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33) (33/124)

<33화>

<……성불?>

“죽은 자들의 땅으로 떠나게 도와드리겠다는 뜻이에요. 영원한 안식을 찾고, 다음 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땅으로.”

현재의 헤이튼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제안은 없겠지.

죽은 자들의 땅. 그곳으로 가면 유령이 되어 버려 이루지 못하던 잠도 실컷 이룰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어떻게…….>

헤이튼은 내가 영 못 미더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았다.

그의 의심을 지워 낸 것은 셀레나였다.

<진짜야. 저 아이는 유령을 성불시킬 수 있어. 이번에 아메트리스 저택에 따라갔다가 직접 봤으니 확실해.>

<저, 정말로…… 쉴 수 있다고?>

그녀의 말에 내내 퍼석하게 메말라 있던 헤이튼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대체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럴까. 나는 조금 짠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정말로요. 릭을 걸고 약속할게요.”

<제르비스 그 사람을 저당 잡았다던 후작이나, 날 저당 잡는 당신이나.>

릭은 심술 어린 손길로 내 팔을 한번 툭 치더니 한탄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후작이랑 나를 비교하면 안 되지!

분노로 팔에 바짝 힘을 주자 그가 또 아이고 아이고 하며 엄살을 피웠다.

<좋아, 좋다! 내가 뭘 하면 되지?>

헤이튼은 무척 의욕적인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는 눈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제가 이야기해 드리는 내용을 소설 한 권으로만 만들어 주시면 돼요.”

성불하기, 참 쉽죠?

* * *

처음에 내 말을 들은 헤이튼은 다시 펜을 쥐어야 한다니 끔찍하다며 발광했으나 곧 체념한 얼굴로 릭이 내미는 깃펜을 받아 들었다.

<좋아, 이렇게 된 거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작이 되게 해 주지.>

헤이튼의 두 눈은 의지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는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집요하게 원고를 쓰고 고치길 반복했다.

왜 생전에 과로사로 죽었는지 알 법한 모습이었다.

헤이튼이 내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다듬고, 살을 붙이고, 다시 글로 가다듬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사이 제르비스와 함께 매일 같이 열심히 먹고,

아침에는 세바스찬과 함께 에버딘 영지에 관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예법과 교양 수업 등을 들으며 하루를 바삐 지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제르비스 역시 꽤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의 초입을 알리는 어느 날.

<……끝났다.>

헤이튼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깃펜을 탁 내려놓았다.

나는 미나가 새로 만들어 준 시원한 소재의 옷을 입고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잘 먹고 잘 뛰어논 덕인지, 소매 아래로 언뜻 보이는 팔에는 예전과 달리 적당히 살집이 올라 있었다.

“다 된 거예요?”

<그래. 이제 정말…… 완성이다. 완결이라고! 만세!>

헤이튼은 잠시간 벅차오른 얼굴로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는 얼른 소파에서 내려와 그가 앉아 있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셀레나가 힘을 불어넣어 준 덕에 헤이튼이 쓸 수 있게 된 ‘진짜’ 깃펜은 어느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진한 붉은색의 표지로 된 책에 적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 신사 이야기>

좋아, 드디어 완성이다!

나는 헤이튼 못지않게 기쁜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 방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주위에서 우리를 구경하던 자루 모양 유령들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우리를 따라 하는 바람에 잠시간 방 안은 기차놀이를 하듯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유령들 –그 사이에 낀 나– 로 소란스러웠다.

그렇게 한바탕 기쁨을 나눈 우리는 기진맥진해져서 소파에 나란히 늘어졌다.

헤이튼은 홀가분한 얼굴로 널브러지듯 누워 있다가 턱짓으로 책상 위에 놓인 책을 까딱 가리켰다.

<그나저나 저건 언제 출판사에 가져다주려고? 출판사야 셀레나가 추천한 곳이 있으니 고민할 필요 없겠다만.>

나는 소파 위에 반쯤 녹아내려 있다가 그 말에 손가락을 하나둘 꼽아보았다.

흠, 일단 오늘 아침에 제리한테 콩 먹였고.

오전에 세바스찬의 숙제도 만점 받았고.

오후에 라바디에 부인에게 다도 예절은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칭찬도 받았고.

세바스찬과 라바디에 부인이 모두 드물게도 숙제를 내 주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오늘이 적기이지 싶은데?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켜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내 옆에 늘어져 있던 릭을 챙겨 품에 안으니 셀레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바로 가게?>

“네! 마침 당장 해야 할 일도 없으니까요.”

<그래, 그럼.>

나는 등 뒤에 셀레나를 단 채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저 왔어요!”

큰 소리로 인사하며 활짝 문을 열었다.

공작은 세바스찬과 함께 서류 더미 사이에 파묻혀 있다가 반가이 고개를 들었다.

