬 남작이 노려보고 있는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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