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나는 전후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서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제르비스는 진심으로 나에게 고마워서 그러는 거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연애보다는 가족이 떠오르는 관계였다.
의남매, 라고 하면 비슷하려나?
저 착한 애를 두고 뭐라는 거람. 안경이 필요한 건 공작님이 아니라 레딘 같단 말이지요.
나는 레딘의 시력이 썩 좋지 않다는 사실에 속으로 유감을 표했다.
<테리이.>
그때 갑자기 귓가에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가 슬쩍 밑을 내려다보았다.
어째 릭의 정수리 위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만 같은데, 착각이겠지?
<그 꽃 나한테 줘요.>
“응?”
<그걸 귀에 꽂은 채로 출판사 사장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침착하고 우아하고 어른스러운 후계자처럼 보일 거라면서요?>
아, 맞다. 그랬었지 참. 확실히 귀에 꽃을 꽂고 있다간 우아하게 보일 수 없겠군.
나는 선선히 수긍하며 서점에 들어갈 때 꽃을 빼내어 릭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우리는 풉풉큭큭 거리며 포복절도하는 사람들 –입에 새 꽃을 문 채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도발적인 포즈를 취해 보이는 레딘 탓이 분명했다- 사이를 지나 <엠앤제이>라는 서점으로 향했다.
딸랑-
미하일이 문을 한 손으로 붙잡고 나와 제리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우리는 서점 안으로 한 발을 내딛자마자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나는 약속대로 귓가에 꽂힌 꽃을 릭의 리본 위에 달아 주며 감탄했다.
에버딘 저택의 내 공부방보다 세 배는 커다란 규모의 건물 내부가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사람들과 점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종이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제리는 잠시 꼼지락거리며 미나와 내 눈치를 보더니 미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밝은 얼굴로 책더미 사이로 뛰어갔다.
나도 마음만 같아서는 그 곁에 합류하고 싶었지만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저쪽에 저 점원 보여? 저 점원한테 말하면 돼.>
셀레나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여 주었다.
나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다른 점원들에 비해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나는 셀레나가 볼 수 있도록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을 구경하는 척하며 소녀 쪽으로 다가갔다.
「어머, 여기 좋은 게 있네.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미나는 ‘우리 아이를 패셔니스타로 만드는 법’이라고 적힌 책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활짝 웃어 주고는 그녀가 책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소녀에게 슬쩍 다가갔다.
“어머, 안녕하세요. 혹시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소녀는 몰래 미나를 흘깃거리다가 말고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웃었다.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미리 적어 둔 편지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장님께 편지를 전달하러 왔어요!”
소녀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당황을 표했다.
“네? 사장님이요? 혹시 다른 사람을 착각하신 건 아닌지…….”
“아뇨! 메리 제인 사장님을 찾아온 게 맞으니까, 사장님께 그 편지를 전해 주시면 돼요. 지금은 바람과 흙의 친구가 된, 옛 벗에게서 온 편지라고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소녀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당황하며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더니 이내 기묘한 얼굴로 서점 안쪽을 향해 사라졌다. 꼭 유령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네.
“테리.”
아이고, 깜짝이야.
불현듯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제르비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 있었다.
“뭐 해?”
“아. 이걸 책으로 내고 싶어서.”
나는 내내 품에 안고 있던 책을 내보이며 말했다. 붉은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투명 신사 이야기>? 이게 뭐야?”
“내가 공작님을 주인공으로 쓴 짧은 소설이야! 사람들이 공작님이 너무너무 멋지고 용감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을 것 같아서 써 봤어.”
이건 헤이튼이 그럴싸하게 지어 준 핑계였다.
일부러 부끄러운 척 양손으로 볼을 감싸며 말했더니 제르비스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소녀 점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당황한 얼굴의 그녀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사장님께서 곧장 안쪽으로 모셔 오라고 하셨는데, 괜찮으시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제리, 미나한테는 네가 말 좀 해 줘! 잠깐만 다녀올게!”
나는 제르비스가 무어라 대답을 내뱉기 전 냉큼 소녀의 뒤를 따라 서점의 안쪽으로 향했다. 셀레나가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이윽고 짙은 나무색의 문 앞에 멈춰 선 소녀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모셔 왔습니다.”
“얼른 들여보내.”
