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누군데?”
“누구랑?”
기이하게 이어지던 침묵은,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동시에 내뱉은 말에 의해 깨어졌다.
어쩐지 스산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웃는 낯인데 말이다.
“어…….”
얘랑요?
그 위압감 탓에 반사적으로 튀어 나갈 뻔한 말을 삼키며 시선을 슬쩍 내렸다. 상황에 맞지 않게도 릭의 정수리는 여전히 하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서 두 번째 파트너가 곰 인형이라고 하면 제정신 취급은 못 받겠지?
‘얼버무리자.’
그렇게 작심하고 새침한 척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있어요. 비밀이에요.”
애초에 저들의 질문에 내가 굳이 대답할 의무가 있나? 없지.
말할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피력하자 더 질문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
“흠.”
다만 제르비스는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며 무언가를 골몰하는 얼굴로 침묵했고. 칼리오스는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둘 다 굉장히 심기 불편해 보이는데. 내 관심은 그들 어깨 너머의 공작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숫제 울 듯이 눈썹을 누그러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반투명한 금빛 눈이 평소보다 배는 반짝였다. 눈물이 고여 있다는 뜻이었다.
‘나한테 두 번째 파트너가 있다는 게 울기까지 할 일이야……?’
대체 왜?
의아스럽긴 했으나 공작이 케이크를 떨군 아이처럼 울상을…… 아, 방금 정말로 떨구긴 했지, 참.
아무튼 공작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첫 번째 파트너인 공작님과는 상관없는 얘기에요. 그런데 오늘은 그만 추고 싶어요. 발바닥이 아파서.”
그제야 공작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그가 나와 춤추는 걸 싫어하지 않는 걸 넘어, 꽤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자 조금 뿌듯해졌다.
하지만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는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하니 좀 억울하네. 누구랑 춤을 추든 내 맘인데 저 둘은 왜 자기 손에 쥔 간식을 뺏긴 것처럼 구는 거지?
탐탁잖은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굴리는데, 마침 좋은 구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빙긋 웃었다.
“표정이 어두운 걸 보니, 두 사람은 춤을 꼭 추고 싶나 봐요. 그렇죠, 여러분?”
“여러분……?”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흠칫하더니 내 시선이 향한 곳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것은 과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수십 쌍의 눈이었다.
두 사람이 몸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꼬마 숙녀들의 인사가 쏟아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저는…….”
“전하, 혹 파트너가 필요하시다면…….”
“아메트리스 후작 영식.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어쩐지 옆자리가 허전해 보이시네요?”
에버딘령의 사람들은 황가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정은 사실상 어른들의 것이다. 아이들의 것이 아니라.
지금 저 순수한 꼬마 숙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에버딘과 황가의 기 싸움이 아니라 낭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 후작 영식과 동시에 춤출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까. 게다가 두 사람 다 워낙 외모가 출중하기도 하고.
“잠깐…….”
“공녀, 기다려!”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나를 향해 애절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들은 와르르 몰려드는 소녀들에게 가련하게 휩쓸렸다.
그 틈을 타서 냉큼 공작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저는 잠깐 쉴 겸 바깥 구경 좀 하고 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테리, 잠깐……!」
공작이 같이 가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에게 붙잡히기 전에 릭을 끌어안은 채 냉큼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어허, 안 되지. 무도회도 어느 정도 즐겼겠다, 이제는 본분에 충실해야 할 때라고요.
‘내가 여기 온 두 번째 목적!’
헤지우드 저택 염탐…… 아니, 탐방하기!
* * *
“나 잘했지?”
<잘했어요, 테리.>
“혼자 빠져나온 게? 아니면 약속 지킨 거?”
<둘 다요.>
“정말?”
<정말로.>
릭이 만족스럽게 대답하며 내 팔을 통통 두드렸다. 그에 어깨가 으쓱 솟았다.
엣헴. 이래 보여도 내가 한 의리 하는 사람이라고. 엄마랑 토미가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자랑스러워했을 텐데, 크.
“아무튼, 하리엔이 말했던 곳이 어디였지? 복도, 정원…….”
이제 정말 일할 시간이다. 하리엔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라이넬 남작이 유령을 본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어.’
그렇다면 하리엔을 괴롭히던 목소리, 난데없이 떨어지며 목숨을 위협했던 화분 등은 유령의 소행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누가? 왜? 무엇을 노리고?’
라이넬 남작이 단순히 조카에게 허풍을 떨기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슨 일을 꾸미기 위해 거짓말한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다.
