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내가 한껏 뿌듯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자 뒤늦게 시선을 알아챈 그가 아차 하며 종이를 들었다.
「조금 지체됐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가실까요, 아가씨?」
“네!”
나는 바쁘게 움직여 메리에게 받아 온 돈으로 할 일을 모두 해치운 뒤 에버딘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정원 한쪽에서 제르비스와 검댕이가 뛰어왔다.
“테리! 왔어?”
“컹!”
검댕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품에 안겨 있던 릭을 향해 달려들었고, 제르비스는 뛰느라 상기된 얼굴로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얘가 머리에 풀을 묻히고 다니네. 저것도 황당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나는 손을 뻗어 제르비스의 머리카락에 들러붙어 있는 풀잎을 떼어 주며 물었다.
“오늘도 검댕이랑 놀았어?”
“응! 정원이 예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제르비스는 이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기뻐하듯 싱그럽게 웃었다.
“……역시 얼른 보내 버려야…….”
곁에서 레딘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도 했는데 이어지는 제르비스의 말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갔던 일은? 잘 됐어?”
“응! 앞으로 밀레시아 제과점에서 ‘유령 쿠키’ 제작을 도맡아 주기로 했어! 이건 계약 선물이라고 준 거지롱.”
나는 손에 들린 쿠키 봉투를 흔들며 씨익 웃었다.
봉투 안에 담긴, 자루 모양 유령 쿠키를 몇 개 꺼내어 제르비스에 입에 물려 주고 그들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시장하시겠네요. 주방장님께서 오늘도 신이 나서 요리를 하고 계시니까 곧 맛있는 식사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마주치는 사용인들마다 만면에 웃음을 띠며 내게 인사했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쿠키를 하나씩 나누어 주며 저택을 돌아다녔다.
‘돈 쓴 보람이 있군.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사용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하나같이 새것에 튼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후후후 웃었다.
‘투명 신사 이야기’가 제국 전체에서 유명해진 만큼, 에버딘 공작가의 사정은 횡령금을 돌려받았을 때보다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나아졌다.
물론 서슴없이 자작령을 사들일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자금이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국의 어엿한 공작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되었다고나 할까.
책의 저자가 나인 것은 숨겼지만, 에버딘 공작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출처는 완전히 숨길 수 없는 노릇.
하여 나는 공식적으로, 아메트리스 후작가와 더불어 에버딘 공작가에서 엠앤제이 서점에 투자하였노라 못 박았다.
메리의 서점은 ‘투명 신사 이야기’를 출판한 뒤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공작가가 벌어들이는 돈의 출처를 미심쩍어하던 이들도 곧 수긍하며 입을 다물었다.
거기에 더불어, 투자를 함께 하는 것으로 아메트리스 후작이 에버딘 공작가의 우방이라는 점을 사방에 알림으로써 귀족들에게 수월히 다가갈 발판도 마련했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을 ‘투명 신사’에 투영하게 만들어서 평판 개선까지 함께 해결!
아직 자작령을 사들이기까진 갈 길이 멀지만,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는 느낌은 들었다.
누가 생각해 낸 건지 참 대단하구먼. 암, 그렇고말고.
나는 기분 좋게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종잇조각에 파묻힌 듯 보이는 공작과 세바스찬, 미나가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복귀했습니다, 주군. 작업은 잘 되어 가십니까, 세바스찬 님?”
나, 제르비스, 레딘이 차례로 말했다.
세바스찬은 종잇조각에 색을 칠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대답은 미나가 했다.
「아가씨, 오셨군요. 레딘 님께서도 해 보실래요? 생각보다 재미있답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종류의 섬세한 작업에는 영 재능이 없어서요.”
미나는 나를 보며 생긋 웃었고 레딘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모자의 색을 한 땀 한 땀 칠하고 있는 공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눈은 안 아프세요?”
「이 정도는 괜찮단다.」
말은 그렇게 해도 꽤 힘에 부치는 일이었는지, 공작이 붓을 내려놓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수많은 종잇조각.
이것들은 유령 쿠키와 함께 선보일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었다.
이름하여 ‘무작위 뽑기.’
레일라는 이걸 보더니 ‘랜덤뽑끼이’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라.
아무튼, 투명 신사의 모자, 몸, 장갑, 바지, 지팡이 등으로 나뉜 이 종잇조각들은 쿠키 하나에 조각 하나가 무작위로 포장되어 판매될 예정이었다.
