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으랏차! 상쾌하고 멋진 아침!
나는 눈을 반짝 뜨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꿈에서 엄마가 나타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줘서 그런가? 평소보다 몸이 가벼웠다.
“좋은 아침이야, 릭!”
<좋은 아침입니다, 테리.>
협탁에 앉아 있는 릭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그가 순순히 악수해 주었다. 덕분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이어서 미나와 아침 인사를 주고받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간단히 세수를 한 후 침대에서 아침을 먹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크루아상을 한 입 베어 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제 원래 고민하던 문제로 돌아가 볼까.’
내면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외적인 문제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불안에 떨며 주위를 살피던 하리엔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도장처럼 남아 있었다.
‘라이넬 남작이라…….’
고민하다가 침대 커튼을 해먹처럼 쓰고 있던 셀레나를 쳐다보았다.
미나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셀레나. 아리에타 백작 밑에서 일할 때 라이넬 남작에 대해 들은 거 없어요?”
<내가 아는 건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정도뿐이야. 현 헤지우드 자작의 남동생이고, 자작 부부와의 사이는 굉장히 원만하다. 뭐 이런 거?>
“본인이 유령을 볼 줄 안다고 떠들고 다니거나,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애초에 너도 네가 유령을 본다는 걸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잖니. 그자도 그런 걸 수도 있지.>
“흐으으음.”
일단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문제는 없다는 뜻이네. 하리엔도 라이넬 남작을 굉장히 믿고 따르는 것처럼 보였고.
‘하지만 오블렌 자작도 처음에는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었었는걸. 방심하진 말자.’
오블렌 자작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나는 잼을 동그란 빵에 치덕치덕 바르고 그를 물어뜯듯 전투적으로 빵을 베어 물었다.
<그 빵이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니, 테리?>
중간에 레일라가 두려움에 떨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내가 그만큼 훌륭하게 오블렌 자작을 닮은 빵을 해치웠다는 사실에 괜스레 뿌듯해졌다.
아무튼, 빵 하나를 잘근잘근 분쇄해 배 속에 집어넣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포크를 힘주어 쥐며 의지를 다졌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라이넬 남작이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거야.”
그가 정말 나처럼 유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직접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물론 내가 정원에서 하리엔을 만났을 때는 주위에 이렇다 할 유령이 없었지만, 거기는 디프린 자작가였다.
유령이 자신이 평소 머무는 곳에서 멀리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에 유령을 발견하지 못한 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리엔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발생한 건 대부분 헤지우드 자작저 안에서였던 것 같으니.
“그럼 라이넬 남작도 만나 봐야 하고, 헤지우드 저택에도 한번 가 봐야겠는데…….”
하지만 라이넬 남작은 현재 하리엔 주위의 유령을 멸할 방법을 찾겠다며 수도로 간 상황이었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하리엔이 다치기라도 하면……!
똑똑.
그때 별안간 들려온 노크 소리가 최악으로 치닫던 상상을 끊어 놓았다. 순간 놀라 어깨를 파드득 떨었으나 곧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네에, 들어오세요!”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조금 전, 사용인 식당으로 아침 식사를 하러 갔던 미나였다.
이상하다. 아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올 만한 시간이 아닌데?
“미나? 밥은요?”
「아가씨 앞으로 편지가 와서, 잠시 편지를 전해드리러 왔어요. 하리엔 헤지우드 자작 영애께서 보내신 거네요.」
“정말요?”
반가움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재빨리 손을 내밀어 편지를 받아 들려다가 아차, 하고 생각에 잠겼다.
“흠.”
「아가씨?」
미나는 내가 편지를 받아 들려다가 말고 손을 거두어 버리니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사이, 나는 재빨리 쟁반 위의 음식들을 눈으로 훑어보고 그나마 멀쩡한 크루아상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까 한 입 베어 문 바람에 구석에 동그랗게 잇자국이 나 있는 게 민망하긴 하지만…….
“편지 때문에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중간에 자리를 비워야 했던 거죠? 고마워요, 미나. 앗, 혹시 잇자국…… 많이 거슬리면 반으로 뜯어 줄까요……?”
미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응이 없었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한 입 베어 물은 빵을 주는 건 좀 너무했지? 그런 생각에 뒤늦게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빵을 반으로 가르려던 차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소중히 간직할게요.」
미나가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크루아상을 가져갔다. 그 대신 편지 봉투를 건넨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방을 나섰다.
뭔가 이상한데? 닫힌 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물었다.
“……방금 미나가 ‘소중히 간직하겠다’라고 한 거 들은 유령?”
