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35) (35/124)

<35화>

메리는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미소로 웃으며 입을 뗐다.

“좋습니다. 수익 배분율은 얼마를 원하시나요? 잘 모르신다면 업계 관행인 오 퍼센트로…….”

<누구 동생이라고 이렇게 돈을 밝히는지.>

셀레나가 메리의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손가락을 열 개 폈다. 나는 서늘한 목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천재 앞에서 사기 칠 생각을 하시면 안 되죠. 저는 지금 당장에라도 이 책을 들고 다른 출판사로 갈 수도 있어요. 십 퍼센트.”

“실례지만 올해로 몇 살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숙녀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예요. 십 퍼센트.”

“끄응.”

십 퍼센트여도 오블렌 자작령을 살 돈을 모으기까지 족히 몇 년은 걸릴 텐데, 오 퍼센트?

그러면 아마 내가 죽을 때쯤에나 오블렌 자작령의 끄트머리를 구경할 수 있을 거다.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눈을 부릅뜨며 입을 앙다물자 메리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문질렀다.

“하지만 공녀님. 저희 서점은 규모가 아주 큰 편이 아니라 책의 제작과 유통에 투자하는 금액만 해도 부담이…….”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메트리스 후작가에서 지원해 주기로 했으니까요. 정확히는 투자지만.”

“……아, 아메트리스 후작가요?”

중소 서점의 사장으로서는 상당히 거물의 이름이었던지 메리가 당황을 드러내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품을 뒤적여 종이를 한 장 꺼내어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나, 제론 아메트리스는 테레지아 에버딘의 뜻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을 맹세한다. 그것이 금전이든, 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제론 아메트리스.」

후작의 서명에 인장까지 박힌, 내 말이 명명백백히 진실임이 드러나는 문서.

이것은 아메트리스 후작저를 떠나기 직전, 그를 닦달해 내가 얻어 낸 것이었다.

메리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서류를 바라보았다.

“……노예 계약서?”

“아닙니다.”

나는 정중히 답해 준 후 종이를 다시 품 안으로 갈무리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십 퍼센트 아래로는 절대 안 돼요. 대신 이후에 이 책과 관련해서 벌어질 사업들에 우선 협상권을 줄게요. 물론 이 책의 저자가 저라는 건 비밀로 해 주셔야 하고요.”

공작가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하는 일인데, 이 책의 저자가 에버딘의 후계자인 나라는 것이 알려졌다가는 효과가 반감될 수도 있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용쓰는 꼴 좀 보라며 비웃음당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 그러니 되도록 본명은 숨기는 편이 나았다.

나는 릭과 라바디에 자작 부인에게 배운 대로 차갑고도 오만한, 범접 불가한 위엄을 뽐내는 귀족을 흉내 내려 애썼다.

다행히 잘 먹힌 것인지 메리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원래 이렇게 밑지는 장사는 안 하는데 공녀님께서 귀여우셔서 넘어가 드리는 거예요. 달리 염두에 두고 계신 필명이라도 있나요?”

필명, 필명이라. 헤이튼은 내 이름으로 해도 상관없다며 빨리 재워 주기나 하라던데.

“아지레테 딘버?”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뱉었더니 릭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 이름으로 잘도 숨겨지겠습니다. 뒤집기만 하면 당신 이름인데.>

세상에는 사실이라고 해도 입 밖으로 내뱉어도 되는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단다, 이 꼰대 곰돌이야.

나는 방긋 웃으며 메리 몰래 팔에 힘을 주었다. 이번 엄살은 ‘꽥’이었다.

* * *

셀레나의 친동생 같은 사람이라더니, 정말로 그녀를 닮은 것인지 메리의 추진력은 엄청났다.

나는 수도에 있는 아메트리스 후작과 메리를 연결해 투자금을 지원받도록 하고, 그 돈으로 책을 찍어 냈다.

그렇게 ‘투명 신사 이야기’는 곧 제국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책을…… 아가씨께서 쓰셨다고요? 세상에…….」

미나는 그날 서점을 나서는 내게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하일과 레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책이 대륙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흥행하기까지, 내 예상만큼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이런저런 사소한 일들도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난은 역시…….

‘고, 공녀님! 폐하께서 <투명 신사 이야기>를 금서로 지정하셨다고……!’

황제가 미풍양속을 해치는 통속소설이라며 ‘투명 신사 이야기’를 금서로 지정한 것이려나.

듣자 하니 황궁의 행정관 중 누군가가 그 책을 들고 돌아다니다 황제의 눈에 띈 듯싶었다.

