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런데요.”
“응?”
“음?”
말문을 떼자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아무래도 두 사람보다는 공작님이 훨씬 건강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제 눈에는 둘 다 비슷하게 약해 보여서.”
“…….”
“…….”
“공작님, 손 좀 빌려주세요.”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말이 없길래 공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주저 않고 내 손을 맞잡아 주었다.
음, 어제도 느꼈지만 역시 차원이 다른 이 안정감이란. 애들이 아무리 건강해 봐야 어른에 비하면 종잇장 아니겠어?
나는 공작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 마차에 탔다.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뒤늦게 따라 탔다.
“흠.”
“…….”
“…….”
마차에 탄 공작은 묘하게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를 번갈아 보았다. 맞은편의 두 사람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착각인가?
‘모르겠당.’
상념을 털고, 릭이 사람들 앞이라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는 걸 이용해 그의 귀나 실컷 만지작거렸다. 덕분에 헤지우드 저택에 도착했을 무렵, 마음은 더없이 맑고 차분해졌다.
* * *
헤지우드 저택은 디프린 저택 못지않게 컸고, 또 아름다웠다. 이미 손님 대부분이 도착한 것인지 저택 앞에는 마차가 빼곡히 서 있었다.
저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자작 부부 혹은 하리엔이 미리 당부한 것인지 그 이상으로 놀란 티를 내지는 않으려 애쓰며 제 본분을 다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몇몇은 <투명 신사 이야기>를 읽었는지 호기심 어린 시선마저 보내 왔다.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다가와 악수를 청할 듯한 표정이었다.
무도회장 입구는 저택의 2층에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 왼팔에 릭을 안은 채로 오른손으로는 공작의 손을 꼭 쥐었다. 우리의 앞에는 칼리오스가, 뒤에는 제르비스가 자리했다.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점검하고 난 후. 시종이 문을 열어 주며 크게 외쳤다. 심장이 조금 두근거렸다.
“칼리오스 드 램바드 마인하르트 황태자 전하, 에버딘 공작 일가, 제르비스 아메트리스 후작 영식께서 드십니다!”
문이 열리자 빛이 확 쏟아졌다. 이미 공작저 사람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들었고, 춤 연습을 하며 공작저의 연회장도 들락날락해 봤다.
하지만 막상 제대로 된 활기로 가득한 무도회장의 전경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입이 벌어졌다.
‘와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였다. 공작저의 것보다는 작았지만, 불이 환히 밝혀져 쉼 없이 반짝거리는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선을 조금 내리니 무도회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난간이 눈에 들어왔고, 난간 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공작이 어째서 뭇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염려했는지 절절히 이해해 버렸다.
‘아…….’
이렇듯 차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시선에 둘러싸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다.
아무리 심지가 굳센 사람이라도 수십의 눈이 일제히 저를 향하는 상황에서 태연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몸이 주춤 뒤로 기울었다. 공작과 맞잡은 손에 힘이 덜컥 들어갔다.
그러나 직후. 몸이 별안간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나는 공작의 팔 위에 앉아 있었다.
「테리, 괜찮아.」
공작은 저 밑에서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금빛 눈은 황금으로 이루어진 호수처럼 깊고 잔잔했다.
흰 장갑을 낀 손이 일정한 박자로 등을 두드리자 잇새로 숨이 터져 나왔다. 몰랐는데 내가 숨을 참고 있었구나.
<괜찮습니까?>
품 안의 릭도 걱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긴장으로 잠시 굳어졌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그래, 지금 내 옆엔 공작도 있고 릭도 있다. 내가 뭔가 실수를 해도 내 편부터 들어 줄 것 같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자, 테레지아 에버딘!
“저 이제 괜찮아요.”
공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괜찮아졌으니 이만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이렇게 아기처럼 안겨 있는 건 좀…… 그래. 나는 아기가 아니라 아주 영리하고 어른스럽고 당당한 후계자인걸?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이제 인사하러 가야지.」
하지만 공작은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 이 사람이?