그것을 알아내려면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장소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라 그런지 저택의 중심부는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기사 몇이 군데군데 경비를 선 채였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자작 일가의 방이 있는 곳 근처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모퉁이에 숨어 혀를 차며 속삭였다.
“릭.”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릭이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화분이나 탁자 아래 등에 숨으며 반대쪽 모퉁이로 이동했다.
아장아장 걷는 그 뒷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급하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다가, 릭이 돌아볼 때쯤 표정을 갈무리하고 손을 내렸다.
구두를 벗어 손에 쥐고 양말만 신은 채 나갈 준비를 했다. 우리는 각자 모퉁이에 숨어 눈짓을 주고받았다.
<하나, 둘…….>
‘셋!’
셋을 세는 것과 동시에 릭이 모퉁이 너머로 툭, 소리 나게 쓰러졌다. 그러자 흠칫한 경비병들이 고개를 갸웃하고 다가왔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나도 들었는데. 뭐지?”
모퉁이에 세워진 화분 뒤에서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고개를 힐긋 옆으로 돌려 내다보니, 다행히 기사들은 이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곧장 릭이 있는 쪽으로 향한 듯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웬 인형이 있는데?”
“누구 거지? 아가씨 건가?”
“그나저나 되게 으스스하게 생겼네. 꼭 유령이라도 들린 것처럼.”
“…….”
예리한데……? 당신을 에버딘 저택으로 스카우트하고 싶군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참. 한 기사의 예리함에 감탄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까치발을 들었다.
나는 기사들이 등을 보인 채 릭을 둘러싸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몰래 자작 일가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섰다.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아서 빠르게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목소리, 목소리라.’
유령이 아니라면……. 혹시 사람의 짓인가?
하지만 군데군데 화분이나 테이블 같은 엄폐물이 놓여 있다고 한들, 그 뒤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건 나처럼 작은 아이나 릭 같은 곰 인형뿐이었다.
뭔가 이런 일을 꾸미려면 청소년 즈음은 되어야 하지 않나? 더군다나 하리엔처럼 영리한 아이를 속이려면 말이다.
그러니 이런 휑한 복도에 사람 한 명이 눈에 띄지 않고, 감쪽같이 숨어서 목소리를 흘릴 수 있을 법한 장소가 있을 리가…….
‘응?’
그때 복도에 난 창문 아래, 벽과 바닥이 맞닿는 곳에 자그맣게 뚫려 있는 구멍이 눈에 띄었다. 몸을 숙여 살펴보자 구멍 근처에서 바람이 웅웅 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환풍구? 아니면 배수로인가?’
생긴 걸 보면 배수로 같긴 한데.
그것의 용도를 고민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코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아, 안 돼! 여기서 재채기를 하면 기사들이 올 텐데……!
눈을 질끈 감고 급하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소리를 참았다.
그러한 노력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손 틈으로 새어 나간 것은 아주 작고, 또 하찮은 소리였다.
“헷츄.”
헷츄, 헷츄, 헷츄…….
다행히 기사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달리 가까워지는 기척은 없었다. 그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을 떼고 구멍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방금…….”
방금, 방금, 방금…….
그러자 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간 중얼거림이 웅웅 메아리쳤다. 메아리가 흐려질수록 내 목소리 같지 않게 섬뜩한 음성이 되었다.
그 소리를 듣자 퍼뜩 어떤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거미처럼 바닥으로 몸을 바짝 낮추고 구멍에 대고 속삭여 봤다.
“릭 바보.”
릭 바보, 릭 바보, 릭 바보…….
분명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는데. 마지막 메아리에서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그것으로 확신이 생겼다.
‘여기다.’
이곳은 3층 복도였다. 그리고 건물 곳곳과 이어져 있는 배수로의 특성상, 다른 쪽 배수로에서 목소리를 높여 말하면 이곳에 도달할 즈음에는 하리엔이 들었던 것처럼 섬뜩한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어라?’
뭔가 좀 이상한데. 미간을 좁히고 잠잠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이게 유령이 아니라 인간의 짓이라면…….
‘예?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요.’
그때 하리엔과 같이 있었다는 하녀는 왜 아무것도 못 들은 거지?
……귀가 많이 안 좋은 하녀인가?
‘일단은 정원을 마저 살펴보자.’
그건 당장 고민해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일단 확인할 건 다 확인했으니 여기를 벗어나자. 릭도 다시 데려와야 하고.
나는 신발을 양손에 한 짝씩 쥔 채, 왔을 때처럼 까치발을 들고 재빨리 복도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