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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42) (42/124)

<42화>

크렘위든 제국의 사교 시즌은 3월 둘째 주에 있는 데뷔탕트부터 7월 말까지 이어진다.

사교 시즌에는 대개 데뷔탕트를 치른, 성인들을 위주로 교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어느 정도 번듯한 귀족가의 아이들이 데뷔탕트 전에 작은 다과회나 연주회 등에서 서로 친분을 쌓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8월의 한중간, 여름.

사교 시즌이 모두 마무리되고 어느 정도 파벌과 친목이 형성되었을 법한 시기였다.

‘투명 신사 이야기’로 에버딘 공작가가 재력과 명성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고는 하나, 사교계는 또 다른 전쟁터.

이미 형성된 파벌에 끼는 것이 새로운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디프린 영애의 다과회처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상당히 이름 있는 가문 자제들의 모임이라면 더더욱 중간에 끼기 어려웠고.

하지만 지금 내 옆엔 제르비스가 있지!

나는 흐뭇한 마음에 손을 뻗어 제르비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덕분에 저쪽에도 불편함을 주지 않고 끼어들 수 있게 됐네. 역시 그때 아메트리스 후작령까지 직접 가 보길 잘했다니까.’

그러니까, 디프린 영애가 제르비스에게 보낸 편지는 그를 위한 초대장인 동시에 나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에버딘 저택 내부의 분위기가 어떻든, 객관적으로 나는 이곳에 스며든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입양된 후계자였다.

‘직접 초대하기엔 자존심이 상하겠지.’

그렇지만 에버딘의 위세가 마냥 배척할 수만은 없을 정도로 커다래진 것도 사실.

하여 저쪽에서는 우회적인 접근법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제르비스가 에버딘 저택에 머물고 있으며, 나와 친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동행’을 명목으로 그가 나와 함께 오길 바라는 거지.

‘저쪽에서는 자존심을 지키고, 나는 제리 덕에 경계심을 조금 덜고 저쪽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좋고.’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만족스러움에 후후후 웃음을 흘리자 내내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제리가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

“크흠.”

칼리오스도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시선을 피했으며,

종국에는 릭마저 뭔가에 기분이 나빴으면 화를 풀라며 내 눈치를 봤다.

……내가 뭘 어쨌다고!

* * *

늦은 밤.

나는 미나의 굿나잇 키스를 끝으로 잠에 빠지듯 눈을 감았다가,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간 직후 눈을 번쩍 떴다.

‘……갔지?’

셀레나에게 문밖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받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벽 너머로 유령들이 하나둘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잠들 수 있어……!>

개중에는 황태자의 방문으로 에버딘 저택의 경비가 강화돼, 그간 좀처럼 성불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남아 있던 헤이튼도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저 요망한 꼬맹이가 약속을 안 지키나 했는데 역시 신은 아직 내 편이었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치.”

나는 대놓고 내 욕을 중얼대며 신께 기도하는 헤이튼의 모습에 민망해 입을 삐죽였다.

내 의지대로 누군가를 성불시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허공에 대고 무어라 조잘거리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 되도록 산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을 진행하려 했는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황태자가 방문해서 사람들의 눈이 많아진 것까지 내 탓은 아니잖아! 나인들 황태자가 올 줄 알았겠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헤이튼은 예전보다 한층 더 퀭해진 -분명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눈으로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흥. 너 때문에 무려 48일, 1152시간, 69120분을 잠들지 못하고 더 기다렸는데 이 정도 심술도 부리지 말란 거냐.>

“아이,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얼른 성불하고 코오 잡시다. 네?”

그래, 어쨌건 ‘투명 신사 이야기’를 집필하면 곧장 성불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건 사실이니까.

나는 어른스럽게 헤이튼의 투정을 받아넘기며 검댕이를 어르듯 우쭈쭈 손짓했다.

그는 입으로 열심히 투덜대면서도 내 앞으로 착실히 다가와 앉았다.

‘미나는 공작을 만나러 간다고 한 후로 아직 안 돌아왔고. 음, 좋아.’

나는 재차 방문 앞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아, 그럼 어디 한번 시작해 볼까.

레일라가 내 곁에서 자신이 힘을 쓸 때 곧잘 사용하는 방법이라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아, 숨을 깊게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어 봐.>

“스읍, 후우.”

<좋아. 그 상태로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고.>

“응!”

<쳐!>

“……응?”

뭔가 이상한데?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지르려다가 흠칫해 멈췄다. 긴가민가해 되물어 보았다.

