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에버딘의 후계자로서 손님의 안전을 응당 책임져야 하는바, 제가 기사들과 함께 전하께서 다치셨던 곳을 샅샅이 수색해 보았답니다.”
칼리오스가 쓰러지기 전의 일을 언급하자 그의 얼굴이 찰나 희게 질렸다.
무섭지, 무섭지? 그 모습에 속으로 낄낄대 준 후 설명을 시작했다.
“솔방울은 정원에 살던 다람쥐가 나뭇가지 위에 먹을 걸 모아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연히 떨어졌던 거고.”
거짓말.
“벌레는 별채 근처에 둥지가 있어서 튀어나왔던 거고.”
이것도 거짓말.
“돌멩이는 뭐, 원래부터 그 자리에 박혀 있었던 것 같고요.”
이건 절반만 거짓말.
돌멩이가 박혀 있었던 건 맞지만, 셀레나가 타이밍 맞춰 그 앞에서 발을 걸었던 거니까.
“그리고 복도에 있는 거울은…….”
“헉.”
칼리오스가 기절하는 데 가장 큰 원인이었던 거울에 대해 언급하자 그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나는 품을 뒤적거려 초승달 모양으로 잘려 있는 붉은 종이를 건넸다.
“자세히 보니까 빨간색 종잇조각이 붙어 있더라고요.”
“……종이?”
“네. 이거요.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을 만들다가 날아간 일부가 여기까지 왔나 봐요.”
칼리오스는 내가 품에서 손을 꺼내는 순간 잠시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굉장히 신중한 손길로 종이를 받아 살폈다.
손가락 길이의 종잇조각을 샅샅이 살피던 그가 돌연 입술을 달싹였다.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이 나온다고?”
“네?”
“아, 아무것도 아니오.”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은데 너무 작아서 안 들리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칼리오스는 황급히 고개를 붕붕 저으며 내게 종잇조각을 돌려주었다.
“아무튼, 큼. 그랬단 말이지.”
칼리오스는 간간이 미심쩍은 눈길로 붉은색 종잇조각을 힐끔거렸다.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그에 나는 이제까지 중 가장 순수한 얼굴로 해맑게 웃음 지으며 말을 던졌다.
“네!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하!”
“……뭐?”
내 예상대로 곧장 반응이 돌아왔다.
칼리오스가 얼굴을 구기며 짐짓 사나운 목소리를 냈다.
“무서워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오? 나는 무서워서 기절한 게 아니오.”
“에이,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그 나이 때에는 원래 다 그렇잖아요.”
나는 너스레를 떨며 손을 휘저었다. 곁에서 제르비스가 작게 한마디 거들었다.
“비명…….”
“지금 뭐라 하였소, 영식?”
“전하께서 지르신 비명, 다 들렸습니다. 그것도 엄청 크게.”
제르비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칼리오스와 내 귀엔 들릴 정도로는 또렷했다.
잘한다, 우리 제리!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맞장구쳤다.
“세상에, 정말? 황족이신 전하께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내실 정도로 무서워하셨단 말이야?”
“응.”
“이보오, 영식!”
끝끝내 칼리오스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내가 그 순간에 맞춰 눈을 깜박이자 제르비스가 눈치 좋게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가련하게 비틀거렸다.
“아아, 큰 소리 때문에 심장이…….”
“세상에, 제리! 괜찮아?”
나는 얼른 제르비스를 붙들어 그의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어 당황한 듯 보이는 칼리오스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내뱉은 말이 이 상황의 절정이라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괜찮아요, 전하. 유령을 무서워하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에요. 힘내세요!”
힘내세요……! 세요……! 세요……!
칼리오스를 향해 야무지게 쥐어 보인 주먹.
네 심정 다 이해한다는 듯 아련한 눈빛.
마지막으로 적막 속에 오래오래 울려 퍼지는 응원의 말.
그 세 가지를 동시에 접한 칼리오스가 끝내 뒷덜미를 잡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하루 뒤, 칼리오스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꼭두새벽부터 방을 박차고 나와 바깥을 씩씩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니 유령들에게 습격받는 횟수도 자연히 늘어날 수밖에.
“으아악!”
“헉, 전하! 왜 그러십니까!”
장난기 많은 유령 하나가 칼리오스를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느꼈는지 그가 기겁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정원 한쪽에서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즐기던 나와 제르비스는 그를 향해 측은한 눈빛을 마구 발사했다.
“전하…….”
“저런…….”
“이익!”
칼리오스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몸을 홱 돌려 멀어졌다.
우리는 주섬주섬 돗자리를 접고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꺄악!”
“눈 뜨세요, 전하. 먼지예요.”
“이, 이, 이게 뭐야!”
“그건 제 손그림자인데요?”
“그보다 대체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저희는 피크닉을 하는 것뿐이랍니다. 그런데 지금 제게 반말하셨나요?”
이런 일이 하루에 몇 번, 며칠 내내 반복되니 칼리오스는 자연히 나와 제르비스의 얼굴만 보면 부들부들 떨게 되었다.
그렇게 4일째.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칼리오스는 에버딘 시내로 나들이를 나가겠다며 아침 일찍부터 사라져 버렸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오랜만에 평온한 아침을 맞이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간 칼리오스를 괴롭히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슬슬 엠앤제이 서점과 밀레시아 제과점을 살펴야 할 때였다.
특히 내일은 투명 신사 종이 인형 뽑기의 첫 출시일이니까!
