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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44) (44/124)

<44화>

* * *

리벨은 한동안 제르비스와 투닥거리더니,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듯 다른 아이들을 소개해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버딘 공녀님.”

“반가워요.”

귀족가의 자제라서 표정을 숨기는 게 능숙한 건지 뭔지. 아이들은 대체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방긋 미소로 화답하며 그들을 티 나지 않게 살폈다.

‘어디 보자. 디프린 영애는 만나 봤고.’

세바스찬이 언급했던, 벡타와 헤지우드 가문의 자제 둘도 여기 있을 텐데 말이지.

“야, 제리!”

그때, 이리저리 뻗친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뒤에서 제르비스의 목을 와락 휘감았다.

“떨어져…….”

제르비스는 놀라지도 않고 질색했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소년의 얼굴을 밀어냈다.

소년은 입을 비죽이며 제르비스를 옥죄던 팔을 풀어 줬다.

“하여간 성격은 여전히 나쁘네.”

“너만 하겠어.”

“손님께 인사부터 해야지.”

리벨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소년을 가볍게 타박했다.

그러자 아, 하고 탄성 같은 소리를 낸 소년이 빙글 몸을 돌려 내게 예를 갖췄다.

빙긋 웃는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엿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버딘 공녀님. 멀린 벡타라고 해요. 아, 그런데 혹시 말 편하게 해도 되나요? 이렇게 격식 차리는 건 영 몸에 안 맞아서.”

“멀린!”

멀린의 말에 리벨이 기겁하며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녀는 눈썹을 누그러트린 채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약혼자가 좀…… 많이 무례하죠.”

그 말에 놀라 품위조차 잊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반문했다.

“헉, 약혼자요?”

“네. 안타깝게도 부모님들께서 너무 친하셔서요.”

“누가 들으면 네가 나 안 좋아하는 줄 알겠다.”

“시끄러워.”

멀린이 장난스러운 태도로 놀리자 그녀는 볼을 살짝 붉힌 채 그를 타박했다.

왠지 모르게 간질간질한 두 사람의 분위기에 내 볼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일전에 아메트리스 후작이 나와 제르비스를 두고 결혼 등의 얘기를 꺼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장난이었기에 나도 한 귀로 듣고 흘렸었다.

하지만 리벨과 멀린은 진짜 약혼!

내가 알기로는 둘 다 나랑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날 텐데!

‘옴마야…….’

나는 양손으로 릭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흥분해 속삭였다.

“들었어, 릭? 약혼자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럽니까. 귀족가의 자제들은 보통 일찍이 약혼하니까요. 그리 드문 일도 아닐걸요.>

“그런가…….”

리벨과 멀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흰 뒤통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데 얘는 이런 일에 되게 익숙해 보이네.’

계속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모를까, 한번 의식을 시작하고 나니 어쩐지 싱숭생숭했다.

전에 했던, 릭이 살아생전에는 귀족가의 도련님이었을 것 같다는 추측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릭도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결혼은 가문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고, 사랑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고…… 뭐 그런.’

그럼 릭도 약혼녀가 있었으려나?

만약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스치듯 떠오른 궁금증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릭의 약혼녀를 상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을 모르니 그 곁에 설 사람 역시 쉽사리 상상할 수가 없었다.

‘……? 왠지 속이 안 좋은데.’

그때 이유를 알 수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헉, 아니면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의 신경전 탓에 결국 위장이 파업을 선언한 건가?!

치료비 내놔라, 이것들아…….

제르비스와 칼리오스 쪽을 노려보며 아르릉거리자 릭이 질색한 목소리를 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는 겁니까?>

“네 약혼녀 생각…….”

<예?>

헉.

나는 무의식중에 대답을 흘렸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미, 미쳤나 봐. 잘못하면 오해 살 뻔했잖아?

누가 보면 내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약혼녀한테 경쟁심을 느낀 줄 알겠…….

“어?”

<……테리?>

“엥?”

<뭡니까, 대체?>

“어, 어…….”

릭이 재차 추궁했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바보 같은 버벅거림뿐이었다.

나 방금 좀 이상한 생각 하지 않았나? 아닌가? 뭐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을 몰아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내젓는데, 멀린 벡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놀란 나머지 순간 어깨가 파드득 튀어 올랐다.

‘봐, 봤나?’

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고 있던 것인지 몰라 긴장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눈은 그 나이대의 어린이가 가질 법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를 관찰하는 듯 보이던 멀린이 돌연 말을 붙여 왔다.

“그러고 보니 공녀님.”

“네?”

“그…… 진짜 있어요? 유령이라는 거요.”