날카로운, 하지만 악의라기보다는 초조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문을 열었고 그 사이로 발을 내디딘 후 고개를 들었다.
<……어째 야윈 것 같네, 우리 메리.>
셀레나는 꽉 잠긴 목소리를 내며 푸스스 웃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선 사람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눈을 치켜떴다.
“보는 눈이 많아 이곳으로 모시긴 했지만, 대체…… 대체 어떻게 당신이 이 편지를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이곳의 사장, 메리 제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한 손에는 구겨진 편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더한 오해를 사기 전에 얼른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헤헤 웃었다.
“안녕하세요, 제인 사장님! 저는 테레지아 에버딘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하지만 만나면 우선 인사부터 하는 게 예의라고 배워서요. 이제 앉아도 되죠?”
가볍게 대답한 후 소파로 꾸물꾸물 올라가 앉았다.
아이고, 이제야 좀 편하네. 저택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꽤 되었던 터라 발바닥이 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차를 탈 걸 그랬나. 그래도 제리가 거리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음.’
메리는 잠시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다.
그녀가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다른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면 이제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어디서 나셨습니까, 이 편지?”
“출입 금지 숲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웠는데, 알고 보니 아리에타 백작 사건의 피해자가 흘린 거라고 해서요. 주인을 찾아 줘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마침 부탁할 사람도 필요했으니까.”
메리는 ‘아리에타 백작’이라는 말을 듣고는 한순간 이를 갈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살아생전 친자매만큼이나 친하게 지낸 사람이 맞기는 하구나 싶었다.
<어휴, 왜 애꿎은 애한테 짜증을 내고 그런담. 테리, 원래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지금은 좀 상태가 나빠서 그래.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는 마.>
셀레나가 메리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블렌 자작이 위협하던 것에 비하면 저것은 짜증조차 못 되었으므로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메리는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물기로 일렁이는 눈으로 설핏 웃음 지었다.
“편지를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별말씀을요. 물건을 잃어버리면 꼭 주인을 찾아 줘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훌륭하시네요. 그나저나 제게 부탁할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죠.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화제였다.
나는 눈을 빛내며 최대한 호기로운 모습으로 품 안의 책을 테이블 위에 탕! 하고 올려놓았다.
“이걸 책으로 내 주세요.”
“……이게 뭔가요? <투명 신사 이야기>?”
메리는 미심쩍은 눈으로 붉은 책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제가 공작님을 생각하며 직접 쓴 거예요. 사람들이 공작님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아줬으면 해서요.”
방긋방긋 웃으며 설명하는데 메리가 불현듯 픽 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감정으로 일렁이던 그녀의 눈은 어느덧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메리는 손에 쥔 붉은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표지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저는 가치 없는 작품에 투자하지 않습니다만.”
나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답했다.
“우선 한번 읽어 보세요. 분명 마음에 드실걸요? 전 천재니까.”
“푸흡.”
왜 웃지? 난 진심이었는데?
입을 삐죽 내밀고 메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책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녀가 책을 읽는 사이 아까의 소녀 점원이 가져다준 과일 주스를 홀짝이며 태평하게 기다렸다.
이백구십일, 이백구십이. 속으로 숫자를 얼마나 세었을까.
“이, 이, 이건…….”
책을 쥔 메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싶더니 그녀가 책을 테이블 위에 쾅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건 혁명이에요! 혁명이라고요!”
“훗.”
사실 오롯이 내 힘으로 쓴 건 아니지만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 자체는 내가 생각한 것이니 저 칭찬은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역시 난 천재였어. 테레지아 에버딘의 빛나는 재능에 건배!
한껏 우쭐해져 콧대를 세우는 내게 메리가 흥분해 말을 다다다 내뱉었다.
“사악한 마법사의 저주로 사람들에게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저주에 걸린 신사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도중 독이 든 사과를 먹고 탑 꼭대기에 갇히지만 결국에는 역경을 딛고 저주를 푸는 과정까지 이렇게 매끄럽게 전개되다니! 혹시 다음 권은 없나요? 연작을 쓰실 계획은?”
“없어요.”
“이런.”
헤이튼이 이 짓도 두 번은 못 한다고 드러누웠으니 후속편이 나올 일은 없다.
단호히 고개를 젓자 메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