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 *
‘……쯧, 길거리에 나도는 저급한 글 쪼가리군. 태자, 너는 이따위 통속소설에 눈길도 주지 말거라. 알았느냐?’
황제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 칼리오스 드 램바드 마인하르트는 아직 12살에 불과한 어린애였다.
그 말인즉슨,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시절을 겪고 있다는 소리다.
‘그 글이 대체 뭐길래?’
칼리오스는 태어난 순간부터 ‘황태자’에게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금지당했다.
그중에는 통속소설도 있었다.
매일매일 제왕학, 경제학, 사학 등과 관련한 책만 읽던 아이가 <투명 신사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잘 참아 왔지만, 제 아버지가 대번에 내칠 만한 책이라고 하니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칼리오스는 그렇게 황제의 눈을 피해 <투명 신사 이야기>를 구해 읽었고…….
‘이, 이게 무슨……!’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덕’해 버렸다.
그간 성현의 말씀이 어쩌고, 군자의 자세가 어쩌고, 이런 말들만 담긴 책을 읽던 그에게 순전히 재미를 위한 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황궁의 모든 이들은 <투명 신사 이야기>가 발레리안 에버딘을 추켜올리기 위한 조잡한 술수라고 했으나 칼리오스는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사악한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모습과 목소리가 지워진 투명 신사.
그가 저주를 풀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계는, 칼리오스가 지금껏 갇혀 있던 황궁보다 훨씬 크고 넓어서 매료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리고…… 에버딘 공녀.’
하여 맨 처음 저주에 걸린 에버딘 공작을 만났을 때도 무서운 동시에 두근거렸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자신이 <투명 신사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마음속으로만 감춘 설렘이었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일을 겪던 중 테레지아 에버딘이 내밀었던 작은 종잇조각은 그의 억눌러 둔 팬심을 불타오르게 했다.
‘……그러고 보니, 에버딘령에 유령 쿠키를 제조하는 제과점이 있다고 하던데.’
이곳에는 수도에 비하면 황제의 눈도 적겠다, 마침 제과점이 에버딘 저택에서 멀지도 않겠다.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다!
그리 생각한 칼리오스는 호위인 칼렙 베오폴마저 따돌리고 유령 쿠키와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이 수도에 출시되기 전에 이 손으로 직접 쟁취하리!
그런 마음가짐으로 씩씩하게 모험에 나섰건만.
“여기서 뭘 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가장 들켜서는 안 될 상대에게 현행범으로 검거당해 버렸다…….
‘이, 일단 잡아떼자.’
칼렙마저 떼어 둔 지금, 가까이에 있을 에버딘 공녀의 호위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방법은 요원했다.
하여 칼리오스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사람 잘못 보았네.”
“제 또래이면서 그런 말투를 쓰는 사람이 어디 흔합니까.”
“……자, 잘못 보셨습니다.”
칼리오스는 후드 자락을 쭉 끌어당겨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애썼다.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테레지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야, 칼리오스.”
“뭐? 이 무슨 무엄한, 헙.”
“…….”
“…….”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망했다는 생각이 든 칼리오스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감추려 일부러 눈을 부릅떴다.
후드를 끌어 내리던 손을 거둔 그가 테레지아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자못 오만하게 말했다.
“에버딘 공녀.”
“예, 전하.”
“이 일은 폐하께 비밀로 하시오.”
그 말에 테레지아의 한쪽 눈썹이 더욱더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하시오?”
“……부탁하겠소.”
황태자는 끝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며 아래로 양손을 맞잡았다.
비스듬히 내리깔린 연한 하늘색의 눈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갈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아바마마께 들키면…….’
에버딘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황제다.
<투명 신사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말라 손수 엄포까지 놓았는데, 자신이 그 책을 읽은 것으로도 모자라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으면 필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공녀는 말하겠지.’
테레지아는 처음 에버딘 저택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자신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런 그녀가 제 말을 들어줄 리가 없지 않나.
분명 각오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황제가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 생각하니 몸이 절로 굳고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
테레지아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자그맣게 숨을 삼켰다.
‘아, 쓸데없는 거 생각났어.’
그러니까, 이피아 오블렌이 명을 달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테레지아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오블렌 자작을 제 ‘아버지’로 여기고 있었다.
‘아, 아버지…….’
숨소리 하나, 발걸음 소리 하나로 그에게 미움을 살까 봐 숨을 죽이고, 발뒤꿈치를 들고.
유령들이 어리석은 짓이라며 몇 번이고 만류했어도 혹시나, 혹시나 하는 한 줌 기대를 저버리질 못해서.
그가 자신을 경멸하지 않고, 표면적으로나마 아버지로 있어 주었던 때로 돌아와 주진 않으려나 전전긍긍하면서 눈치를 보기 바빴던 기억.
