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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46) (46/124)

<46화>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가 너한테 집착하니?”

<……역시 꿈인가?>

“야.”

왜 자꾸 못 들은 척이람. 4살짜리가 벌써 귀가 퇴화하는 건 아닐 테고.

미간을 찡그리고 릭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어깨에 들어차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턱 풀렸다. 이상한 탈력감이 들어 뒤늦게나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 참, 내가 지금 대체 뭔 말을 하는 건지. 됐어, 잊어버려.”

너무 갔다, 너무 갔어.

솔직히 내가 릭이랑 결혼할 것도 아닌데 쟤가 약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나랑 뭔 상관이람?

‘나나 잘해야지.’

일단 오블렌 자작 같은 인간은 절대 싫다. 나는 꼭 적당히 예쁘고, 다정하고, 정중하면서 귀엽고, 나만 바라볼 그런 남자랑 알콩달콩 잘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상념을 털어 내려던 차에 릭이 버럭 소리쳤다.

<……아닙니다!>

“엥?”

뭐, 뭐여. 갑자기 웬 뒷북?

조금 떨떠름한 기색으로 릭을 바라보자 그가 제풀에 놀란 것인지 제자리에서 화들짝 튀어 올랐다.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은 전혀 제게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그런……. 차라리 집착해 줬으면 좋겠는…….>

퍽.

더듬더듬 말을 잇던 릭은 별안간 제 얼굴을 스스로 후려쳤다.

순간 기겁하긴 했지만, 저 정도 기행이야 이제 일상이었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보다 내 관심사는 다른 쪽이었다.

“목소리가 작아서 ‘차라리’ 다음 말을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한 거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습니다.>

“저게 대체 뭔 문장이여…….”

……뭐지? 저 반응으로 짐작하자니, 뭔가 놓쳐선 안 되는 말을 놓친 것 같은데.

‘차라리’ 다음에 올 만한 말이 뭐가 있더라?

‘흐으음.’

고심하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던 때였다.

마찬가지로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릭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침대를 가로지르더니 베개에 얼굴을 박고 푹 쓰러졌다.

“뭐야, 졸려?”

<…….>

“잠들었어?”

<…….>

“릭은 바보 멍청이 곰돌이.”

<…….>

……어랍쇼. 진짜 잠들었나?

나도 그렇긴 하지만, 쟤도 오늘 만만치 않게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침대를 기듯이 움직여 릭의 옆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그의 뒤통수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자 희미하게나마 음산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그냥 유일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라고…….>

“릭?”

<……나도 돕고 싶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리이이익.”

<우윽…….>

두서없는 말들을 우울하게 중얼거리던 릭은 급기야 우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내 말을 하나도 못 듣는 거지?

언제나 차분했던 릭의 저런 태도가 당황스러워 침대 주변에 몰려 있던 유령들과 우왕좌왕하다가, 급한 대로 릭의 귀 한쪽을 입에 합 넣었다.

맛은…… 없었다. 에퉤퉤.

<뭐, 뭐, 뭐 하는 겁니까!>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엎어진 채 넋을 놓고 있던 릭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제야 내가 알던 릭 같아 히히 웃었다.

“어쨌든 네 말은 내가 너를 기분 나쁘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거지?”

양손을 올려 한쪽 귀를 감싸고 있던 릭이 떨떠름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대꾸했다.

<……아마도, 예.>

좋았어, 역시 혼자 앓는 것보다는 이렇게 직접 확인해 보는 게 낫다니까!

디프린 저택에 다녀온 이후 알게 모르게 불편했던 마음이 상쾌해졌다. 빙그레 웃으며 릭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할게. 내가 정말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

“릭?”

얘가 조금 전까진 잘만 대답하다가 갑자기 또 왜 이래? 우리 좋았잖아……!

불안해진 마음에 힐끔거리며 릭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세모꼴로 박음질 된 입은 언제나 웃는 듯한 모양새였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릭은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가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지만요.>

뒤에 또 뭐라고 작게 덧붙여 중얼거린 거 같긴 한데. 별말 아니겠지, 뭐!

