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테리.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갑작스럽지 않니?」
이미 모자까지 포함해서 멋들어지게 갖춰 입어 놓고 또 저러네. 공작의 방에서 에버딘 저택의 정문까지 오는 동안 저 말을 세 번은 들었다.
스읍. 하는 수 없지. 이렇게 강제로 끌어내고 싶진 않았지만…….
공작이 망설일 때마다 그를 기다리고 격려해 주느라 벌써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이러다가는 시내 입구만 구경하고 돌아오게 생겼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공작의 장갑 낀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아챘다. 반응할 새를 주지 않고 곧장 눕듯이 몸을 쭉 젖혀 그를 끌어당겼다.
“어허. 원래 이렇게 즉흥적인 인생이 더 재미있는 법이라고요! 일단 한 발만 나와 보시면…….”
그러면…… 잠깐, 이 안정감은 뭐지?
분명 뒤로 기울어야 할 몸이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허공에 덜걱 멈춰 섰다.
의아하게 시선을 내리자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공작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입이 작게 벌어졌다.
‘뭐야……?’
물론 키 큰 성인 남성인 공작에 비하면 우스울 수준이긴 하지만. 나 역시 에버딘 저택에 온 후로, 적어도 자작저에 있었을 때보다는 살이 붙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마치 공작저 침대에 버금갈 정도의 흔들림 없는 편안함…….
‘이건 수치다.’
그간 열심히 날 먹였던 주방장과 여타 사용인들의 노력을 모욕하는 일……!
“이이익.”
뭔가 오기가 생겨 공작의 손을 붙든 채 어떻게든 그를 움직이게 하려 바둥거렸다. 그 바람에 릭이 팔을 빠져나가 바닥을 구르며 투덜댔으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다가 다친다니까.」
하지만 결국 내가 다칠까 쩔쩔매던 그의 팔 위로 달랑 올라앉게 되는 결말이었다. 불만스러움에 볼이 절로 부풀었다.
“불공평해…….”
「뭐가?」
“식사 때마다 제가 공작님보다 많이 먹는데, 이렇게까지 꿈쩍도 안 하실 줄이야.”
「무게도 무게지만, 아무래도 근력에서 차이가 날 테니까…….」
공작은 그렇게 말한 후 릭을 주워 들고, 먼지를 툭툭 털어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릭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직 억울함이 다 가신 건 아니었지만, 그 말에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음, 그래. 공작이 새벽마다 기사들이랑 하는 그 훈련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그나저나 내가 한쪽 팔에 올라와 있는데도 글을 잘 쓰네. 나라는 짐을 들고도 한 손으로는 종이를 들고 반대쪽 손으로 펜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신기해 말을 걸었다.
“글씨 쓰는 거, 안 불편하세요?”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아.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익숙해졌단다.」
거, 참. 아무리 그래도 말하는 것보다 편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당신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냥 말로 해도 된다고 밝힐 수도 없고…….
왠지 쓸데없는 고생을 시키는 기분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아! 그렇지.”
눈치를 보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기분 좋은 짤랑 소리에, 입가에 절로 해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제가 좀 더 잘 써지는 펜 사드릴게요. 종이도요! 저 돈 많아요.”
엣헴. 이게 다 자수성가해서 번 돈이라 이 말씀.
어깨를 으쓱이며 돈주머니를 높이 들어 올려 흔들었다. 뿌듯함에 절로 어깨와 콧대가 솟아올랐다.
“……하핫.”
그 모습을 본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이렇게까지 크게 웃는 모습을 처음 봐서 놀란 마음 반, 그 얼굴이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에 놀란 마음 반으로 턱이 떨어졌다.
‘와.’
엄마, 미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엄마가 아니게 된 것 같아…….
나는 입을 헤 벌리고 공작의 웃는 얼굴을 구경했다. 이후로도 몇 번 더 잔웃음을 흘린 그가 따듯한 표정으로 항복하듯이 말했다.
「그래. 같이 가자, 테리.」
* * *
우선 제일 먼저 들린 것은 <투명 신사 이야기>를 판매하고 있는 서점, 그리고 유령 쿠키를 판매하고 있는 제과점이었다.
그동안 레딘, 미하일을 비롯한 기사들이나 미나와 같은 사용인들은 몇 번 나와 동행하며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직접 목격했다지만. 생각해 보니 공작은 그런 적이 없더라고.