멀린은 마지막 말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댔다.

‘으음. 딱히 공격할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내가 에버딘 공작가의 후계자고, 유령 저택이라 불리는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보니 궁금한 걸까?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리벨은 조용히 손을 치켜들었다.

그에 지레 겁먹은 멀린이 움찔하며 조용히 항의했다.

“아니, 나도 원래는 유령 같은 거 안 믿었다고! 그런데 공작가의 일도 그렇고, 하리엔도 저렇게 됐으니까…….”

“하리엔?”

하리엔이라면, 유력가 중 하나인 헤지우드 가문의 후계자 아닌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자, 멀린과 리벨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들은 작게 한숨을 삼키고는 티 나지 않게 가제보 한쪽 구석을 눈짓했다.

수풀과 다른 아이들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내가 보고로 접했던 하리엔 헤지우드의 외모와 정확히 일치하는 생김새였다.

그런데…….

‘얼굴이 왜 저렇게 안 좋아 보이지?’

분명 세바스찬이 보여 준 보고서에서는 몸에 큰 이상 없이 건강함, 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하지만 하리엔 헤지우드는 먼 거리에서 보아도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창백한 안색이었다.

거기에 더해 찻잔을 쥔 손은 눈에 띄게 덜덜 떨려 찻물이 넘쳐흘렀고, 무언가를 무서워하듯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리벨이 시선을 돌리며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계속 저러더라고요. 말을 걸어도 화들짝 놀라면서 자리를 피해 버려서…….”

“그래도 나름 소꿉친구인데 말이죠.”

멀린은 툴툴거렸으나 걱정의 기색이 여실해 보였다.

“그러다가 한 번은 아예 붙잡고서 물어봤거든요. 대체 왜 그러는 건지. 그랬더니…….”

그가 조금 전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 돼, 보고 있을 거야’라면서 도망가더군요. 그 복도에는 분명 우리밖에 없었는데.”

푸른 눈이 나를 또렷이 직시했다.

“꼭 유령이라도 있는 것처럼요.”

아, 그래서 나한테 유령이 실존하는지 물어본 거였구나.

저주를 받은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는 껄끄럽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친구가 걱정되고.

아무래도 나는 잡음 없이 공작가에 녹아들어 생활하는 편이니, 뭔가 알고 있나 싶었겠지.

‘흠.’

하지만 나는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드러낼 생각이 없는데.

사실 아메트리스 후작에게 그 사실을 말한 것도 내 딴에는 엄청난 일이었다.

아메트리스 후작이야 자식의 목숨을 구원받은 부모의 입장이니 그렇다 쳐도.

이런 어린아이들에게 섣불리 내 비밀을 드러냈다가 곤란해질 상황이 생기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여기서 모른 척 넘어가도 리벨, 멀린이랑은 적당히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비밀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하리엔 헤지우드까지 챙겨야 할 필요가 있나?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중, 문득 리벨과 멀린을 말없이 토닥이는 제르비스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창백한 하리엔의 모습이 보였다.

제르비스도, 내가 후작저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내 곁에서 웃고 있지는 못했겠지.

‘이씨.’

나는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턱에 주름이 잡히도록 얼굴을 구겼다. 릭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탄했다.

“난 너무 착해서 탈이야…….”

<……어디 아픈 겁니까?>

“됐어. 너랑 말 안 해. 칼 같은 곰돌이 같으니.”

그래,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도 도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친해지면 입지를 다지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가신의 어려움을 살피는 것도 훌륭한 후계자의 의무인 거지…… 그런 거겠지?

나는 결국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하리엔과 인사를 나누고 오겠다며 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헤지우드 영애?”

리벨이 말했던 것처럼, 하리엔은 내가 말을 걸자마자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사시나무 떨듯 떨더니 곧장 도망가려는 것처럼 굴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앉히며 속삭였다.

“나는 테레지아 에버딘이에요.”

“……!”

그 말을 들은 하리엔의 몸에서 떨림이 뚝 멎었다. 검은 눈이 놀란 듯 크게 떠졌다.

진짜 뭐가 있긴 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리엔의 옆자리에 앉았다.

입안으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영애. 우리가 초면이라 조금 그렇긴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공녀님께서는…… 보이시나요?”

그때 하리엔이 내 손을 덥석 붙들더니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나는 일순 그녀가 내 비밀을 알아챈 줄 알고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하여간 멀린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이상하게 감이 좋네.

“저, 제, 제 주위에…….”

두려운 눈길로 주위를 살피던 그녀가 끝내 눈물이 고인 눈으로 물었다.

“제게 원한을 가진 유령이 있는 게 느껴져요.”

“……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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