<나.>
<나, 나!>
<저요.>
셀레나, 레일라, 릭이 동시에 대답했다. 거기에 방 안 곳곳을 떠다니던 자루 모양 유령들까지 합세해 끽끽거리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있다가 소란이 진정된 후에야 간신히 손을 내렸다.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먹으라고 준 빵인데 왜 그걸 간직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데, 잠시 바닥에 머리를 집어넣었던 셀레나가 다시 고개를 원위치하며 말했다.
<박제해서 간직하겠다는데?>
“뭐, 뭘?”
<네 잇자국 난 빵…….>
“미친 거 아니야?! 미나, 그만둬욕!”
기겁하며 잠옷 차림으로 침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미나가 내 잇자국이 선명히 찍힌 빵을 다른 사용인들에게 자랑하기 직전에 그녀를 말릴 수 있었다.
……내 하녀가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 * *
본의 아니게 침대 위에 패대기쳤던 하리엔의 편지는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난 후에야 뜯어 볼 수 있었다.
편지의 첫 문장부터 아주 파격적인 소식이 담겨 있었다.
「숙부님께서 돌아오셨어요.」
“헉, 정말로?”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의자를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릭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내 소매를 죽 잡아당겼다.
<테리. 그렇게 일어나 버리면 편지가 안 보입니다.>
“아, 미안.”
선선히 사과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릭과 함께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렸다.
「저도 ‘글로 할 얘기는 아닌 듯하니 만나서 이야기하자’라는 편지만 받아서 아직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부모님께서 숙부님의 귀환을 기뻐하시며 무도회를 열겠다고 하셨으니 곧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죠.
아마 에버딘 공작가로도 초대장이 갈 거예요. 공녀님께서도 참석해 주신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됐네요. 라이넬 남작도 만나 보고, 헤지우드 저택을 살펴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게!”
하늘이 돕는구나! 때마침 도착한 하리엔의 편지에,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리는 듯해 싱글벙글해서 도서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제르비스를 만나고, 약간의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사람이 정식 무도회나 연회에 참석하려면 보호자가 필요해.”
“꼭 그래야 하는 거야? 규모가 크지 않은 무도회라고 했는데.”
“어쨌든 무도회는 무도회니까. 어쩔 수 없지.”
“이럴 수가…….”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고 했다. 내 인생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후후…….
“이런, 젠장!”
<욕은 안 됩니다, 테리.>
“이게 무슨 욕이야! 투정이지! 오블렌 저택에 있던 백 살 먹은 유령도 너보다는 안 깐깐했거든!”
방으로 돌아와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치자 릭이 뒤통수를 통통 때렸다. 그와 침대 위에서 잠시 투닥거리다가 힘이 빠져 누운 채로 생각에 잠겼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잇새로 튀어나왔다.
“……공작님한테 부탁하면 같이 가 주실까?”
아무래도 투명 신사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움을 많이 거두었다고 해도…….
‘다른 공작가 사람들이 나가는 모습은 봤어도, 공작님이 나가는 건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게다가 칼리오스가 방문했을 당시에도 떨고 있었지.
그런 공작님이다 보니 뭇사람들의 앞에 나서야 하는 무도회에 선선히 참석해 주겠다고 할지가 염려되었다.
그렇다고 하리엔을 생각하면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고. 으으.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공작에게 무도회에 참석해도 되는지 정도라도 물어보기로 했다.
어쨌거나 제르비스의 말에 따르면 ‘보호자’라고 했으니까, 꼭 부모 격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믿을 만한 어른이 함께 참석하면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릭과 함께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라? 세바스찬이네?”
공작의 집무실로 이어지는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세바스찬이 간발의 차로 집무실에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거, 초대장 같은데요?>
“아싸.”
릭의 말에 반색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마침 좋은 때에 왔군. 세바스찬이 미리 분위기를 깔아 두면 난 거기에 슬쩍 스푼이나 얹는 거야!
‘적당히 엿듣다가 참석 얘기가 나오면 맞춰서 들어가야지.’
릭을 끌어안은 채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집무실 문 근처까지 접근했다. 그 상태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집무실 문틈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런데…….
“……방음 죽이네.”
하나도 안 들리잖아, 힝.
<그러게. 밖에서는 하나도 안 들린다.>
뒤따라온 셀레나가 문 안으로 고개를 넣었다가 빼며 끄덕거렸다. 그 모양새가 더없이 얄미웠다.
거, 혼자 들으니 좋으쇼? 앙?
그런 눈빛을 담아 셀레나를 노려보자 그녀가 머쓱하게 볼을 긁더니 친절히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