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허름하고 작았던 창고는 환하게 밝혀진 아늑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아, 찾았다.”
테레지아는 창고 한쪽에 놓여 있던 상자를 발견하고는 칼리오스의 손을 놓고 그 안을 뒤적거렸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 들려 모습을 드러낸 작은 모형을 본 그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여기, 받으세요.”
“이, 이건…….”
칼리오스는 테레지아의 손에 들린 ‘투명 신사 종이 인형’에 시선을 빼앗겼다.
모자, 안경, 정장과 지팡이까지 모든 조각을 맞춰 놓은 종이 인형의 완성본.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 뻔했던 칼리오스는 일말의 이성으로 허둥지둥 제 손을 거두어들여 등 뒤로 감췄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가지고 싶은데, 정말로 가지고 싶은데.
‘저걸 손에 댔다가는 아바마마가…….’
그 안쓰럽고 짠한 모습을 바라보던 테레지아가 그에게 한 발 다가가며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하, 소설은 소설일 뿐이에요.”
그 한마디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칼리오스의 전신을 휘감았다.
“소설을 소설로 즐기는 게 대체 뭐가 나쁘죠?”
“…….”
“나쁜 건 제멋대로 자기 망상을 소설에 덧씌워 생각하는 사람이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걸요.”
테레지아는 은근하게 황제를 비난하며 칼리오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작고 여린 손에 종이 인형을 쥐여 주며 속삭이듯 강조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굴지 마세요.”
“…….”
“전하는 잘못한 거 없으니까.”
칼리오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청록색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떨 땐 깊디깊은 바다의 빛으로, 어떨 땐 짙디짙은 녹음의 빛으로 반짝이는 눈.
그 눈을 기점으로 그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던, 어린 악령 같은 테레지아의 이미지가 차츰 걷혀 갔다.
선입견을 모두 걷어 내고 마주 본 테레지아 에버딘은 평범한 아이였다.
그저 또래보다 조금 작고, 마르고, 영리할 뿐인 어린아이.
아무리 황제의 명이었다지만 이런 아이를 무작정 경계하고 배척했던 과거의 스스로가 급격히 부끄러워졌다.
“……크흠, 큼!”
칼리오스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한껏 자책 중인 속내와 다른, 사뭇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받아 주도록 하지. 이건 절대 내가 먼저 달라고 했거나, 그래서가 아니야. 알겠나?”
그 말을 끝으로 칼리오스는 후다닥 몸을 돌려 창고를 뛰쳐나갔다. 당황한 칼렙이 “저, 전하!” 하며 그 뒤를 쫓아나갔다.
뭐지, 저 하악질 하면서 머리 비비는 고양이 같은 녀석은……?
‘귀가 조금 빨갰던 것 같기도 하고.’
졸지에 덩그러니 남겨진 테레지아가 황당함에 눈을 깜박였다.
내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셀레나가 픽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완전히 나쁜 녀석은 아니었네. 그렇지?>
“그러게요.”
마무리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건 어느 정도는 계획대로 된 것 같다.
‘황제는 이미 글러 먹었어. 그러면 아직 가망이 있는 황태자라도 구슬려야지.’
황제는 아마 죽은 후에도 에버딘을 기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테레지아 본인이 원하는 것 –에버딘의 부흥- 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기 황제가 될 칼리오스에게 열심히 알랑거려 놓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칼리오스는 아직 어리니까, 옆에서 열심히 친근한 척을 하다 보면 황제에게서 주입받은, 에버딘에 대한 적개심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지.
‘완전히 바보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잘 전달됐겠지?’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을 건네며 눈빛으로 생각을 열심히 쏘아 보내지 않았나.
나, 너한테 적개심 없음. 선 넘을 생각도 없음.
그러니까 서로 건드리지 말고 각자 갈 길만 가자. 알았지?
……라고 한 5번은 반복해 생각한 것 같으니, 전달됐겠지, 암.
‘위기를 기회로!’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전화위복을 꾀한 나의 영민함에 건배!
테레지아는 속으로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며 홀가분한 얼굴로 셀레나와 함께 창고를 나섰다.
* * *
칼리오스와 무언의 화해를 한 후로 며칠.
유령들이 내 말에 따라 칼리오스를 괴롭히던 것을 그만두자 에버딘 저택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를 되찾았다.
새로 출시한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은 어마어마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날마다 쿠키를 몽땅 쓸어 가려는 손님들 때문에 1인당 구매 제한까지 걸어 두어야 할 정도로 잘 팔렸다.
이 정도 속도라면 앞으로 몇 년 안에 상당한 여윳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고위 귀족들 사이의 단단한 인맥뿐!
……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알짱거리시는 겁니까, 전하.”
“아, 알짱? 지금 나보고 알짱댄다고 하였소, 영식?”
“다행히 귀는 멀쩡하시군요. 그런데 저리 좀 사라지라는 제 말은 어찌 그리 쏙쏙 흘려들으시는지.”
“뭐라고?”
“지금 반말하셨습니까?”
얘네는 대체 왜 이래.
나는 내 앞에서 으르렁대는 칼리오스와 제르비스를 흐린 눈으로 훑어보았다.
칼리오스는 무언의 화해 이후, 내가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을 건네준 것 때문인지 종종 뭔가를 들고 찾아왔다.
책, 작은 간식거리, 가끔 가다가는 꽃 등등.