「테리 왔니. 우유에 꿀이라도 타 줄까?」

“아뇨! 물론 그것도 좋은데 지금은 어딜 좀 다녀오고 싶어서요.”

「바깥에 나가려는 거니?」

공작의 눈에 언뜻 그림자가 졌다.

일전, 셀레나의 시신을 찾기 위해 멋대로 사람들을 따돌리고 숲에 다녀온 사건을 떠올리는 듯했다.

나는 눈을 도로록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하다가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제리! 제리가 새로 읽을 책이 필요하다고, 서점에 구경 가고 싶댔는데!”

셀레나가 추천해 준 출판사는 1층에 서점이 붙어 있는 구조라고 했다.

그러니 저번처럼 사람들을 크게 걱정시킬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굳이 감춰야 할 일도 아니었고.

나는 이런 기가 막힌 핑계를 생각해 낸 스스로가 뿌듯해서 코 밑을 손가락으로 훑고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공작은 어째서인지 조금 전보다 한결 싸늘한 얼굴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안 돼. 기각.」

“엥! 왜요?”

「제리는 아직 몸이 약하단다. 그러니 차라리 너와 미나 둘만 다녀오는 편이 좋겠구나.」

저게 뭔 소리야. 나는 어이가 없어 눈을 끔벅였다.

제르비스는 최근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

에버딘 저택으로 온 직후에는 아무래도 유령이 달라붙어 있던 후유증인지 자주 피곤해했는데, 요즘에는 혈색도 좋아지고 곧잘 바깥에서 뛰놀았다.

가끔 나보다 빨리 내달릴 때도 있는데 약하긴 무슨?

눈을 가늘게 뜨고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안경 너머로 흠칫하며 눈을 깜박이더니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에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제가 아무거나 적당한 책으로 골라서 하나 선물해야겠다.”

「……선물?」

그런데 공작은 여전히, 아니, 솔직히 조금 전보다도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내 그가 세상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새로이 글을 적어 내렸다.

「아니다, 미하일과 레딘을 붙여 줄 테니 함께 다녀오거라. 아직 어린아이라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건 자기 손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하는 법이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주인님.」

뭐죠, 저 빠른 태세 전환은?

내가 황당해하건 말건 세바스찬은 한술 더 떠서 공작의 말에 동조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까지 곁들였다. 대체 뭐람.

아무튼 이런저런 고난이 있었지만, 나는 제리와 함께 무사히 상업지구로 나올 수 있었다.

‘여기도 되게 오랜만이네.’

나는 품에 <투명 신사 이야기>를 꼭 끌어안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간 이것저것 배울 것도 할 것도 많아 바쁘게 움직였더니 거리의 풍경은 많이 변해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고, 화사한 여름꽃들이 이곳저곳에 만발해 있었다.

나는 우선 미나, 미하일, 레딘을 위해 화사한 해바라기를 세 송이 사서 그들의 머리에 각각 꽂아 주었다.

예전에 사 주었던 장식들은 혹여 닳기라도 할까 봐 쓸 수 없다니 별수 있나.

「감사합니다, 아가씨.」

미나는 평범하게 꽃을 귀 옆에 꽂았고, 미하일은 정수리에 얹었으며, 레딘은 가로로 입에 물었다.

「이거 좋네요, 아가씨. 감사합니다.」

……솔직히 좀 미친 사람 같았다. 셀레나는 몸을 뒤집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었지만.

“테리.”

그때였다. 바구니에 예쁘게 꽂혀 있는 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제르비스가 돌연 나를 불렀다.

“응?”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제르비스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무언가 귓가를 간질였다.

“이게 뭐야?”

놀라서 귓가를 더듬거리자 짙은 꽃향기가 코끝에 닿아 왔다.

제르비스는 귀엽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는 가판대의 주인에게 값을 치렀다.

그리고 내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아빠가 말해 줬어. 네가 나를 구했으니까 너한테 잘해 주라고.”

“아하, 그랬구나.”

“응. 구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인사가 늦어서 미안해.”

제르비스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이 이전과는 달리 생기로 넘쳤던지라 괜스레 마음이 푸근해졌다.

‘인맥 하나는 잘 골랐지, 내가. 아암.’

그가 내 귀에 꽂아 준 꽃은 흰빛을 띠는 분홍색의 장미였다.

아까 해바라기를 고르기 전 유독 눈에 띄어 잠시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그건 또 어찌 알았담.

기분 좋게 꽃잎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돌연 레딘이 에퉤퉤 소리를 냈다. 미하일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는 왜 갈고 난리야. 아가씨께서 기껏 선물해 준 꽃이 못 쓰게 되었잖느냐.”

“에펩, 에퉤퉤. 아으, 써. 아니,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저 망할 놈이 우리 아가씨한테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데!”

“콜록.”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작게 기침했다가 황급히 호흡을 골랐다.

뭐, 뭐요? 누가 수작을 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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