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는 하리엔의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유령이라곤 없었다. 흔히 보이는 자루 모양 유령조차도.
“없…… 는데요?”
“정말 없나요? 하나도요?”
헛.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을 수습했다.
“물론 제가 유령을 볼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저택에서 이따금 느껴지던 기운 같은 건 안 느껴지네요.”
“그런가요…….”
다행히 하리엔은 선선히 내 말을 믿는 듯 보였다.
유령이 없다고 단언하자 그녀 몸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십년감수했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팔꿈치로 릭을 툭 건드렸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정말 없습니다. 솔직히 에버딘령의 유령들은 전부 에버딘 저택에 몰려 있을걸요.>
음, 가신들의 저택도 다 에버딘령에 있다고 했으니까 맞는 말이로군.
나는 저택을 돌아다니던 온갖 유령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고, 하리엔은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인지라 그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헤지우드 가문도 위태로워진다.
그럼 에버딘 가문도 그 영향을 피해 갈 수 없으니, 무슨 일인지 알아는 봐야겠어.
나는 아까 보았을 때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차분해진 하리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헤지우드 영애.”
“네, 말씀하세요.”
“이런 말은 조금 조심스럽지만, 혹시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하셨나요?”
내 말에 하리엔이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이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괴롭게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 목소리는 무작정 자신에게 죄가 없다 주장하는 –예를 들면 오블렌 자작 같은- 이들과는 달랐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불안을 갈무리한 하리엔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의젓해 보였다.
하리엔의 불안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이 물음에 대해서 가장 오래 고민한 것 역시 그녀겠지.
나는 하리엔이 누군가를 해치지 않았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왜 영애께 원한을 가진 유령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디프린 영애와 벡타 영식도 많이 걱정하고 있던데.”
그 말에 하리엔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이윽고 무언가 결심한 눈의 그녀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제 주변에도 영애와 비슷한 분이 계세요.”
“옉?”
“네?”
씁, 혀 깨물었다.
“노, 놀라서 그만. 계속하세요. 그분과는 어쩌다가 만나게 되신 건데요?”
나는 당황을 갈무리하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하리엔이 어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처음 이상한 일이 생긴 건 몇 달 전이었어요.”
* * *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하리엔은 일찌감치 일어나서 단정히 채비를 마치고 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드리러 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은 하녀 한 사람과 그녀뿐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죽여 버릴 거야…….”
“……!”
하리엔은 순간 뒷덜미가 오싹해질 정도로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멈춰 섰다.
하녀가 놀라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바, 방금 그 소리 못 들었어? 누가 ‘죽여 버릴 거야’라고…….”
“예?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요.”
“……그래?”
착각인가. 무언가 찜찜했지만 하리엔은 기우겠거니 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가 복도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반드시!”
“꺄아악!”
하리엔은 결국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희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하녀에게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들려? 방금 또 목소리가!”
“저, 저는 못 들었습니다만…….”
하녀는 이제 이 아가씨가 어딘가 아픈 것이 아닌지 걱정되는 눈치였다.
하리엔은 필사적으로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후계자인 자신이 광증이라도 앓는다는 소문이 돌면 큰일이었다.
“아니야. 이만 가자.”
하리엔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그날 이후 그 복도를 지나는 것을 은근히 피했다. 하지만 다른 곳을 통해 다닐 때도 불쑥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점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서 목소리가 들려올지 모르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 주일가량이 지났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사라졌다.
하리엔은 드디어 이 기이한 현상이 끝나는가 싶어 안심했다.
하지만 며칠 후. 그녀가 정원을 지날 때 갑작스럽게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졌다.
“아가씨!”
기겁한 하녀가 그녀를 밀치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안 끝났구나.’
하리엔은 사색이 된 얼굴로 깨진 화분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 일로 인해 헤지우드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그녀의 부모가 손수 나서 화분을 떨어트린 부주의한 사용인을 찾아내려 했으나 그 자리에는 하리엔과 하녀를 제외한 누구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위험은 점점 잦아졌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또다시 들리기 시작했고, 하리엔의 목숨을 노리는 일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그때마다 다치는 것은 그녀가 아닌, 그녀를 구하려던 주변인들이었다. 그 점이 그녀를 가장 불안에 떨게 했다.
