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43) (43/124)

<43화>

“이제 좀 얌전히 있어. 곧 미나가 올 거란 말이야.”

<하지만->

똑똑.

릭이 불만스럽게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에. 들어오세요!”

나는 재빨리 릭을 협탁 위에 뒤돌아 앉혀 두고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릭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방문이 열리고 미나가 들어왔다. 그녀의 곁에는 ‘문 아틀리에’의 주인인 베스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반가워요, 베스.”

라바디에 부인에게 배웠던 대로 옷자락을 잡고 얌전히 인사하자 베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곧 전투를 앞둔 기사처럼 결연해졌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요.”

“어머.”

레딘이 자주 하던 것처럼 한쪽 눈을 찡긋하며 정정해 주자 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좋아.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 같은 디자이너 미리 찜해 놓기의 첫 번째 단계는 성공한 것 같군.

한편, 미나는 내 행동을 보더니 “으르블트긍……. 으긋스흔트 믈 그르츤 그으으…….”하고 누군가를 향해 이를 갈았다.

‘……레딘이 또 뭘 잘못했나?’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화장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오전 내내 미나가 나를 빨래 빨 듯 씻겨 놓은 터라 볼이 반질반질했다.

베스가 내 뒤로 다가와 부드러워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며 물었다.

“달리 원하는 분위기나 색이 있으신가요?”

오늘은 디프린 자작가에서 열리는 다과회에 참석하는 날이었다.

내가 ‘테레지아 에버딘’으로서 공식적으로 나서는 첫 일정.

그러지 않으려 해도 긴장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절대 얕보이면 안 돼.’

나는 결연하게 숨을 고른 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한 얼굴로 입을 뗐다.

“어른스럽게요.”

“풉.”

“…….”

“…….”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거울 속 베스를 노려보자 그녀가 황급히 헛기침하며 빗을 찾아 쥐었다.

나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후계자답게.”

“큼. 알겠습니다.”

좋았어. 이내 부드럽게 머리카락과 옷을 매만지는 손길에 몸을 맡기며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미나와 베스의 지시에 따라서 일어났다가, 옷을 갈아입었다가, 다시 의자에 앉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다 되셨습니다.”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아가씨. 불편하실 것 같아서 얼굴에는 아무것도 안 칠했어요.”

베스와 미나가 마침내 내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나는 전문적인 손길에 취해 꾸벅꾸벅 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코앞의 거울에 시선을 둔 순간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와.”

사실 베스가 선택한 옷은 내가 바랐던 ‘어른스럽고 착실한 후계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옷이었다.

옅은 산호색을 띤 치마에 산호색의 넓은 카라가 붙은 흰 블라우스.

치마 색과 맞춘 듯한 산호색 구두와 모자, 거기에 아래로 나누어 묶은 머리카락.

전체적으로 내 또래들이 흔히 입을 법한 옷이었으나, 또 묘하게 마냥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신기해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 보자 베스가 차분히 설명했다.

“오늘 참석하시는 것이 디프린 자작가에서 열리는 어린 영애와 영식들의 다과회라 하셨지요?”

“네.”

“공녀님께서 제게 보여 주시는 호의를 믿고 말씀드리자면, 사실 에버딘 공작가는 아직 대중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투명 신사 이야기’ 덕분에 여론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모두가 에버딘 공작님을 투명 신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투명 신사 이야기를 출간한 후, 책을 읽은 대부분은 에버딘 공작을 투명 신사에 투영해 유령에 대한 공포심을 누그러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세바스찬과 제르비스를 통해 디프린 자작가와 다과회에 참석하는 아이들의 정보를 미리 조사해 두긴 했지만, 거기에 개인적인 취향과 생각까지 나와 있지는 않았다.

그 아이들이 ‘유령 공작가’의 일원인 나를 쉽사리 받아들일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친해질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에서 거리감부터 조성하는 것은 좋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질감만 북돋을 뿐이니까요. 차라리…….”

“그러니까, 일종의 보호색이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베스는 내가 자신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것에 놀랐는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요컨대 베스가 하는 말은 이거다.

얕보이는 게 무조건 나쁜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경계심 많은 무리에 접근할 때는 얕보이는 것이 잘 먹힌다.

그러니 어른을 어설프게 흉내 낸 무거운 의상보다는, 나이대에 맞는 가볍고 산뜻한 의상을 입어 동질감을 형성하자!

백 점 만점에 천 점을 줘도 손색이 없는 생각이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다니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베스의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고마워요, 베스. 잘하고 올게요.”

