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 *
칼리오스는 발레리안 에버딘과 저택의 응접실에 단둘이 마주 앉았다.
그는 옅은 김이 올라오는 찻잔으로 입술을 가리며 제 맞은편에 앉은 발레리안을 힐긋 응시했다.
찻잔을 쥔 손에 언뜻 힘이 들어갔다.
‘……정말 유령이군.’
태어난 순간부터 황족으로서 몸에 익히도록 배워 온 것들 덕에 표정 관리는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기실 저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듯이 보이는 정장은 훌륭했지만, 정작 그 정장을 걸치고 있어야 할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손목, 발목이 드러나야 할 부분은 누군가 가위를 들고 그 부분만 오려 낸 것처럼 보이는 데다가, 셔츠 깃 위로는 아예 텅 비었다.
그 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떠 있는 안경이 아니었다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칼리오스는 이내 생각을 갈무리하고 태연한 얼굴로 찻잔을 입에서 떼어 냈다.
발레리안은 그가 차를 마시는 동안 할 말을 적어 놓은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이곳에는 언제까지 머무르실 예정이십니까, 전하.」
“글쎄요. 곧 건국 기념일이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아메트리스 소후작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이겠지요.”
칼리오스는 허공에 떠 있는 안경을 향해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발레리안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감시군.’
조금 전.
황태자가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 여장을 푸는 사이, 발레리안은 제 집무실에서 황제의 서신을 뜯어 보았다.
우스우리만치 익숙한 필체의 서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메트리스 소후작의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충직한 신하의 자제가 건강을 되찾았다니,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내려가서 살피고 싶으나 짐은 쉬이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노릇이다.
하여 그 대신 황태자로 하여금 소후작의 상태를 살피도록 하겠으니 이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명목은 사경을 헤매던 제르비스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니, 일국의 군주인 황제가 친히 그를 살피고 격려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그 속에 담긴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투명 신사 이야기> 때문이겠지.’
황제가 지난 5년간 발레리안과 에버딘을 내버려 둔 것은 그들이 무력했기 때문이다.
명예도, 돈도, 인간으로서의 생명도 잃어 제게 일말의 위협조차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
그것이 있었기에 황제는 십여 년간 집요하게 지속하던 전쟁을 끝내고 그를 놓아줄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테레지아라는 후계자가 생긴 후로, 에버딘의 입지는 크게 바뀌었다.
가장 먼저 부정부패가 깨끗이 쓸려 나갔다.
그간 반강제로 정무에서 손을 놓고 있다시피 했던 발레리안은, 테레지아를 통해서 부패한 가신들을 쓸어 낼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테레지아가 집필했다는 <투명 신사 이야기>라는 책.
그 책으로 인해 에버딘 공작가는 막대한 부를 쌓게 되었고, 지금은 평범한 이들이 에버딘의 사람들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인식도 바뀌었다.
내내 조용하던 황제가 제르비스를 핑계로 황태자를 이곳에 보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직 자신이 에버딘을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 그리고 이 이상 몸집을 부풀렸다가는 또다시 예전의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
발레리안이 테이블 아래로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는 사이, 칼리오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보니 아메트리스 소후작은 에버딘 공녀와 함께 정원에 있더군요.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던데.”
「예, 많이 건강해져 이제는 곧잘 뛰어다니기도 합니다.」
칼리오스는 그 말에 찻잔을 손에 든 채로 말을 이었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기쁜 소식입니다. 클라센 소후작도 아메트리스 소후작처럼 별다른 문제가 없이 회복하면 좋으련만.”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클라센’이라는 이름에 남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고는 물었다.
「……클라센 소후작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겼습니까.」
“아, 공작은 몰랐겠군요. 변고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다만 4년 전쯤부터 소후작의 몸이 좋지 않아져 그 이후로는 내내 수도의 저택에서 칩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도 그를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요.”
칼리오스는 안타깝다는 투로 말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클라센 가문은 선황후, 그러니까 그의 외할머니의 가문으로, 현 클라센 소후작은 그와는 육촌 관계였다.
어렸을 적에는 그래도 몇 번 만나 놀았던 기억도 있는데, 4년 전부터는 아예 소식마저 뚝 끊겼다.
