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 *
똑똑.
“주인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발레리안의 목소리를 들은 세바스찬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꾸벅 숙인 그가 책상 위에 초대장 한 통을 내려놓았다.
“헤지우드 자작가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라이넬 남작의 귀환을 기념하는 무도회를 연다는군요. 주인님과 아가씨의 앞으로 온 겁니다.”
“무도회라…….”
발레리안은 깃펜을 내려놓고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그는 초대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겼다. 금빛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군.’
지금까지 발레리안은 테레지아가 하는 일을 지지하되 바깥에 직접 나선 적은 없었다. 그것이 행여 에버딘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복귀하겠다는 신호로 여겨져, 황제가 행동할 빌미를 줄까 봐.
하지만 피하고, 수그린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어차피 황제는 언젠가 발레리안을 완전히 없애려 들 것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맞서야 했다. 그는 테레지아 덕분에 뒤늦게나마 그것을 깨달았다.
‘<투명 신사 이야기>가 아직 한창 사람들의 오르내리고 있을 지금이 적기이긴 해.’
사람들이 아직 에버딘 공작가에 호의적일 때, 잃었던 영향력을 되찾아야 했다. 게다가 아이들이 많은 무도회라면 어색해하는 어른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을 열 가능성이 커지니까.
뭇사람들의 눈앞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발레리안의 마음은 무도회에 참석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 세바스찬이 슬쩍 덧붙였다.
“아시겠지만, 아가씨 나이에는 또래 친구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을 만나 보는 것이 좋습니다. 헤지우드 영애가 어린 만큼, 이번 무도회에는 어린 영식과 영애들도 상당수 참석하겠죠.”
“흠.”
“게다가 아가씨께서 지난번 다과회에서도, 크흠. 아주 인기인이셨다고, 크흠흠.”
세바스찬이 모른 척 헛기침을 섞어 중얼거렸다. 하지만 한껏 올라간 광대와 어깨는 숨길 길이 없었다.
발레리안이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거의 뭐 친손녀 대하듯 하는군.’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용인들이 테레지아를 제 자식처럼, 손녀처럼 예뻐하는 것이 기꺼웠다.
어느새 발레리안의 얼굴 역시 세바스찬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졌다. 그가 슬그머니 동의했다.
“하긴. 테리가 좀 귀엽긴 하지.”
“그렇죠, 그렇죠.”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귀여운 건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허허허.”
비록 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는 테레지아는 미나에 이어 이 저택의 실질적 우두머리들까지 이상해졌다는 생각에 암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대화는 착실히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이나 세바스찬과 함께 테레지아의 귀여움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논하던 발레리안이 개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테리가 참석하고 싶다고 하면 참석하는 것으로 하지. 아이의 의사를 물어본 후에 답을 보내 주게.”
“알겠습니다, 주인님.”
테레지아는 세바스찬이 집무실을 나올 듯하자 급하게 발뒤꿈치를 들고 도도도 달려 방으로 돌아왔다.
“잘됐다, 릭. 그치?”
<그러게요. 조금 의외네요.>
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지아는 활짝 웃었다.
공작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걱정했는데. 기우였나 보다!
그렇게 나름 순조롭게 공작과 테레지아의 무도회 참석이 확정되는 듯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문제가 발발하기 전까지는.
* * *
“저…… 공작님?”
유려하게 흐르던 피아노 소리가 뚝 끊겼다.
라바디에 자작 부인이 손을 멈추고 피아노 앞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녀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쪽이 아니라 반대쪽…….”
“……아.”
그 말에 넋을 놓은 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공작이 움찔 정신을 차렸다. 그가 뒤늦게 텅 빈 손을 발견하고 당황해 뒤를 돌았다.
공작이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는 바람에 내 손은 허공에 덩그러니 버려지다시피 되어 있었다. 나는 뚜하게 입술을 내밀고 팔짱을 꼈다. 발을 탁탁 구르며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떼잉, 쯧. 아까부터 대체 몇 번째야?
‘영 정신을 못 차리고 뚝딱거리네…….’
헤지우드 자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하겠다고 선언한 후, 공작은 어딘지 이상해졌다.
명색이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니, 춤 한 곡쯤은 그와 춰야 할 것 같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는데. 키가 안 맞는 것은 둘째 치고 당장 공작부터가 넋을 놓고 있으니 제대로 연습이 진행되질 않았다.
라바디에 부인이 하도 앉았다가 일어났다만 반복하는 통에 무릎 통증을 호소할 정도였다.
‘춤 연습할 때뿐만이 아니야.’
