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으아아악!”
고개를 돌리자 코앞에 소용돌이 문양이 그려진 안경이 있었다.
화들짝 비명을 지르자마자 괴이한 안경이 휙 멀어졌다. 공작이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채 내게서 떨어트려 놓은 것이었다.
공작이 사내를 한 손으로 내던지다시피 하고는 – 저게 돼? - 황급히 내게로 몸을 숙였다. 수려한 얼굴에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괜찮니, 테리?」
“네, 네.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긴 했지만, 사내가 내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닌지라 무탈했다.
내던져진 사내는 가게 구석진 곳에 엎어져 있었다. 공작의 다리 뒤에 숨어서 경계심 서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저…… 누구세요?”
“……가게 주인입니다만.”
“아?”
예상외의 대답에 당황하는 사이. 사내, 아니, 주인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더니 매무새를 툭툭 가다듬었다. 삐뚤어진 안경을 제대로 쓴 그가 방긋 웃었다.
“뭐, 제가 갑작스레 말을 걸긴 했죠. 어쨌든 그게 마음에 드십니까, 아가씨?”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성큼성큼 발을 옮겨 내 등 뒤에 있던 조각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각상 아래 어느 부분을 꾹 누르는 순간.
학자 조각상이 움직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높이 던졌다. 당연히 추락할 거라고 생각한 깃펜은 허공에서 둥실거리며 날아다녔다.
“무슨…….”
유령이 깃든 것도 아니고, 유령이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 혼자 허공으로 떠오르는 물건이라니. 경악으로 입이 헤 벌어졌다.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조각상, 더 정확히는 허공을 팔랑거리며 떠다니는 깃펜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건 말소리를 인식해 글자로 써 주는 마도구입니다. 예전에 하늘에서 떨어지던 걸 운 좋게 얻었죠.”
그의 말에 놀랄 틈도 없이 깃펜이 움직였다. 깃펜 끝에서부터 무지갯빛 글씨가 흘러나와 허공을 수놓았다가, 이내 반짝이며 사라졌다.
「이건 말소리를 인식해 글자로 써주는 마도구입니다. 예전에 하늘에서 떨어지던 걸 운 좋게 얻었죠.」
“마도구라니……. 직접 보는 건 또 처음인데.”
공작이 생소한 듯 중얼거렸다. 나도 정확히 그의 말과 같은 심정이었다.
옛날 옛적에는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한다. ‘라지아’라는 왕국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주술과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마법’이란 걸 부릴 수 있었다.
라지아 왕국의 사람들은 그런 자신들이 다른 인간들과 어울릴 수 없이 고귀한 존재라 생각했고, 결국 마법과 관련한 자료 등을 전부 회수한 뒤 땅덩어리를 띄워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증거로 이따금 하늘에서는 라지아 사람들이 떨어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마도구들이 떨어지곤 했다.
눈앞의 깃펜처럼, 썩 유용하지는 않은 물건들이 대부분인지라 그 가치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마도구를 처음 목격한 충격도 잠시. 깃펜의 능력을 확인하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 깃펜을 쓰면 공작이 밖에 나갈 때 굳이 종이와 펜을 챙겨야 할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
“혹시 저거 공작님 목소리로도 작동되는지 확인해 봐도 돼요?”
* * *
그리고 마침내, 무도회 당일이었다.
“다 됐습니다.”
“고마워요, 베스!”
베스가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고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바닥을 딛고 섰다.
등 뒤에서 빗을 들고 서 있던 미나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쩜……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가씨.」
“에헤헹. 베스 덕분이죠, 뭐.”
최대한 겸손하게 말하려 했으나 또 입꼬리가 멋대로 치켜 올라갔다.
그런가? 나 오늘 좀 예쁜 것 같기도?
거울을 보며 한 바퀴 빙글 몸을 돌렸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치마가 살짝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일전에 디프린 자작가의 다과회에 갈 때는 단정한 스타일의 옷을 입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무도회이다 보니, 베스는 춤을 출 때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움직임이 돋보이는 스타일의 드레스를 들고 왔다.
빗질 덕에 차분하게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양 갈래로 높이 올려서 흰 줄무늬가 들어간 라임색 리본으로 장식하고.
옷도 마찬가지로 흰 줄무늬가 들어간 라임색의 드레스였다. 어깨 부분이 동그랗게 부풀어 있고, 군데군데 리본이 달려 있어 세련되면서도 귀여웠다.
베스가 감격스러운 눈길로 나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사실 이렇게 톡 튀는 색감의 옷은 어울리기가 쉽지 않아서 잘 만들지 않는데, 아가씨께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어울리네요.”
“헤헹헹.”
“덕분에 평소에 쓰지 못했던 색도 써 보게 되어서 즐거웠어요. 이번에도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번에도, 라뇨. 평생 내 곁에 있어 줘요, 베스…….”
“어머…….”
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잊지 않고 미나도 챙겼다.
“미나도요. 꼭이에요.”