불편함이 해소되자 갑자기 릭이 유령 들린 곰 인형이 아니라 평범한 곰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흰 몸체는 설탕처럼 새하얬고, 목에 맨 붉은 리본은 딸기 같았다.

결국 나는 샘솟는 애정을 가누지 못하고 릭에게 달려들었다.

“으이구, 이 귀여운 자식.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이미 맨날 안고 다니면서! 저리 가요!>

“너도 얌전히 안겨 다니잖아! 거참 부끄러움 많은 곰돌이 같으니!”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보다 곰돌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곰 인형이 뛰어 봤자 거기서 거기지.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릭을 끌어안고 한참 침대를 굴러다닌 후 그를 놓아주었다.

툴툴거리는 릭의 옆에서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흰 원피스형 잠옷 중간의 배 부분이 볼록 튀어나왔다.

‘아무튼, 지금 관계 정도는 괜찮다는 거겠지?’

릭이 나를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쁘게 눈을 감았다. 잠들기 직전 릭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것도 같다.

* * *

깊은 밤. 어둑한 방 안에 푸르스름한 달빛이 차올랐다.

색색.

고른 숨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테레지아는 이따금 도로롱, 하고 작게 코 고는 소리를 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불 속에 파묻힌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면, 대화 상대를 잃은 유령들은 저택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지루함을 달랬다. 그렇기에 지금 방 안에는 테레지아와 릭, 둘 뿐이었다.

<…….>

곰 인형, 릭은 그런 테레지아의 머리맡에 앉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형인지라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그의 속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못생긴 얼굴.>

릭이 심술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고는 솜뭉치 같은 손으로 테레지아의 코끝을 꾹 밀어 올렸다. 그녀가 깨어 있었다면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결코 하지 못했을 말과 행동이었다.

“우웅.”

테레지아가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그 모습이 우스우리만치 귀여웠다.

그래, 귀여워 보였다. 작고 앙증맞던 코가 위로 치켜 올라간 꼴이 웃길 법도 한데 그저 예뻐 보였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내가 너한테 집착하니?’

그 물음을 들었을 때. 릭은 하마터면 차라리 당신이 제게 집착해 줬으면 좋겠다는 답을 내뱉을 뻔했다.

그것은 그가 머리로 답변을 정리하기도 전에 마음에서부터 튀어 나간 말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껏 ‘혹시’, ‘설마’ 하던 순간은 많았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이 테레지아에게 바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깨달은 적은 처음이었다.

릭은 테레지아에게 소중한, 그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건 그냥 유일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라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즉시 릭은 제 마음을 부정하려 애썼다.

테레지아는 현재 릭과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온전한 유령도, 온전한 인간도 아닌 그에게 유일하게 서슴없이 온기를 나누어 주고 그를 ‘릭’으로 존재하게 하는 이였다.

그러니 그런 행동으로부터 비롯된 고마움을 착각한 것일 터다. 릭은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하지 말게. 나는 어디까지나 내 친우들을 따라온 것일 뿐이니까.’

디프린 자작가의 다과회에서, 테레지아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도록 능숙하게 돕던 칼리오스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테레지아의 옆에 서 있는 것이 칼리오스가 아니라 나여야 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칼리오스와 제르비스가 테레지아를 바라보는, 아직은 미약한 온기만을 띠고 있는 시선이 거슬렸다. 그들이 자꾸만 그녀와 거리를 좁히려 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테레지아가 말했던 ‘집착’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욱씬.

마음 한구석이 그의 생각을 반영하듯 아파 왔다. 잠은 테레지아의 얼굴 위로 아까 보았던 미소가 겹쳐졌다.

‘내가 정말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릭은 끝내 씁쓸하게 자조했다. 테레지아의 코를 괴롭히던 손을 거둔 그가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넘겨 주었다.

본인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자그마한 속삭임이 덧없이 스러졌다.

<……당신이 말하는 ‘좋아한다’라는 감정은 아마 나와 다르겠죠.>

“…….”

<알고 있습니다, 나도.>

그 말을 끝으로, 릭은 잠든 테레지아의 머리맡을 묵묵히 지켰다.

창밖이 환히 밝아질 때까지, 이따금 장난기 넘치는 유령들이 그녀를 깨우려 드는 것을 방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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