게다가 공작의 기행은 일상생활에까지 이어졌다. 그는 오늘 점심 식사에서도 멍한 얼굴로 빵에 버터를 바르려다가 버터가 담긴 그릇을 나이프로 갈라 버렸다.
‘……저게 잘리는 거였어?’
무의식중에 그런 중얼거림이 새어 나갈 정도로 황당했다. 저거 은제 아니었나…….
공작은 한술 더 떠 반으로 잘린 버터 그릇을 통째로 빵에 올리려 들었다.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른 직후에야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화들짝 놀라더라.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나는 공작의 손을 덥석 붙들고 라바디에 부인을 향해 외쳤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해요!”
“……알겠습니다, 공녀님.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뵐게요.”
라바디에 부인은 내심 내 제안이 기뻤는지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간간이 비틀거리며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짠함이 밀려왔다.
미안해요, 부인. 제가 어떻게든 공작님을 고쳐 볼게요……!
이후 미나와 세바스찬을 비롯한 사람들을 전부 연회장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공작의 소매를 쭉 잡아당겼다.
“공작님, 공작님. 저 저기 올려 주세요.”
“크흠.”
한 손으로 공작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한쪽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켰다. 공작은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오는지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나를 들어 올려 테이블에 걸터앉게 해 주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종이와 펜을 공작의 손에 쥐여 주며 그와 눈을 맞췄다.
“공작님.”
「……미안하다, 테리. 내일부터는 집중할게.」
아직 제대로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찔리는 점이 많은지 공작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다.
가뜩이나 청초한 눈매가 더 붉어졌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불량배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 안 돼! 넘어가면 안 된다!’
기이한 죄책감을 털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 내 손엔 저 미모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달려 있다……!
라바디에 부인의 무릎 건강과 하리엔의 안전! 그로써 한층 가까워질 에버딘의 부흥과 오블렌 자작령 매입의 야망!
음, 좋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공작님이 왜 이러시는지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내일은 없어요. 대체 요 며칠 왜 그러시는 거예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단호하게 추궁하려 했는데 결국 끝에 가서는 미약한 걱정이 섞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혹시 어디 아픈 것이 아닐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고개 좀 숙여 주세요.”
공작을 향해 팔랑팔랑 손짓하자 그가 선선히 고개를 숙여 주었다. 엄마가 하던 것처럼 그의 이마에 이마를 가져다 대고 열을 쟀더니 금색 눈이 놀란 듯 조금 동그래졌다.
‘흠, 열은 없는 거 같은데.’
그럼 대체 이유가 뭐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아픈 건 아니네요. 그럼 왜 그러시는 거예요? 혹시 저랑 무도회…… 가기 싫으신 거예요?”
공작의 속내를 캐내기 위해 일부러 조금 전의 그처럼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몰래 손등을 꼬집어 눈물도 조금 짜냈다.
그러자 공작이 허둥지둥 종이에 깃펜을 휘갈겼다. 글자를 쓰는 수준이 아니라 선을 긋는 수준의 속도였다.
「아니, 그런 건 정말 아니란다.」
“그럼 대체 왜?”
“…….”
공작은 잠시 펜을 멈추고 침묵했다. 나는 그가 할 말을 고르듯 망설이는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의 펜 끝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의 성품을 닮아 반듯한 글씨를 읽어 내렸다.
「그냥…… 무도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 것 아니니.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 나선 게 굉장히 오래전이라, 조금 긴장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테리.」
글을 적는 공작의 얼굴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안 괜찮았구나.’
공작이 워낙 흔쾌하게 무도회 참석을 결정하길래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더니. 본인도 미처 모를 만큼 무의식 깊숙한 곳에 트라우마가 자리한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가 조금 안타까워졌다.
‘……나를 보는 것 같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세계는 넓었다. 자작저 밖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었다. 한쪽에는 엄마의, 한쪽에는 오블렌 자작의 손을 잡고서.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오블렌 자작 일가의 눈을 피해 좁은 다락방 안에 반쯤 갇혀 지내야 했다.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더러운 오물을 보듯 내려다보는 그들의 시선이 무섭고, 싫었으니까.
어쩌면 지금의 공작 역시 그런 게 아닐까.
하루아침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전락해 사람들의 공포와 멸시 섞인 시선을 받아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공작이 이대로 사람들의 눈앞에서 영영 사라진다면, 그것이 바로 황제가 바라는 일일 터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 못된 황제가 좋아하게 내버려 둘쏘냐. 마음을 굳히고 콧바람을 훅 내뿜었다.
“공작님!”
「응?」
“저희 놀러 가요!”
이름하여 사람들 시선에 익숙해지기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