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으나 겉으로는 릭을 달래기 위해 해사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네가 백 배는 더 잘생겼을 것 같아! 정말로!”
<당연하죠. 저도 기억은 없지만, 왠지 느낌이 그럽니다. 제가 제르비스 저놈…… 저 사람보다 잘생겼어요.>
얼씨구. 아까는 삐져서 말도 안 하더니 이제는 신났네.
나는 릭을 고쳐 안고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그래그래, 응응 등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다행히 릭은 그것으로도 기분이 꽤 풀린 듯 내 팔을 손으로 통통 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귀여운 자식.
곧 나는 수업이 이루어질 방에 도착했다.
“저 왔어요!”
나는 한쪽에서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고 있던 세바스찬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편하게 앉으시지요. 오늘은 첫날이니 가볍게 진행할 겁니다.」
확실히 가네스 남작의 수업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게는 세바스찬이 훨씬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쿠션을 여러 겹 겹쳐 등 뒤에 받치고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릭을 무릎에 앉히고 앞을 바라보자 세바스찬이 한 손으로 모노클을 추켜 올리며 분필로 칠판을 탁탁 두드렸다.
어느덧 그의 얼굴은 다정하지만 진중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영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가네스 남작…… 에게서 대강 습득하셨을 테니, 오늘은 에버딘의 가신 가문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네!”
세바스찬은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수업 시간 동안 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설명을 이어 갔다.
그 덕에 굳이 여러 번 반복할 필요 없이 내 머릿속에는 필요한 지식만이 쏙쏙 채워졌다.
유능한 당신의 모노클에 포도 주스로 건배!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다른 곳은 몰라도 벡타, 디프린, 헤지우드 가문의 최신 명부는 꼭 숙지해 두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배꼽 위에 손을 얹어 인사했다.
홀홀홀 웃던 그가 칠판을 닦아 정리하며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네. 점심 먹을 때까지는 여기서 책을 조금 더 읽다가 가려고요. 세바스찬은 먼저 가셔도 돼요!”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미나에게는 아가씨께서 여기에 계신다고 일러두겠습니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세바스찬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한 뒤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나는 문이 틈 없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려 눈을 빛냈다.
‘좋아.’
이제부터 정말로 ‘공작가 창고 채워 넣기’ 작전 시작이다!
3. 투명 신사
‘일단 돈을 버는 게 먼저야.’
대개 귀족이라면 돈보다는 명예가 우선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귀족가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우리는 아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명예를 쌓으려 해 봐야 파도 앞에 모래성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우리는 귀족들의 관심을 끄는 것.
즉, 그들이 이쪽을 의식할 만큼의 돈을 버는 것이 우선이었다.
문제는 현재 ‘유령 공작가’의 사업이라고 하면 꺼림칙하게 여기기부터 할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건데, 으으음.
“누구한테 잘 보이려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작게 중얼거리며 턱을 문질러 보았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는 고민에 잠긴 채 넓은 책장 앞을 천천히 거닐었다.
오블렌 저택의 유령들은 책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스승이라고 곧잘 말하곤 했지.
혹시 이 중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높은 곳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은 셀레나에게 불러 달라 부탁하며 책장을 훑었다.
그러다가 조금 특이한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책들을 쓸던 손을 우뚝 멈췄다.
“음?”
반사적으로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는 손을 뻗어 짙은 녹색 표지의 책을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인지 책 위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왕자님은 용이 싫어요]
……뭐지, 이 괴리감은?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다시금 주위를 살펴보았다.
[제국 정세에 대한 이해], [대륙 눈축제의 기원] 등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책들 한가운데 이런 것이 꽂혀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있나.
‘설마 공작이 어렸을 때 읽던 책인가?’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책의 제목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릭을 바라보고, 다시 책을 내려다보기를 몇 번 반복했다.
아이라곤 없는 저택에 곰 인형이 있었던 것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공작도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겠지. 새삼 그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흐음.’
무슨 내용일까. 문득 호기심이 들어 책을 펼쳐 보았다.
‘……그냥 동화네?’
에이. 실망스러운 마음에 책장을 팔락팔락 넘겨 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옛날 옛날에 아름다운 왕자님이 살았고, 왕자님의 아름다움을 시기한 마룡이 그를 잡아갔고, 왕자님과 결혼이 약속되어 있던 공주님이 마룡을 베고 왕자를 구해 온 뒤 용사라고 불렸다는 평범한…….