원래 백 번 말하는 것보다 몸으로 한 번 체험해 보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당하게 서점의 문을 열어젖혔다.
딸랑-
맑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서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 이쪽으로 향했다.
“어?”
“저기…….”
처음에는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공작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시선을 붙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아.”
미약한 탄식과 함께 공작의 어깨가 미미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내가 그와 맞잡은 손에 꾹 힘을 주자 곧장 움직임을 멈췄다.
금색 눈이 나를 향했다. 그와 시선을 맞추며 응원의 뜻을 담아 싱긋 웃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공작님.”
“…….”
“물론 모든 사람이 공작님을 좋아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적어도 저만큼은 언제까지나 공작님을 좋아할 거예요.”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오블렌 저택의 모두가 나를 외면했을 때도 토미는 내 곁을 지켜 줬다.
아마 토미를 비롯한 유령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나를 향한 악의에 씩씩하게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그러니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오래간만에 ‘따스함’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 공작에게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주고 싶었다.
“…….”
공작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곧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에버딘 공작가 분이시네!”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저, 괜찮으시다면 책에 사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서요!”
다행히 사람들의 반응은 차고 넘칠 정도로 좋았다. 공작은 얼떨떨한 얼굴로 어색하게나마 사람들과 악수를 해 주고, 책에 사인해 주었다.
이후에는 서점을 나서서 제과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공작을 발견한 아이들이 줄줄이 엮은 생선처럼 뒤따르는 탓에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다.
같이 의상실에 들려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라는 말도 해 보고.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판에 나온 거 다 주세요”라는 말도 해 보고…….
……늘어놓다 보니 왠지 공작을 위한 나들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서 나만 실컷 즐긴 것 같은데?
아무튼,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쯤에는 공작의 얼굴도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투명 신사님이다! 안녕!”
한 아이가 지나가다가 공작을 향해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공작은 웃지는 않았지만 다정한 표정으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좋아, 이 정도면 오늘 외출한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겠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중 잊고 있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아, 맞아. 펜이랑 종이!”
이러다가 상점이 닫겠어. 공작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테리, 어디 가니?」
“필기구 상점이요!”
공작의 물음에 대답해 주고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려던 때였다.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릭이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테리.>
“응?”
<저 상점에서 뭔가 신기한 기운이 느껴집니다만.>
가끔 보면 얘는 별걸 다 느끼는 것 같단 말이지. 얘도 어찌 보면 평범한 유령이라고는 할 수 없어서 그런 걸까? 모를 일이었다.
“어디?”
<오른쪽 골목 끝이요.>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상당히 음산해 보이는 골목 안쪽에서 간판 하나가 달랑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 보자. 뭐라고 적혀 있나.
‘트레빈의 신비한 골동품 가게……?’
눈을 가늘게 뜨고 가게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자 미약하게나마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진짜네…….”
<제 말 좀 한 번에 믿어 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합니까?>
“다음부터는 참고할게. 그런데…… 유령인가?”
<유령의 기운이라기엔 좀 결이 다른 듯한 느낌인데요.>
확실히 그렇네. 대체 뭐지?
유령들에게서 곧잘 느껴지는 기운보다는 좀 더 맑고, 그런데 제멋대로인…….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공작의 손을 쭉 잡아당겼다.
“공작님. 잠깐만요.”
「왜 그래?」
“혹시 저 가게 들러 봐도 돼요?”
손가락으로 골동품 가게를 가리켰다. 공작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근처에서 레딘과 미하일을 비롯한 기사들이 호위 중이란다. 나도 옆에 있을 테니 원하는 대로 하렴.」
“헐.”
뭐, 뭐야. 오늘 내내 누가 따라다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데?
무섭다, 에버딘 기사들의 재능…….
감탄일지 두려움일지 모를 감정으로 잠시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필기구 상점에 들를 생각을 하면 시간이 썩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얼른 둘러보고 나와야지.
끼익-
간판과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골동품 가게의 문을 열자 종소리 대신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아무도 안 계세요?”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이렇다 할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릭과 함께 가게 주인, 그리고 아까 느꼈던 기운의 근원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음?”
녹슨 탁상용 조각상 중 하나의 손에 들린 깃펜에 문득 시선이 닿았다. 시선을 내려 조각상의 이름을 읽었다.
“움직이는 학자와 깃펜……?”
“오! 안목이 상당히 높으시군요, 아가씨.”
“히익.”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등 뒤로 불쑥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홱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