그에게는 나름 ‘친구’에 가장 가까웠던 이라서 그런가.
후작이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으나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설마 뭐 죽을병에 걸렸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칼리오스는 입안으로 혀를 차며 애써 착잡함을 감췄다.
한편 발레리안은 그사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클라센.’
입안에서 굴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꽉 옥죄이는 듯한 이름.
발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반쯤은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선황후, 마리아 클라센.
발레리안의 안에서 그녀는 늘 혐오로 가득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더러운 것.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네까짓 것이 발을 들이느냐.’
높은 의자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던 혐오스러운 눈빛.
오로지 순수한 경멸뿐이라 그에게는 더욱 충격이었던 목소리.
선황후는 발레리안을 볼 때면 늘 똑같은 표정과 말만을 반복했다. 혐오와 경멸, 멸시.
그러나 발레리안은 그 어떠한 말에도 반박하거나, 그녀와 감히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가는 ……와 함께 사지를 조각내어 쫓아낼 것이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지금 당장!’
그녀의 분노에는 한 치의 부당함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 * *
‘생각보다 정비가 훨씬 더 잘되어 있네.’
칼리오스는 찻잔을 비운 후, 산책 겸 저택을 구경하겠다는 핑계로 호위 하나만을 달고 에버딘 저택을 누비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소문만으로는 하룻밤조차 묵지 못하고 도망쳐 나올 괴이한 폐가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용인들의 복색은 깨끗했고, 저택은 황궁처럼 화려하지는 않을지언정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멋이 있었다.
물론 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기묘한 한기는 참으로 섬뜩했지만.
명색이 저주를 받았다는 곳이 밝고 따뜻한 분위기였으면 외려 이상했을 것이다.
그는 최대한 노골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투명 신사 이야기를 출판한 서점에 투자했다고 했으니까. 어마어마하게 벌었겠군.’
칼리오스의 아버지인 황제는 ‘투명 신사 이야기’라는 책을 굉장히 탐탁잖아 했다.
‘……쯧, 길거리에 나도는 저급한 글 쪼가리군. 태자, 너는 이따위 통속소설에 눈길도 주지 말거라. 알았느냐?’
황제는 우연히 마주친 사용인이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아 책장을 휘리릭 넘겨 보더니, 곧장 바닥에 내던지며 엄포를 놓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누가 읽어도 자연히 투명 신사에게서 에버딘 공작을 떠올리게 되었고, 에버딘 공작과 그의 영지는 황실의 영광을 위협하는 존재임이 자명했으니까.
칼리오스는 태어난 순간부터 에버딘을 경계하며 자라도록 길러진 ‘황태자’였다.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하여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답도 정해져 있었다. 그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말이다.
잠시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던 칼리오스는 이내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경계심을 늦추지 말자.’
여기는 황궁이 아닌 에버딘 저택.
그에게는 적진의 한복판이다.
칼리오스는 행여 황실에 누가 되는 것은 없는지 전보다 한층 더 결연한 태도로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처음 이상을 감지한 것은 그가 본채의 정원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나무 아래를 지나가던 칼리오스의 머리 위로 돌연 커다란 솔방울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전하, 위험합니다!”
칼리오스의 호위인 황실 친위대 부대장, 칼렙이 대경하며 곧장 검을 뽑아 휘둘렀다.
서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칼리오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솔방울이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칼렙이 다급하게 그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아, 아니. 나는 괜찮네만, 베오폴 경…….”
칼리오스는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짙은 녹색 빛깔을 띤 나뭇잎들이 여름의 바람을 타고 평화롭게 산들거렸다.
정원사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았다는 것이 티가 나는 나무였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별개로 이 나무는 일반 정원수였다.
게다가 이렇게 햇빛이 쨍쨍한 여름에, 소나무도 아닌 나무에서 솔방울이 떨어진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다.
칼리오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칼렙을 돌아보았다. 칼렙 또한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이 주변에 인기척이 있었나?”
“……아뇨. 외람되오나 제 감각에는 전혀…….”
“흐음…….”
칼리오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찝찝한 기분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때 칼리오스와 칼렙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한 단어가 있었다.
유령 공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