잠깐, 용사?
“이거다!”
머릿속에 순간 해결책이 번뜩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자 셀레나가 놀라 천장까지 펄쩍 뛰어올랐다.
<깜짝이야! 그나저나 뭐가 ‘이거’라는 거니, 테리?>
“셀레나, 셀레나! 혹시 저택의 유령 중에 소설이라던가, 글을 쓰던 사람은 없어요?”
<글? 글이라면…… 아, 한 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래?>
셀레나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란 마음을 달래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사악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분명 대박이 날 거라는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된 ‘소설’로 엮어 내기에는 아직 문장력이라던가 하는 것이 부족했다.
소재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그것을 표현해 내는 능력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니까.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조금 전에 아주 명문이 될 만한 소재가 하나 떠올랐거든요.”
협업이랍니다!
* * *
셀레나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 도착한 곳은 저택의 동쪽 별채 구석진 곳에 있는 창고였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한 방 한가운데에는 길쭉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근처에 목재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아, 이번에 저택을 수리할 때 재료를 담아 옮겨 온 상자인 듯했다.
길쭉한 상자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보통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일 거란 소리다.
상자 안에는, 내가 일전에 야외 연무장에서 보았던 빼빼 마른 멸치 같은 남자가 양팔을 교차해 가슴 위에 올린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저건 무슨 자세지? 그나저나 자는 건가? 유령은 잠이 없는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셀레나가 남자의 귓가로 고개를 숙이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헤이튼-!>
<흐아아아악!>
남자, 헤이튼은 눈을 번쩍 뜨더니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셀레나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팍 썼다.
<뭐야! 뭔데! 이번에야말로 346087번의 시도 끝에 잠들 수 있을까 했더니 왜 방해하는 거야!>
<그만 포기하지 그래? 어차피 유령은 못 잔다니까 그러네.>
<시꺼! 난 잘 거야! 잘 거라고! 마감이고 뭐고 더는 못 해! 글 쓰다가 힘들어서 뒤진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젠 제발 잠 좀 자자! 잠 좀! 자자고!>
헤이튼은 손가락으로 제 눈 밑을 가리키며 사납게 버럭 댔다.
과장이 아니라 그의 눈 밑으로는 정말 새까만 그늘이 코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나는 그가 셀레나에게 한껏 으르렁대다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에 얼른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헤이튼 아저씨!”
<히이익! 이게 뭐……! 아, 뭐야. 공녀인지 뭔지 걔였군.>
헤이튼은 잠시 산 사람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데에 기겁하다가 곧 빠르게 평정을 찾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가 미심쩍은 눈으로 날 보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뭐야, 나를 찾은 게 너냐?>
“네!”
<내 단잠을 깨운 것도 너겠군.>
“그건 셀레나요!”
<……테리이.>
셀레나가 팔짱을 끼고는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미안해요, 셀레나! 일단 이쪽부터 설득하고 나서 제대로 사과할게요!
속으로 그렇게 사과한 뒤 자못 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데 잠이 주무시고 싶은 거예요?”
<……어. 알았으면 이만 가라. 너 때문에 내 346087번의 도전이 무산됐잖아.>
헤이튼은 잔뜩 투덜거리더니 나방 쫓듯 손을 휘적휘적 내젓고 다시 상자 안에 몸을 눕혔다.
양팔을 다소곳하게 겹쳐 가슴에 올려놓고는 저주로 인해 잠들었다는 왕자처럼 눈을 감는 품이 퍽 익숙해 보였다.
후후. 유령은 잠을 잘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의식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게 피곤하고 싫다는 거지?
나는 셀레나처럼 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 밝게 외쳤다.
“그럼 제가 영원히 재워 드릴게요!”
<뭐?>
<쿨럭.>
예상대로 헤이튼이 눈을 번쩍 뜨고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릭은 작게 기침하더니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테리, 설득이 아니라 협박을 하러 온 거였습니까?>
“아니? 설득 맞는데?”
<그게 어떻게 설득…….>
“왜냐하면 지금 헤이튼 아저씨가 가장 바라는 게 그거일 테니까. 맞죠?”
나는 빙그레 웃으며 헤이튼을 돌아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눈을 빛내며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밀고 말했다.
“헤이튼 아저씨. 만약 저를 도와주시면, 제가 아저씨를 성불시켜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