「아르볼트 경을 불러올 테니 잠시만 계세요, 아가씨.」
“다녀와요, 미나.”
채비를 마치고 손을 팔랑팔랑 흔들자 미나는 세상에서 제일 흐뭇한 얼굴로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이거 조금 쑥스럽구먼.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릭이 침대 위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고소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역시 황태자라고 해 봤자 어린애군요. 4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바깥으로 나돌다니.>
얘 좀 보게.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넌 4살이잖아.”
<아닙니다.>
“곰 인형 속에 들어오기 전에 몇 살이었는지 기억에 없다며? 그럼 4살이지.”
<무슨 그런 논리가?>
“멋지지? 누님이라고 불러 봐.”
<미쳤습니까?>
릭은 대번에 기겁하며 뒤로 데굴데굴 굴러 멀어졌다.
진짜 쟤는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네. 처음에는 분명 엄청 얄미웠던 것 같은데.
나는 킥킥 웃음을 흘리고 손가락을 뻗어 릭의 코를 쿡 눌렀다.
“그런데 솔직히, 네가 정말로 4살이라고 해도 많이 놀라진 않을 것 같아. 이렇게 귀여워서야.”
<뭐, 무, 무, 무슨.>
릭은 또다시 고장 난 시계처럼 버벅거렸다.
사람이었다면 붉게 물든 얼굴을 볼 수 있었으려나.
‘……좀 아쉽네.’
릭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누구보다 속상해할 사람이 바로 릭이었으므로 나는 그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하여간 부끄러움 많은 곰돌이 같으니. 애써 아쉬움을 갈무리하며 릭의 볼을 꼬집자 그가 하지 말라고 툴툴대더니 내 손을 밀어냈다.
직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미나와 레딘이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아가씨.」
「가실까요?」
“네!”
나는 오전 훈련을 마치고 해쓱해진 레딘, 오늘도 상냥한 미나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투명 신사 이야기 덕분에 거리는 전과 비교해 눈에 띄게 활기가 넘쳤다.
좋아, 슬슬 영지 전체에 활력이 돌고 있군.
뿌듯함에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엠앤제이 서점으로 향했다.
“어머, 아가씨 오셨어요?”
“오늘 실적은 어때?”
나는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한 기색의 메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물었다.
그녀는 퀭하지만 기뻐 보이는 얼굴로 양 손바닥을 짝 맞부딪쳤다.
“아무래도 처음보다야 조금씩 떨어지고 있죠. 그래도 내일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이 출시되면 다시 반짝 오르겠지만요.”
“좋아, 잘 부탁해.”
“염려 마세요.”
셀레나는 그리 말하는 메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돈도 좋지만 잠도 잘 자야 하는데, 하며 조잘조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메리는 그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대신 전해 주고 판매금을 받아 서점을 나왔다.
“좋아, 다음은 제과점!”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의 일부를 유령 쿠키와 함께 판매할 예정이었기에, 내가 지금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밀레시아 제과점 쪽이었다.
나는 거리에서 파는 과일 꼬치를 두 개 사서 미나와 레딘에게 하나씩 들려 주고 제과점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가게 바깥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줄에 흐뭇해하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 정말…….”
“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으려고 하는 건지.”
“어느 집 꼬마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없구먼, 예의가.”
분명 설렘 가득해야 할 얼굴들에 짜증과 피곤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게 안쪽, 줄의 맨 앞일 것으로 예상되는 쪽을 노려보며 한마디씩 투덜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람.’
누구인가? 누가 내 손님들을 짜증 나게 하였어!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가게 안으로 살짝 몸을 집어넣었다.
안쪽으로 들어와 살펴보니 줄이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줄의 맨 앞,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작은 인영 때문이었다.
“진짜란 말이네!”
“그러니까 종이 인형 같은 건 없다고 해도!”
엥?
나는 클로크를 푹 눌러쓴 작은 인영, 그리고 밀레시아 과자점 사장의 대화를 엿듣고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은 내일이 첫 출시다.
화제성을 위해서 일부러 관계자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출시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저 꼬마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직접 들었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서점에서는 예정에 없다고 했으니 남은 것은 이곳뿐이네. 돈은 얼마를 내도 좋으니 하나만 내게 팔게.”
아이, 아마도 소년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열심히 애원했다.
사장은 뒤에 서 있는 손님들에게 이야기가 새어 나갈까 전전긍긍하며 낮게 윽박질렀다.
“없다면 없는 줄 알아! 그건 그렇고,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자꾸 하대야, 하대는? 저희 부모님은 대체 어디 계시냐?”
“그, 그건…… 두 분 다 수도에 계시네.”
“뭐? 수도?”
저 목소리, 저 말투. 어딘지 낯설지 않다.
거기에 내가 모르는 외부인이면서, 부모님이 수도에 계시고, 투명 신사 종이 인형에 대해 알고 있다면, 사실상 한 명뿐이지.
나는 작게 한숨을 삼키고선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다.
“밀.”
“누구…… 테레지아 아가씨!”
밀레시아 과자점의 사장, 밀은 나를 보자마자 지금까지의 설움이 폭발했는지 곧장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허엉.”
“알았어, 알았어. 그만 울어.”
“꺼으허엉.”
우, 울지 말라니까.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운 얼굴로 꺼이꺼이 우는 밀의 무릎을 몇 번 토닥여 주고 고개를 돌렸다.
계산대 앞, 클로크 자락에 휩싸인 소년의 등은 부자연스럽게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 그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황태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