칼리오스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서 나를 찾을 때마다 꼭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이곤 했다.
‘이건 내가 쓰다가 질려서 가져온 거지, 절대로 그대를 신경 써서 따로 챙겨 온 건 아니오. 알겠소?’
쟤 지금 뭐래니.
처음에, 내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그의 말을 듣고 황당함에 눈만 끔벅이고 있자 그는 급히 덧붙였다.
‘……물론 책을 보다가 모르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아도 좋소. 간식도, 뭐, 맛있으면 더 먹든가.’
그리 말하는 그의 볼은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제야 왜 황태자가 저런 이상한 태도를 보이는 건지 이해가 갔다.
‘아하. 고마워서 저러는구먼.’
고마운데 고맙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니까 괜히 툴툴거리는 거지.
저 정도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황제를 제외하고서 남에게 굽히는 일 없이 살아온 사람치고는 귀여운 태도였다.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칼리오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 목표였으니 저쪽에서 내보이는 호감을 굳이 물릴 필요는 없다.
‘넌 너희 아빠처럼 되지만 말렴.’
그래, 황제처럼만 안 되면 그게 어디냐.
이대로 우리랑 사이좋게 잘 지내면서 너희 아버지도 살살 구슬려 보면 더 좋고.
나는 그런 생각으로 그가 종종 찾아오는 것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하지만 제르비스는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불쾌했던지, 내 오빠 노릇을 하려 드는 황태자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황태자 또한 나와 다시없을 형제인 양 굴며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제르비스를 탐탁잖아 했고.
슬슬 말려야겠군, 하는 생각으로 쿠키를 목구멍으로 넘겼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세바스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꾸벅 숙인 그가 한쪽 팔에 들고 왔던 은쟁반을 우리 쪽으로 내밀었다.
「제르비스 도련님, 황태자 전하. 두 분께 편지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고맙네.”
이마를 맞댈 기세로 으르렁대던 두 사람은 세바스찬의 등장으로 정신을 차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각자에게 온 편지를 집어 들자 세바스찬이 내게 인자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방 밖으로 사라졌다.
“무슨 편지야, 제리?”
나는 제르비스에게 이리로 오라 손짓하며 짐짓 순수하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말 잘 듣는 양처럼 순한 얼굴로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초대장 같아.”
“어디서 온 건데?”
“잠시만…… 아, 디프린 자작가에서 온 거네.”
제르비스는 편지 겉면에 쓰인 글자를 힐긋 눈으로 읽어 내리더니 권태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디프린 자작가라면 일전에 세바스찬이 언급했던, 에버딘의 수많은 가신 사이에서도 주축이 되는 세 가문 중 하나다.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은 칼리오스가 편지를 꺼내어 읽더니 말을 보탰다.
“내게도 왔군. 디프린 자작 영애가 다과회를 연다며 참석해 달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에버딘 영지에 와 있으니 예의상 보낸 모양이야.”
그의 말에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비스야 영지가 에버딘 영지와 접해 있으며, 기존에 주변 가문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었다지만 칼리오스는 아니다.
에버딘을 적대시한다고 공공연히 알려진 황실의 후계자에게, 에버딘의 가신인 디프린 자작가에서 구태여 초대장을 보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정식 무도회도 아니고,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아이들의 다과회인걸.
다만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와 있는데 초대장조차 보내지 않았다가는 후에 책잡힐 수도 있으니 예의상 보낸 거겠지.
“제리, 너도 읽어 봐. 응?”
그보다 내 목적은 이쪽이다.
나는 자꾸만 잇새로 비실비실 새려는 웃음을 눌러 담으며 제르비스를 재촉했다.
다행히 그는 별말 없이 편지를 꺼내어 잘 보이게 펼쳐 주었다.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고개를 기울여 편지의 내용을 살폈다.
릭 또한 알게 모르게 편지 쪽으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잔뜩 신경 쓴 것처럼 보이는 고급 종이에서는 은은한 과일 향이 풍겼다. 그 위로 동글동글하고 가지런한 글씨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제르비스 아메트리스 후작 영식 귀하.
안녕하세요, 아메트리스 후작 영식.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도 굉장히 간만이네요. 디프린 자작가의 리벨입니다.
우선 건강을 되찾으셨다는 소식에 깊은 안도와 기쁨을 전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영식과 연이 있던 이들 모두가 천만다행이라며, 진심으로 영식의 회복을 기뻐하고 있답니다.
하여 오랜만에 작은 다과회를 열어 보려 해요. 괜찮으시다면 참석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원하신다면 한 분 정도는 동석하셔도 좋아요.
부디 영식께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만나 뵐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리벨 디프린.」
나는 편지의 끄트머리까지 꼼꼼히 읽고는 고개를 돌려 제르비스를 바라보았다.
“디프린 영애와 친분이 있었어? 친구야?”
“……전에 몇 번, 다과회나 연주회에서. 그것도 아버지 등쌀이었고. 친구는 절대 아냐.”
제르비스는 디프린 영애가 자신을 ‘벗’으로 지칭한 것이 불쾌하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렇다고 뭘 또 절대 아닐 것까지야.’
제르비스가 의외로 낯가림이 꽤 심한가 보군. 의외라고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돌려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한 분 정도는 동석하셔도…….」
나는 그 구절에 시선을 고정하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드디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본격적인 인맥 확장의 첫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