계속 안고 있으면 깨물어서라도 땅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공작은 내게 물리기 전에, 계단을 다 내려간 후 나를 내려놓았다.
“……반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치마를 툭툭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오잉.’
뭐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릭이 말했다.
<아무래도 몇몇 어른들은 공작이 당신을 정말 제대로 된 후계자처럼 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놀란 것 같은데요.>
“허어.”
그러니까, 공작이 나를 친근하게 안아 들지 않았으면 내가 허울뿐인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깔보는 어른들도 있었을 거라는 말이렷다.
‘일부러 그런 건가, 그럼?’
공작을 올려다보자 그가 수줍게 웃었다. 그는 내게 안 보인다고 생각하고 한 행동이겠지만…….
‘노렸네, 노렸어.’
아무리 한번 망할 뻔한 가문이라고는 해도, 역시 공작은 ‘공작’이라는 거지.
픽 웃음을 흘리고 어깨를 쭉 폈다. 후계자로서 질 수 없다!
‘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적어도 절반이랑은 인사하고 간다.’
의지를 불태우던 참에 때마침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하리엔이 다가왔다. 그녀는 자작 부부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였다.
자작 부부가 제각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정중히 예를 갖췄다.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공녀님과 아메트리스 후작 영식도 환영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세브론 헤지우드입니다.”
자작 부인의 인사에 이어 자작이 칼리오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칼리오스는 예의 그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하리엔도 웃으며 인사했다.
“오셨네요, 공녀님.”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인사를 나누며 하리엔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며칠 전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라이넬 남작이 돌아왔다는 소식 덕분인가?
나는 주위 사람들이 우리에게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영애. 라이넬 남작께서는……?”
“아.”
하리엔도 덩달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곧 도착하신다고 했어요. 슬슬 오시지 않을까 하는데…….”
그때 신의 장난처럼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드릭 라이넬 남작께서 드십니다!”
“아, 숙부님이에요!”
하리엔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의 시선이 움직인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아까 내가 서 있던 난간 너머로 들어서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이가 30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는 턱수염이 있음에도 굉장히 선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세드릭, 왔구나.”
“숙부님!”
남작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곧장 자작 부부를 향해 다가왔다. 자작 부부가 그를 반가이 맞이했고, 하리엔은 그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겼다.
“하하. 그래 봤자 잠시 수도에 다녀온 것뿐인데 귀환 기념 무도회라니……. 너무 과합니다, 형님.”
라이넬 남작이 난감하게 웃으며 하리엔을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하리엔이 그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숙부님. 특별한 손님들께서 와 주셨어요. 에버딘 공작님과 공녀님이세요. 저분은 황태자 전하시고요.”
“오.”
남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몸을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세드릭 라이넬입니다. 하리엔이 리벨과 멀린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이렇게 반갑게 소개하는 건 또 처음 보는군요.”
“반갑습니다. 테레지아 에버딘이에요.”
칼리오스처럼 생긋 웃고 그와 악수했다. 내 손을 감싼 그의 손을 빤히 응시했다.
자, 일단 악수할 때 딱히 느껴진 건 없었고. 이제 저 사람이 정말 나처럼 유령을 볼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릭. 지금!’
티 나지 않게 손끝으로 릭의 배를 툭 두드렸다. 그러자 릭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후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라이넬 남작. 제 말이 들립니까?>
긴장해 숨을 죽인 채 라이넬 남작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저, 공녀님? 손을 놓아주시겠습니까?”
“앗, 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라이넬 남작은 고개를 젓더니 고개를 돌려 칼리오스에게도 인사했다. 그러는 동안 릭이 한 번 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세드릭 라이넬 남작. 못 들은 척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어깨 한 번 흠칫할 법한데.
라이넬 남작은 평온한 태도로 칼리오스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슬쩍 릭과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테리. 아무래도…….>
저 사람. 유령을 못 보는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