그러자 눈을 크게 떴던 베스가 이내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공녀님.”

좋아, 꼬셨다.

나는 좋은 인재를 한 명 더 구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근처에서 떠다니던 자루 모양 유령이 흠칫 떠는 모습이 보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 * *

원래는 어른스러운 후계자답게 릭을 저택에 두고 가려 했으나, 베스의 말을 들으니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양팔로 릭을 껴안은 채 당당히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많은 이들이 도착한 것인지 디프린 저택 앞에는 빈 마차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일국의 황태자라는 분이 어째 요양 중인 저보다도 한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는 영식이야말로 뺨에 도는 혈색이나 감추고 요양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게 어떤가?”

쟤네는 또 저러네.

등 뒤로 제르비스와 황태자가 옥신각신하는 대화가 들렸다.

사실 황태자는 와 봤자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될 것이다. 본인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테고.

그런데도 자신이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이 다과회의 격이 올라간다는 이유를 대며 부득불 따라오더라니 결국 또 싸우는군.

나는 릭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푹 내쉬고 중얼거렸다.

“저 둘은 대체 왜 자꾸 내 보호자 역할을 하려 드는 거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다만, 좀 과해.”

<맞습니다. 엄연히 제가 있는데 다른 보호자라니, 안 될 말이죠.>

“……옴매. 여기 스파이가 하나 더 있었네.”

적은 가까이에 있다더니. 릭은 저 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팔자야.’

또다시 으르렁대는 제르비스와 황태자를 이끌고 정문을 넘어서니 사용인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오늘은 햇살이 쨍쨍하지만 바람이 솔솔 부는 좋은 날이었다.

사용인은 푸릇푸릇한 정원 한쪽에 있는 가제보로 우리를 안내하고 물러났다.

“아, 왔…….”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아마도 디프린 영애로 보이는 소녀가 반갑게 몸을 일으키다가 말고 굳어졌다.

다른 아이들 또한 내 등 뒤로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을 했다.

제르비스는 이미 이 모임에 속해 있으니 그를 보고 이렇게 놀랄 리는 없고.

그러면 남은 건 한 사람뿐이지.

‘이럴 줄 알았다고.’

속으로 이마를 짚고 한탄해 보아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칼리오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태어났을 때부터 한 나라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교육받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드러내듯, 그는 저 때문에 싸해진 분위기를 일절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태연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나는 이런 근사한 곳에 초대장도 없이 쳐들어올 만큼 무뢰한은 아니라오.”

칼리오스가 짐짓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하며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와 몸짓에는 어딘지 사람의 긴장을 풀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기실 저 동화책 속 왕자님 같은 외양 탓이 커 보이긴 했지만, 저런 태도는 배워 두면 좋을 듯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후계자’라는 지위로서는 내 선배 격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칼리오스의 태도를 열심히 곁눈질하는 사이,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디프린 영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다가와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리벨 디프린입니다, 황태자 전하. 이런 곳까지 걸음 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너무 긴장하지 말게. 나는 어디까지나 내 친우들을 따라온 것일 뿐이니까.”

칼리오스는 그리 말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행동 덕에 아이들의 시선은 나와 제르비스를 향했다.

‘칼리오스 1점.’

치고 빠질 때를 아는 칼리오스 덕에 크렘위든 제국의 미래가 환하다!

나는 마음속 ‘테레지아 명예 보호자’ 점수판에 조용히 체크한 후 싱긋 웃었다.

이어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가 편 후 초대장을 내밀며 살갑게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프린 영애. 테레지아 에버딘이에요.”

디프린 자작 영애, 리벨 디프린은 나를 떠보기 위해 초대장을 보낸 사람치고는 굉장히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녀였다.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놀란 마음이 가신 것인지, 이내 미소를 되찾은 그녀가 내게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에버딘 공녀님. 리벨 디프린입니다.”

“제가 이런 자리에 참석해 본 적이 없는지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제리를 따라와 버렸네요. 혹 실례가 되지는 않았을까요?”

“어머, 그럴 리가요! 사실 공녀님께서 와 주시지 않았다면 아메트리스 영식은 제 초대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걸요.”

리벨은 새침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저렇게 솔직한 태도를 보일 정도면 꽤 친한 편 아닌가?

의아함에 제르비스를 돌아보자 그가 칼리오스를 볼 때처럼 시큰둥한 얼굴로 리벨에게 답했다.

“귀찮아.”

“저게 진짜. 야, 너 말 다 했어?”

“다 했는데.”

“아오, 저런 것도 친구라고.”

음, 친구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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