책의 내용이 에버딘 공작가를 연상시켰을 것이 뻔하니 황제는 당연히 기분이 언짢았을 테고.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헤이튼에, 아메트리스 후작까지. 내 말만 믿고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이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며칠 내내 시무룩하게 늘어져 있는 나를 보며 공작과 릭이 안절부절못하기도 했지.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만은 없다고 하던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황제가 ‘투명 신사 이야기’를 금서로 지정한 것이 우리에겐 외려 최고의 홍보가 되어 버렸다.

‘금서 지정이라고?’

‘거의 몇십 년 만의 일 아닌가?’

‘현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쪽으로는 어지간해서는 손 안 대시는 분 아니었어? 대체 그 책이 뭐길래?’

금서 지정 명령이 내려온 초반에는 모두 몸을 사렸다.

하지만 본디 인간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종족.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대체 ‘투명 신사 이야기’가 무슨 책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 은밀한 방법으로 책을 구해 읽는 사람이 늘어났고,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들은 그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주위에 추천하고 다녔다.

음지로 ‘투명 신사 이야기’가 퍼져 나가는 속도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이튼과 머리를 맞대고 일부러 가볍고 쉽게, 어린아이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소설로 만들었으니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빠르게 읽을 수 있었겠지.

그간 어렵고 무겁거나, 아니면 아예 동화책처럼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는 책만 읽던 사람들은 그 중간 즈음에 있는 ‘투명 신사 이야기’에 점차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고난과 역경을 헤치는 과정에서도 제 몸 아끼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구한 ‘투명 신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고, 책은 점차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에버딘 공작가의 재물도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벌써 초판본이 다 팔렸어요, 아가씨!’

메리는 그 소식을 전할 때 말 그대로 입꼬리가 귀에 걸린 얼굴이었다.

그녀가 ‘혁명’이라고 말했듯, <투명 신사 이야기>는 소설로서는 이례적일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메리의 말에 따르자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했다는 점이 이 소설의 포인트라나.

그쯤 되니 제국인들 중에서 ‘투명 신사 이야기’를 읽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힘들 지경이었다.

만약 ‘투명 신사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인다면 당장 농사를 지을 백성조차 없을 정도로.

결국 황제는 부들부들 떨면서 금서 지정 명령을 철회하는 문서에 국새를 찍었고.

그 뒤로는, 뭐 일사천리였지.

나는 창고에 쌓이는 금화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따금 금화를 잔뜩 쌓아 두고 그 위를 굴러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건…….

“받아라, 사악한 마법사야!”

“흥! 내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어림도 없다!”

“으아악! 투명 신사가 사악한 마법사를 죽였다! 꽤액.”

“투명 신사가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쳤다! 꽃을 뿌리자!”

바로 사람들의 태도 변화였다.

어느덧 여름의 한중간.

긴 클로크를 뒤집어쓰고 서점을 나서던 내 눈에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해진 고깔모자를 쓴 아이들, 흰 모자와 흰 망토를 두른 아이들이 역할극을 하며 거리에 종이 가루를 뿌리고 다녔다.

나는 머리 위로 뒤집어쓴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 쓰며 호위로 따라 나온 레딘에게 속삭였다.

“얼른 돌아가요. 혹시라도 저 애들한테 들켰다가는 머리털 한 줌 정도는 뜯길…….”

“헉! 저기 투명 신사다!”

“어디, 어디?”

오, 이런. 레딘의 머리털에 잠시 묵념을.

속으로 짧게 유감을 표하자마자 아이들이 눈을 번뜩이며 레딘에게로 달려들었다.

몇몇 아이는 겁 없이 그의 몸에 타고 오르며 그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기도 했다.

“투명 신사님! 진짜로 머리가 없어요?”

“신사님, 팔 만져 봐도 돼요? 헉, 진짜로 만져져!”

“눈도 없나 봐!”

처음에는 즐겁게 낄낄거리며 아이들이 하던 대로 내버려 두던 레딘은 한 아이가 검지와 중지로 그의 눈이 있는 쪽을 푹 찔러 보려 하자 정색하며 아이들을 떼어 놓았다.

“아이고, 이 녀석아! 남의 몸을 그렇게 막 타고 놀면 쓰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이리 와! 자꾸 신사님을 괴롭히면 못된 마법사가 이놈 한다, 이놈.”

뒤늦게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레딘의 모습을 발견한 부모들이 하나둘 허겁지겁 달려와 아이를 데려갔다.

그들은 레딘에게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하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는 그들의 눈에서 예전과 같은 공포, 혹은 경멸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윗사람에 대한 불편함 정도?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아직도 좀 신기하단 말이지.”

레딘 역시도 이 상황이 신기한지, 사람들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좋아, 이렇게 조금씩 바꿔 나가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