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38) (38/124)

<38화>

“…….”

“…….”

그것을 떠올린 두 사람은 기름칠이 덜 된 문처럼 삐걱삐걱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움직여 시선을 마주했다.

“……솔방울이 좀 아무 데서나 떨어질 수도 있지. 이작 뉴튼인가, 그런 이름의 학자가 주장한 어느 가설에서도 이 비슷한 일이 있던 것 같은데.”

“저도 기억이 납니다, 전하.”

“하하, 우리가 건국 기념제 업무 때문에 과로하긴 했나 보군.”

“하하하, 그, 그렇습니다.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칼리오스는 필사적으로 부정했고, 칼렙은 얼른 맞장구쳤다.

한동안 영혼 없는 웃음을 흘리며 주위를 힐끔거리던 두 사람은 이내 정색하며 나무 아래를 서둘러 벗어났다.

하지만 기이한 일은 그것만으로 끊이지 않았다.

“코, 코에 벌레! 벌레!”

“꺄아악! 벌레다!”

“그대가 무서워하면 어쩌나! 빨리 어떻게 좀 해 보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벌레들이 얼굴을 습격하여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야 하질 않나.

“어억!”

“경! 괜찮, 헉, 코피가!”

별채 주위를 지날 때 분명 돌부리를 피해 움직였는데, 발이 걸려 얼굴부터 넘어지기까지.

칼리오스는 결국 쌍코피를 줄줄 흘리는 칼렙을 본채의 의무실로 먼저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칼렙은 피를 흘리면서도 단호한 얼굴로 외쳤다.

“전하와 떨어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도 이제 방으로 돌아갈 거네. 그러니 얼른 치료부터 받고 와. 어차피 여기에서 내가 공격받으면 에버딘 공작가는 그대로 멸문이야.”

“그건 그렇지만…….”

“어서 가래도. 대신 그 검은 나 좀 주고 가게나.”

“옙……?”

사실 저도 무섭습니다, 전하……. 검은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요?

칼렙은 눈물을 머금고 그 말을 속으로 꼴깍 삼켰다.

그는 칼리오스에게 검을 강탈당한 채 바들바들 떨며 의무실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칼리오스는 칼렙에게서 받은 검을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손으로 꼭 쥔 채 주춤주춤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아. 어마마마께서 걱정할 건 사람뿐이라고 그랬어. 세상에 유령 따윈 없다, 없다.”

칼리오스는 그리 중얼거리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그 덕인지 그의 방이 있는 복도에 다다르기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 멀리 방문, 그리고 방문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그가 안도하며 기사들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차였다.

<킥.>

오른쪽 귓가에 돌연 스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복도에 걸려 있던 커다란 전신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

그 순간. 거울 속의 칼리오스가 돌연 씨익 미소 지었다.

그의 입이 양쪽으로 쭈욱 늘어나더니 칼리오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커다랗게 벌어졌다.

“으아아아악!”

“저, 전하!”

결국 칼리오스는 가련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 * *

<마음에 안 들어.>

셀레나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와 더불어 릭, 제르비스, 검댕이와 함께 정원 한쪽에 쪼그려 앉아 그 말에 동의했다.

“엄청 마음에 안 들어, 저 황태자.”

저 멀리, 공작과 단둘이 집무실로 사라지는 황태자, 칼리오스의 뒷모습에 시선이 닿자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알게 모르게 주위를 살펴보던 그의 시선이 거슬려서.

‘제리를 핑계 삼아서 감시하러 온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방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당황이 가시고 난 후 조금만 생각해 보니 금방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세바스찬의 설명에 따르자면, 아메트리스 후작은 확실히 제국의 중요한 관료 중 하나다.

하지만 황제와 개인적인 친분이라고 할 것은 없이 그저 의례적인 신하와 군주의 관계에 가깝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대뜸 제르비스의 건강이 나아졌다는 것을 축하한다며 적진이나 다름없는 에버딘 영지까지 황태자를 보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분명 견제다.

최근 ‘투명 신사 이야기’로 막대한 부를 쌓고, 사람들의 인식마저 달라지고 있으니 위기감을 느끼고 이러는 것이겠지.

생각하다 보니 더 화나네. 나는 릭을 꽉 끌어안으며 자그맣게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대체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초에 에버딘이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거기다가 제리 너까지 핑계로 삼고!”