그때 즈음 그녀의 숙부, 라이넬 남작이 저택을 방문했다.
“하리,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는 하나뿐인 조카가 불안해한다는 소식에 하리엔의 방부터 찾았다.
하리엔은 라이넬 남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숙부님…….”
“하리? 왜 우는 게야. 울지만 말고 말을 해 보렴.”
“숙부님, 숙부님마저 다치시면 저는…….”
사용인들에게는 늘 건실한 후계자로 보여야 하기에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제 얘기를 들으면 딸이 광증을 앓고 있다고 해도 무작정 감싸 주려 할 사람들이었다.
외려 그렇기에 차마 부모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 방문한 라이넬 남작을 보자 그간 쌓인 감정이 와락 치받아 눈물이 터졌다.
늘 친부모만큼이나 제게 다정했던 그를 보자 하리엔은 끝내 무너져 아이처럼 엉엉 울며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예상처럼 라이넬 남작은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하리, 우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던 곳에 한번 가 보자꾸나.”
하리엔은 불안해했으나 그 말에 따랐다.
하리엔과 함께 문제의 복도, 정원 등 저택의 곳곳을 살펴보고 방으로 돌아온 라이넬 남작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리,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네게만 알려 주는 비밀이란다. 절대로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하리엔은 긴장했다. 늘 상냥한 웃음이 어려 있던 숙부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윽고 그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유령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네?”
“아무래도 이 저택에 네게 원한을 가진 유령이 있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유령이라니.
하지만 당장 에버딘 공작가가 모르티아 일족의 저주로 인해 유령이 되어 버렸고, 라이넬 남작은 이런 일로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우선 내가 그 유령을 멸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마.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있거라.”
라이넬 남작은 수도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헤지우드 저택을 떠났다.
하리엔은 그 말만을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후계자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어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는 와중에도 위협은 이어졌다.
결국 멀린과 리벨까지 그녀의 위화감을 느끼고 그녀를 추궁했다.
“안 돼, 보고 있을 거야.”
하리엔은 멀린의 추궁에 희게 질려 그렇게 중얼댔다.
유령은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노렸고, 그에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주변인들이었다.
나 때문에 너희까지 다치게 할 순 없어.
하리엔은 그런 마음으로 최대한 친구들을 피하고, 그들의 말을 묵살했다.
하지만 라이넬 남작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남작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바깥 행사를 줄이겠다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참석한 다과회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헤지우드 영애?”
유령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테레지아 에버딘을.
* * *
‘제 숙부님의 일은 비밀로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리엔은 유령 공작가의 일원인 나를 보자 안심이 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털어놓은 것이라며, 그렇게 부탁했다.
나는 우선 문제의 헤지우드 저택에 초대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디프린 자작가의 다과회에서 돌아왔다.
“흐음.”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침대 위에서 옆으로 한 바퀴 데굴 굴렀다.
그에 릭이 엉금엉금 다가와 다시 내 옆자리에 붙어 앉으며 물었다.
<헤지우드 영애의 일 때문에 그럽니까?>
“……응.”
더 솔직히 말하자면 라이넬 남작이라는 사람 때문에 심란한 거지만.
“그 사람도 정말 모르티아 일족의 후예인 걸까?”
내 중얼거림을 끝으로 잠시간 침묵하던 릭이 답했다.
<글쎄요.>
“무슨 대답이 그래. 바보 곰돌이.”
<저라고 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릭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에 낮에 디프린 자작가에서 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경쟁심…….’
그 단어를 떠올리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혹시 나…… 릭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우월감에 알게 모르게 취해 있었던 걸까?
이게 바로 토미가 읽어 줬던 소설에 나왔던 비틀린 집착이라는 건가!
‘으으.’
아오, 모르겠다!
죄책감에 팔다리를 퍼덕이다가 결국 몸을 벌떡 일으켰다.
릭의 앞에 정좌한 후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릭.”
<뭐, 뭡니까, 무섭게.>
“솔직히 대답해 줘.”
<그러니까 뭘…….>
“혹시 내가…… 너한테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져?”
<쿨럭.>
릭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당황해 기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