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럼 남작은 대체 왜 하리엔한테 그런 거짓말을 한 거람.’
이후 라이넬 남작이 칼리오스에 이어 공작, 제르비스와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 릭이 몇 번 더 그를 향해 말을 걸었으나 남작은 어떤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만약 남작이 유령을 볼 수 있으면서도 그 수많은 말들을 무시한 거라면, 시대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연기자일 것이다. 당장 어느 연극단에서 눈이 벌게져서 스카우트하러 올지도.
“후우움.”
짝짝짝.
남작이 거짓말한 이유를 고민해 보고 있는데, 문득 귓가로 박수 소리가 흘러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헤지우드 자작 부부, 그리고 남작과 하리엔이 각각 손을 맞잡고 무도회장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오늘 무도회 자체가 라이넬 남작의 귀환을 기념하는 것이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무도회가 시작하려나 보다.
나도 일행과 함께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고, 자작 일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잘 추네.’
하리엔이 라이넬 남작과 유려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구경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하리엔도 남작과 키 차이가 상당한데 저렇게 잘 추잖아! 나도 할 수 있다!
‘……물론 남작이 공작보다 머리 두 개는 작긴 한데.’
아무튼…… 연습을 많이 했으니 좀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삼키는 사이 자작 일가의 춤이 끝났다.
그들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무도회장 중앙에서 비켜났고, 사람들은 하나둘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갈까, 테리.」
공작이 손을 내밀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릭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다녀오겠다는 뜻이었다.
<약속 잊지 마요.>
‘알았어, 알았어.’
릭이 재차 당부했다. 눈짓으로 답하며 릭을 잠시 근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릭이 제르비스나 칼리오스한테 안기는 건 싫다고 해서……. 엉덩이가 좀 차갑겠지만 네가 자처한 일이니 잘 견디고 있어라, 곰돌이.
두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릭을 가져가려 하는지만 지켜봐 달라고 한 후, 공작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곳곳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을 최대한 무시하며 그와 양손을 맞잡았다. 공작의 얼굴은 자못 비장했다.
‘엄마, 오늘만큼은 에버딘 제일의 춤꾼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그리고 내 얼굴도 비슷하겠지, 아마. 속으로 열심히 빌고 있으니까.
이윽고 드디어, 음악이 시작되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공작과 움직임을 맞춰 발을 움직였다.
왼발, 오른발. 다시 오른발, 그리고 턴.
빙글.
‘오?’
오늘 뭔가…… 느낌이 좋은데? 공작의 손을 잡고 제자리에서 무사히 한 바퀴를 도는 데 성공하니 드는 생각이었다.
뭔가의 본능! 이대로라면 성공할 것 같다는 촉!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이대로만 한다면……!
뚝.
“어?”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신고 있던 구두의 굽이 부러졌다. 몸이 휘청 기울어졌다.
어린아이용이라 굽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모양새이긴 했지만. 막 몸을 돌리던 차였던지라 균형을 잃기엔 충분했다.
“테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공작이 곧장 붙들어 준 덕에 넘어지는 것은 막았다. 당황해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그가 황급히 손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그의 검지에 자리한 반지에는 보석 대신 학자 조각상에 있던 버튼이 붙어 있었다. 어딘가에 갈 때마다 조각상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편의성을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다.
공작이 반지를 만지자마자 깃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괜찮니? 다친 곳은?」
“없어요. 그런데, 으음. 이 상태로 춤을 추는 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신음을 삼키면서 굽이 부러진 쪽 발목을 요리조리 돌려 보았다. 양발로 바닥을 딛고 바로 서자 양쪽 구두의 높이가 다른 탓에 몸이 우스꽝스럽게 기울어졌다.
‘쓰읍. 어쩌지?’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도회에 참석해서 춤을 한 곡도 채 마무리 짓지 않고 물러나는 건 무례로 취급된다고 들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아닌 척 우리를 의아하게 흘끔대고 있었다. 몇몇은 헤지우드 가문과 특히나 사이가 좋은지 시선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사람이 아프다거나, 그런 사정이 생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에버딘 공작가의 주력 가신인 헤지우드 가문에서 주최한 무도회이다 보니 되도록 말이 나올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초대해 준 하리엔에게도 예의가 아니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구두를 하나 더 챙겨 오는 건데.’
다른 사람한테 빌려 달라고 하면…… 좀 그런가? 발 사이즈가 맞을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볼 때였다. 퍼뜩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공작님, 공작님.”
생각을 떠올린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나처럼 걱정스러운 눈길로 구두를 살피던 공작의 소매를 쭉 잡아당겼다.
공작이 곧장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일부러 한껏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공작님, 이거 베스한테는 비밀이에요.”
「응?」
“구두 굽, 나머지 한쪽도 부러트려 주세요.”