<테리. 팔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만. 좀 놔주시죠.>

릭은 역시나 투덜거렸다.

지금은 제르비스의 앞이라 차마 대놓고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단둘뿐이었다면 분명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내 품에서 벗어나려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의 투덜거림보다 내 마음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생긴 건 조금 음산하긴 해도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폭신한 감각 덕인지 마음이 놓인단 말이야.

나는 결국 체념한 건지 입을 다문 릭을 꼭 끌어안고 분노를 다스렸다.

그사이,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던 제르비스가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맞아. 나도 기분 나빠.”

제르비스의 목소리는 언뜻 스산하게 느껴질 정도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워낙 순한 양처럼 굴던 그였던지라 조금 의외의 모습이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르비스는 말 그대로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고 간신히 건강을 되찾았다.

그런데 그간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던 황제가, 돌연 자신의 건강을 핑계 삼아서 에버딘에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니.

기분이 나쁜 걸 넘어서 괘씸하기 짝이 없겠지. 나조차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나저나, 테리. 황태자를 저대로 둘 겁니까?>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릭이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럴 리가 있나.’

훌륭한 후계자의 본분을 다하느라 잠시 잊고 살긴 했지만, 슬슬 못된 어린이의 본성을 되살릴 때가 되었군.

나는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제르비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남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왔으면, 어느 정도의 심술은 각오하고 온 거겠지?”

내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제르비스와, 그의 등 뒤로 동동 떠 있던 유령들이 하나둘 입가에 스산한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 이래야 내 친구들이지.

나는 뿌듯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개중에서도 가장 악당 같은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당당히 선언했다.

“두고 봐. 일주일 안에 엉엉 울면서 자기 발로 걸어 나가게 해 줄 테니까.”

여기가 왜 유령 저택인지 알려 주마, 이 속 시꺼먼 황태자야.

* * *

유령들은 내가 에버딘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는 나와 셀레나의 눈치를 보느라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령의 본성이 어딜 가겠나.

간만에 마음 놓고 괴롭힐 만한 사람이 나타나자 그들은 아주 신이 나서 칼리오스에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꺄아악! 벌레다!”

“어억!”

유령들의 활약 덕에 황태자는 내가 달리 손쓰지 않아도 혼비백산해서 뛰어다니기 바빴다.

다만 제르비스는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유령들과 작전을 상의하며 돌아다니는 사이 무언가 장치를 해 놓는 것처럼 여기저기를 슬쩍 만지는 척했다.

그 덕에 제르비스는 의심의 기색 없이 나와 함께 칼리오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모습까지 즐겁게 관람했다.

<흥. 산 사람 주제에 어디서 까불어.>

셀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다른 유령들 또한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했다는 듯 즐겁게 날아다녔다.

나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제르비스와 작게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몰래 릭과 악수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끼리만 조용히 자축했다는 소리다.

대외적으로 에버딘은 황실에 책잡힐 일이 없어야 했다. 괜히 분쟁의 명분을 쥐여 줄 이유는 없으니까.

해서 하루 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는 제르비스와 함께 꽃다발을 안고 병문안을 갔다.

“에버딘 공녀님?”

“여긴 어쩐 일로…….”

칼리오스의 방문을 지키던 황실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해치지 않아요오. 나는 최대한 무해한 얼굴로 활짝 웃음 지으며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전하께서 아프시다고 해서요. 병문안 왔어요!”

“아하.”

기사들은 내 대답을 듣고는 단번에 경계심을 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헹, 바보들.

이런 연기력을 갈고닦게 해 준 토미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잠시만요. 전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리 말한 기사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금세 나왔다. 그가 빙긋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좋아, 작전 성공이군.

나는 다시 한번 활짝 미소 짓고서 당찬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공녀. 무슨 일이오?”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칼리오스가 미심쩍은 눈길로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보면 뭐라도 나올 것 같으냐. 내 또래 중에 나랑 릭보다 더 늙은이 같아 보이는 애는 또 처음 보네.

나는 상념을 갈무리한 후 보란 듯 방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침대 옆 협탁에 가져온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전하! 너무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시다길래 와 봤어요!”

“……보다시피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네만.”

칼리오스는 비꼬는 말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네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단다. 나는 그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자못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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