「제 기쁨이에요, 아가씨.」
미나가 환히 웃음 짓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그녀가 웃으며 건넨 릭을 양팔로 단단히 끌어안고 밖으로 나갔다.
지난번 다과회 때와 같이, 아무래도 어려 보일수록 처음 보는 상대의 경계를 낮추기에 좋을 테니까.
공작과 칼리오스, 제르비스는 저택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세바스찬의 말을 듣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문득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는 릭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평소였다면 그러다가 입꼬리가 찢어지겠다느니, 하면서 핀잔부터 늘어놨을 녀석인데.
“릭. 나 어때?”
계단 중간에 멈춰 서서 릭을 흔들며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엉뚱한 답이었다.
<테리. 오늘 춤출 거죠?>
“응? 그렇겠지, 아무래도. 연습도 했으니까.”
<그럼 첫 춤은 공작과 출 테고. 두 번째로 춤출 상대는 정했습니까?>
“아니? 딱히…….”
생각해 보니 명색이 무도‘회’인데, 춤을 한 번만 출 리는 없나.
‘그런데 나한테 춤 신청을 할 사람이 있을까?’
으음. 끽해야 제르비스나 칼리오스? 멀린이랑은 아직 친하다고 말할 만한 사이는 아니기도 하고, 약혼녀도 있으니까.
그때 릭이 묘하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저랑 춰요. 두 번째 춤.>
“뭐?”
순간 놀라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이내 파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도회장 중간에서 곰 인형과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내 모습을 상상했더니 웃겨서였다.
뭐,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귀여운 발상이었지만, 곰돌이. 오늘 무도회는 공작님의 사교계 복귀 무대기도 하니까 내가 더 눈에 띄면 안 돼요.”
짜식, 방금은 좀 귀여웠다. 그래도 나랑 춤추고 싶긴 한가 보지?
어쨌든 누군가 내게 먼저 춤추자고 권한 건 처음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릭은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집요했다.
<그럼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요. 공작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첫 춤은 저랑 추는 겁니다.>
“으음.”
<……나는 당신 거니까, 친구보다 훨씬 중요하다면서요.>
조금 불퉁한 중얼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으음, 확실히……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그리고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으니까.’
릭도 거리낌 없이 무도회장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존재였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웃는 얼굴이 어떤지도 알 수 있었을 테고.
‘……언젠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
나는 이기적인 소망을 목구멍 안으로 꾹 삼키고, 대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작님이 아닌 사람과 추는 첫 춤은 너랑.”
<약속한 겁니다.>
“응!”
<이제 가요. 다들 기다린다니까.>
릭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손으로 내 팔을 통통 두드리며 재촉했다. 그게 귀여워서 다시 귀를 우물거리려다가 혼났다. 쳇.
아무튼 릭도 기분이 좋고, 나도 기분이 좋고. 나란히 즐거운 상태로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정문에 서자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내 그림자를 발견한 공작이 가장 먼저 몸을 돌렸다.
「테리, 왔니? 오늘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공작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재킷 주머니에 꽂혀 있던 깃펜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무지개색 글씨를 적어 내렸다.
어제는 글씨 색이 너무 휘황하지 않냐며 난감해하더니, 잘 챙겼군. 아주 훌륭해.
공작은 내가 어제 사 주었던 예복 중 하나를 입고 있었다. 공작의 머리색을 닮은 검은 원단에 금실 자수를 수놓은 것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예복을 보자마자 공작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곧장 가게로 쳐들어갔는데, 공작은 그런 나를 막으려 애썼다.
‘테리. 이미 펜도 선물 받았는데, 거기에 옷까지 선물 받으면 내가 너무 염치없잖니.’
‘에엥, 제가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돈도 많은데!’
‘그래도…….’
‘휴, 어쩔 수 없죠. 정 그러시다면 제리랑 황태자 전하한테 선물할 옷을…….’
‘받을게. 받을 테니까 멈추렴, 테리.’
그렇듯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누가 고른 건지 아주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구먼. 뿌듯함에 히히 웃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도 오늘 멋져요!”
미인은 언제나 옳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공작의 미모를 감상하는 사이.
한발 늦게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린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도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릭도 그렇고, 쟤들도 그렇고. 왜 내 또래들은 다 말이 없는 거지? 조금 심술이 나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예쁘다.”
“예뻐, 공녀.”
그때 조금 멍한 얼굴의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흠칫한 그들이 서로를 짧게 노려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이제 가자. 계단 조심하고.”
“영식은 본인 몸부터 챙기는 게 어떤가?”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멀쩡합니다.”
“그럼 가서 마차 문이나 좀 잡아 주겠나? 멀쩡하다고 하니 그쯤은 일도 아닐 텐데.”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기이하게 날 선 말을 주고받으며 각자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아닌 척하면서 서로를 어깨로 밀쳐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잉, 둘 다 왜 저런담. 내게 뻗어진 두 개의 손을 번갈아 보며 눈을 끔벅이다가 입술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