‘쿠키를 사면 종이 인형의 일부분을 드려요……라고 할까.’
투명 신사를 좋아하는 어린아이, 더 나아가 사람이라면 종이 인형 세트를 완성하기 위해 쿠키를 계속해서 사 먹게 되겠지.
조각 중에 일부에는 ‘투명 신사의 사인’이라는 명목으로 공작의 사인을 적어 놓을 생각이었으니 그것을 탐내는 사람들 또한 몰려들 테고.
공작가의 창고에 쌓일 금화 산이 벌써 눈에 훤했다.
릭이 또 무슨 사악한 계획을 세우는 거냐고 질색할 정도로 기분 좋게 웃고 있는데,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공작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더니 허락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한 표정의 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주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공작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야.”
“그게, 지, 지금……!”
이어진 말은 모두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에버딘령의 경계를 통과하셨답니다! 황제 폐하의 칙서를 들고서요!”
* * *
예고 없는 방문에 저택에는 비상이 걸렸다.
아메트리스 후작이 부탁한 –떠넘긴- 제르비스를 제외하고서는 칩거 후 무려 5년 만에 정식으로 맞이하는 손님인데, 그 손님이 다름 아닌 황태자.
그것도 모자라 황제의 칙서라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최근에 ‘투명 신사 이야기’를 금서로 지정했던 것을 철회하게까지 만들었으니 찔리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미나가 급히 단장해 준, 화사한 원피스 차림으로 정문을 향해 걸었다.
황태자를 맞이하는 자리인지라 차마 릭을 데려올 수가 없어 방에 두었다.
늘 폭신한 감각이 어려 있던 팔이 허전해지자 어쩐지 불안감이 몰려오는 것도 같았다.
<테리, 괜찮아?>
내 곁을 따라오던 셀레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입 모양으로만 괜찮노라 답하며 생긋 웃었다.
이럴 때마다 내게 도움을 줬던 릭이 곁에 없다는 것이 퍽 무섭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니까.
사용인과 기사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정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공작의 곁으로 다가가 서자 그가 설핏 웃더니 종이를 들었다.
「테리. 라바디에 부인에게 황족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에 대해서도 배웠지?」
“네.”
「배운 대로만 해도 괜찮아. 황태자라는 이유로 네가 구태여 고개를 더 숙이지도, 허리를 더 굽히지 않아도 된다. 너는 에버딘이니까. 알겠지?」
발레리안 에버딘은 어느덧 차분하고도 위엄 있는 ‘공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생적인 위엄.
포식자의 눈.
나는 그 든든함에 힘입어 불안함을 떨쳐 내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허리를 곧게 폈다.
한 번 꺾였더라도 에버딘은 여전히 에버딘.
나는, 테레지아 에버딘이다.
‘당당하게. 잘못한 거 없으니까.’
나는 텅 빈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이윽고 대로 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택과 가까워질수록 화려한 마차 한 대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의 표정이 눈에 잘 들어왔다.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들을 본 그들의 얼굴에 처음에는 경악, 그 뒤에는 공포, 끝내는 미약한 경멸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그에 슬쩍 시선을 틀어 옆을 보니 공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동요 없는 얼굴과 달리 장갑을 낀 손은 그의 다리 옆에서 조용히 말아 쥐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테리?”
공작이 대번에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일부러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래도 긴장돼서요. 손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응? 응? 안 돼?
나는 자못 간절한 눈으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딘지 묘한 표정을 짓던 그가 이내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이 실리는 것을 확인한 후 헤헤 웃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사이 마차가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기사들이 마차의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채 검을 뽑아 얼굴 앞에 세웠다.
“위대하신 크렘위든 제국의 작은 태양께, 경배!”
“경배!”
기사들이 힘차게 외치며 검을 한쪽으로 절도 있게 늘어트렸다.
사용인들 또한 그 목소리에 맞추어 허리를 굽혔고, 나와 공작은 고개만 살짝 숙였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리며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아직 앳되었음에도 어딘지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
내 머리카락과 달리, 정말로 황금을 녹여 놓은 듯 색이 진한 금발. 호수처럼 청명한 푸른색의 눈동자.
마차에서 내려 우리의 앞으로 다가온 소년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리고…… 에버딘 공녀.”
그는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 칼리오스 드 램바드 마인하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