떨어진 굽을 도로 붙일 수 없다면, 남은 굽을 부러트려서 균형을 맞추면 되는 거잖아? 중요한 건 균형을 맞춘다는 거니까.
‘까치발을 들고 균형을 맞추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내 팔다리가 공작처럼 튼튼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공작처럼 체력 단련을 할 바에는 그냥 굽을 부러트리겠어……. 운동 싫어, 으.
공작은 내 말에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였다.
「좋은 생각이네. 그럼 잠깐 여기에 발을 올려 보겠니? 굽이 남아 있는 쪽으로.」
공작이 흰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너무 그의 손을 짓밟는 듯한 모양새가 되지는 않게, 조심스럽게 발을 들어 장갑 위로 올렸다.
똑.
“헐.”
직후. 크게 힘을 준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공작의 손짓 한 번에 남아 있던 굽이 순식간에 부러졌다. 남은 것은 굽이 부러지며 난 경쾌한 소리뿐이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릴 정도로 놀랐는데, 정작 공작은 태연자약했다. 그는 내 발을 다시 조심스레 땅에 내려 주며 물었다.
「어때? 이제는 안 불편하니?」
그 물음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어 보기도 했다. 입가에 절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안 불편하다!’
오히려 조금이나마 굽이 있던 때가 더 불편했던 것처럼 느껴지네. 신이 나서 공작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그럼 마저 출까?」
“네!”
헤헤 웃으며 그와 다시 마주 본 채 손을 잡았다. 우리는 언제 멈춰 섰냐는 듯이 춤을 이어 갔다.
이윽고 바이올린 소리를 마지막으로 춤곡이 끝났다. 양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테리.」
캬, 완벽한 춤이었다.
물론 정말 춤을 잘 추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솜씨였겠지만. 공작과 내게는 이 정도만으로도 큰 발전이었으므로 뿌듯하기만 했다.
거기다가 구두 굽이 부러지는 돌발 상황까지 훌륭하게 넘겼으니까!
의기양양하게 릭을 두었던 테이블 쪽으로 돌아갔다. 테이블 옆에 서 있던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박수를 쳐 주었다.
“멋졌어, 테리.”
“남은 굽도 부러트린다는 발상은 못 했네. 잘 마무리하고 왔어, 공녀.”
제르비스가 엷은 미소를 띤 채 느른히 말했고, 칼리오스가 씨익 웃으며 그 말을 이어받았다.
“엣헴. 에버딘의 후계자라면 응당 이 정도는 해야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화답했다. 입꼬리가 또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을 감추기 위해 얼른 몸을 돌려 릭을 들어 올렸다.
“나 없는 동안 잘 있었어?”
<제가 애도 아니고. 당연히 잘 있었죠.>
“4살이면 애지. 그보다 어때? 나 잘했지!”
빨리 잘했다고 말해! 그런 의미를 가득 담아서 릭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릭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손을 움직여 내 코끝을 톡 건드렸다.
<잘했어요, 정말로.>
“진짜? 날 위한 선의의 거짓말, 뭐 그런 거면 물어 버릴 거야.”
<……또 안 믿네. 그럴 거면 대체 왜 칭찬해 달라고 한 겁니까?>
“헤헹.”
문다는 말은 장난이었고, 뭔가 인정받은 기분이다. 나보다 처세가 능숙한 릭에게 칭찬을 받아서 그런가?
아무튼 해냈다! 그런 고양감에 취해 있을 때였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칼리오스가 슬쩍 곁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가 매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예법에 맞게 상체를 살짝 숙였다.
“이제 굽이 부러질 걱정은 없겠군. 그런 의미에서 한 곡 추지 않겠나, 공녀?”
칼리오스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미처 입술을 떼기도 전에, 제르비스가 끼어들었다. 그는 손에 에클레어가 올라간 접시를 들고 유순하게 눈을 휘었다.
“당장은 피곤하지 않겠어? 여기서 뭐 좀 먹고 쉬다가, 기운이 나면 나랑 춤추자.”
“……다른 이의 춤 신청을 가로채는 게 아메트리스의 예는 아닌 것 같은데.”
“가로챘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네요. 테리가 전하와 춤을 추겠다고 결정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쟤네 또 자기들끼리 싸우네.
아메트리스 후작이 황제와 썩 가까운 신하인 걸 생각하면, 저 두 사람도 미래에 꽤 자주 얼굴을 봐야 할 텐데. 저렇게 사이가 안 좋아도 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단호히 그들의 싸움을 중재했다. 중재라기보다는 매듭을 잘라 버렸다고 해야 맞을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전 춤 더 안 출 거예요. 두 번째 춤을 추기로 약속한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뭐?”
“뭐?”
챙그랑-
그러자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드물게도 경악한 얼굴의 공작이 손에 들고 있던, 딸기 케이크가 꽂힌 포크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공허하게 뒤따랐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격한 그들의 반응에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 뭐여. 왜들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