눈앞의 칼리오스는 그때의 테레지아 오블렌과 꼭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에휴.’
황태자도 결국 애구나.
테레지아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어했던 릭의 말과 똑같은 생각을 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레일라가 봤다면 분명 “뭐지, 이 천생연분은?” 했을 법한 태도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현재 에버딘 저택에서 검댕이와 햇살 맞으며 널브러져 있는 중이었다.
테레지아는 잠시 묵념했다.
‘반성하자. 반성.’
하마터면 황제의 앞잡이를 내쫓아야 한다는 데 눈이 멀어, 애한테 지나친 화풀이를 할 뻔했다.
칼리오스가 아무리 황제의 앞잡이처럼 행동했다고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열둘 먹은 어린애다.
이는 출생도, 그 이후의 교육도. 무엇하나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는 뜻이었다.
자기 자신의 의식주는 책임질 수 있을 법한 어엿한 성인이라면 몰라도,
의식주조차 타인의 손에 맡기고 있는 아이를 상대로 정도 이상의 분풀이를 하는 것은 분명 부당했다.
만약 테레지아 자신도 유령이라고는 일절 볼 줄 모르는 천생 어린아이였다면 모를까.
그녀는 정신만큼은 (자칭) 어른에 가깝지 않은가.
멋지고 착하고 사려 깊고 어른스러운 이 몸이 너그럽게 넘어가야지, 뭐 어쩌겠어. 테레지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긴 했다.
오동통한 뱃살, 연한 푸른색의 눈.
오블렌 자작 부부의 답 없는 사랑으로 인해 안하무인으로 자라난, 로렌스라는 어린애가.
‘음…….’
로렌스도 기껏해야 황태자만큼밖에 나이를 먹지 않은 어린애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급격하게 찝찝해졌다.
‘하지만 부모님은 건드리는 거 아니랬다.’
물론 곧바로 떨쳐 내 버렸지만.
아무리 화나도 부모님은 건드리는 거 아니다, 패륜 아기 돼지 로렌스야.
‘음, 됐다. 해결.’
미미한 죄책감을 깔끔히 털어 낸 테레지아가 상큼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러자 아직도 제자리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칼리오스가 보였다.
잔뜩 주눅이 들어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이 황태자답지 않게 어딘지 딱했다.
상념을 갈무리한 테레지아는 약간의 연민과 동질감이 깃든 눈으로 칼리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
칼리오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코앞에 불쑥 다가와 있는 작은 손을 보고는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황태자씩이나 되는 애가 눈치가 없어요, 눈치가. 크렘위든 제국의 미래,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떼잉, 쯧.
어린 꼰대 테레지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칼리오스의 손을 덥석 찾아 쥐었다. 놀란 그가 펄쩍 뛰었다.
“뭐, 뭐! 공녀, 이게 무슨 짓이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그냥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전하. 그건 그렇고 안 따라오실 거예요?”
“아니, 그보다 손 좀!”
릭도 그렇고 황태자도 그렇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닿는 걸 싫어한담. 제리는 얌전하기만 한데.
테레지아는 작게 툴툴거리며 칼리오스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칼리오스는 어어, 하는 사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밀레시아 제과점을 나서게 되었다.
“전하! 대체 어딜 가셨던 겁니까!”
에버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칼렙 베오폴은 극적으로 칼리오스를 발견하고는 꺼이꺼이 울었다.
바로 직후 테레지아와 칼리오스가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긴 했지만.
테레지아는 에버딘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칼리오스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대체 어딜 가는……!”
“아, 거 참 시끄럽네. 일단 따라와 보라니까.”
쓰읍, 소리를 내며 눈을 부릅뜨는 테레지아의 기백에 칼리오스는 깨갱 입을 다물었다.
저보다 네 살이나 어린 그녀의 기에 눌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열심히 꿍얼댔다.
‘아니, 그거 하나 대답해 주는 게 뭐 어렵다고.’
그런데 정말 어딜 가는, 헉, 설마 자백 서신이라도 쓰게 하려나?
이걸 약점 잡아서 뭐라도 한 몫 뜯어내려고?
나 칼리오스 드 램바드 마인하르트는 앞으로 테레지아 에버딘의 요구에 무조건적으로 응할 것을 서약하며 블라블라, 뭐 이런 무기한 황태자 뜯어먹기 서약이라도 하려는 건……!
‘크윽, 역시 악랄한 에버딘……!’
어렸을 적부터 ‘우리 고오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일어날 수 있는 수만 가지 범죄와 위협 –대부분 에버딘- 에 대해 듣고 자란 칼리오스의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미친 듯이 깜박였다.
하지만 칼리오스의 예상과는 달리, 테레지아가 이끌고 온 곳은 최근에 새로 증축한 공작가의 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