“치라고요?”

<그럼!>

“……헤이튼 아저씨를?”

<바로 그거지.>

<이 미친 사이비 유령이!>

당연한 말이지만 헤이튼이 팔짝 뛰었다. 나 역시 주먹을 풀며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레일라. 나는 헤이튼 아저씨를 성불시키려는 거지, 영원히 일어날 수 없게 하려는 게 아닌데…….”

<으음, 하지만 그게 제일 효과가 좋은데. 내 경험상 상대를 보내 버리겠다는 의지를 가장 강하게 발현하는 방법이야.>

<그건 정 안 될 때를 대비해서 미뤄 놓고, 우선 명상을 해 보자. 그때의 그 힘을 다시 느껴 보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다행히도 셀레나가 시기적절하게 레일라를 제지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침대 위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악마가 나를 공격한다, 악마가 나를 공격한다…….’

나는 최대한 아메트리스 저택에서의 상황을 고스란히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힘을 느껴 보려는 노력은 영 지지부진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헤이튼이 유령의 존엄성을 포기하겠다며 나섰다.

<때리든 뭐든, 아무거나 좀 해 봐라. 이러다가는 네가 늙어 죽을 때까지 감도 잡지 못할 게 뻔해.>

거, 남의 능력을 너무 저평가하시는 것 아닌가요.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으나 그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나조차도 이제는 아메트리스 저택에서의 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가 싶어졌으니까.

결국 나는 다시 일어섰다.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그래도 주먹은 너무한가? 손바닥이 덜 아플 것 같은데.”

<어설프게 여러 번 시도하느니 짧고 굵게 가는 게 낫지.>

헤이튼이 결연한 얼굴로 내 앞에 버티고 섰다. 저만큼이나 간절하게 바라는데 계속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나는 눈빛을 굳히고 주먹을 옴팡지게 말아 쥐었다.

“진짜 가요.”

<좋아, 난 준비됐다.>

“간다!”

<와라!>

보낸다, 보낸다! 아저씨를 죽음의 땅으로 보낸다!

나는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자 속에서 무언가 투지에 가까운 것이 반짝이는 것도 같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으며 간절한 염원을 담아 외쳤다.

“으앙! 안녕히 가세요!”

<커헉!>

주먹을 내지르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둔탁한 감각이 일었다. 나는 헤이튼의 비명이 들린 직후 기겁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옴마야, 때렸다! 내가 사람을 때렸어!

아무리 목적이 성불이었다지만 엄마가 늘 폭력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어 죄책감이 들었다.

두려움에 차마 손을 치우지 못하고 손가락 틈새로 앞을 슬쩍 내다보는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헐.”

나는 헤이튼의 복부, 정확히는 내가 남긴 흔적인 듯 보이는 주먹 자국이 밝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입을 헤 벌렸다.

아메트리스 저택에서 보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푸른빛이었다.

<진짜 되네……?>

셀레나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주먹 자국에서만 빛이 나던 것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헤이튼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이, 이게 대체…….>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하던 헤이튼은 나와 셀레나의 반응을 보고 성공을 눈치챘는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가 어설프게 허공에 떠 있던 내 양손을 덥석 잡아 붕붕 흔들었다. 그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주먹은 좀 아팠어도 지금은 그저 몸이 날아갈 것 같구나. 정말 고마워! 으하하! 드디어 잘 수 있다!>

그 말을 끝으로 헤이튼의 온몸이 푸르게 빛나는가 싶더니 빛이 한데로 모여 작은 공 모양을 이루었다.

공은 둥실둥실 떠오르며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밝은 빛을 뿜었다.

<잘들 사알아라아-!>

어딘지 아련한 메아리를 마지막으로, 악마가 사라질 때 그러했듯 팟 하고 빛이 사라졌다.

<테리!>

그리고 나는 온몸의 기력이 쑤욱 빠져나가는 듯한 탈력감과 함께 그대로 침대 위에 털퍼덕 엎어졌다.

* * *

릭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던 나는 다음 날 아침 멀쩡한 상태로 일어났다.

<진짜 멀쩡한 거죠.>

“그렇다니까.”

<정말로? 거짓말 아니고요?>

“아, 거참. 얘가 왜 이래?”

나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는 릭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평소에는 내가 조금만 닿아도 기겁하며 물러나더니. 아무래도 내가 쓰러졌던 것이 그에게는 생각보다 충격이었나보다.

‘심약한 곰돌이 같으니.’

나는 혀를 끌끌 차고 손을 들어 릭을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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