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오잉. 에버딘 저택에 와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대체 누구길래 미나가 이렇게 당황해하는 거지?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활짝 열려 있는 정문, 그리고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문 바깥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보자, 보자…… 응?”
나는 ‘손님’이 누구인지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놀라 멈춰 섰다.
<……저놈이 왜 여길?>
릭이 대번에 사나운 목소리를 내며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정문 앞에 서 있는 작은 인영.
그는 제르비스 아메트리스였다.
“쟤가 왜 여깄지?”
사용인들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물러나 길을 만들어 주었다.
사용인들의 가장 앞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그는 제르비스의 앞을 막듯 서 있었다.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공작보다 제르비스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테리.”
제르비스는 나를 보자마자 사르르 눈을 접어 웃음을 흘렸다.
그 행동에 공작이 뒤를 돌았다.
그는 순간 흠칫할 정도로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표정을 풀었다.
“저 왔어요. 안녕, 제리!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나는 얼른 공작의 옆으로 다가가 서며 물었다.
그러자 제르비스가 손에 꼭 쥐고 있던 편지를 내 손에 들려 주었다.
“이게 뭐야?”
“아빠 편지.”
“후작님이? 나한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공작이 거하게 한숨을 쉬더니 무어라 글을 적어 내게 보여 주었다.
「후작의 편지를 꼭 네게 전해 주어야겠다며 버티더구나. 읽어 보렴.」
“네!”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편지를 뜯었다.
후작의 성격을 무척 반영한 듯 자유분방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테레지아 에버딘 공녀에게.
공녀, 나야. 편지는 잘 받았나?
하긴, 발레리안이 이 편지를 먼저 받았다면 진즉 찢어 버렸을 테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제리가 내 말을 잘 따라 주었다는 거겠지. 기특한 녀석.]
후작의 안에서 공작의 이미지가……?
나는 내 곁에 서서 편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공작을 힐긋 일별한 후 다시 시선을 내렸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제리 녀석 때문에 반년간 영지에 박혀 있느라 밀린 일이 좀 많거든.
그래서 당분간은 수도에 올라가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 제리를 에버딘 저택에서 좀 맡아 줬으면 좋겠어.
아내가 집에 있었다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지금 제리의 약을 구하기 위해서 남부 저쪽에 가 있어서 말이지.
그곳에서 벌였던 일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오려면 좀 걸릴 거야.
이웃 좋다는 말이 왜 있겠어, 그렇지? 저 어린애를 혼자 아메트리스 저택에 두지는 않을 거라 믿어.
참, 나 이미 집에 없다. 발레리안한테는 돌려보내 봤자 저택 문이 잠겨 있을 거라고 전해 줘!
하하, 하하하!
-제론 아메트리스]
오…… 이게 공작을 고혈압으로 암살하려 한 편지라면 정말 잘 쓴 편지인걸?
* * *
아메트리스 후작의 예상은 정확했다.
‘제론, 이 미친놈이.’
공작은 내게서 아메트리스 후작의 편지를 넘겨받아 읽고는 곧장 반으로 찢어 버렸다.
그는 그 직후 화들짝 놀라 내 눈치를 보았으나 이미 찢어진 편지를 돌이킬 방도는 없었다.
「미안하다, 테리.」
공작이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건넨 사과에 나는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공작이었어도 똑같은 반응이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그 후로 제르비스는 정말로 에버딘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제리, 이것도 먹어.”
나는 아직 회복기에 있어서인지 잘 먹지 못하고 깨작거리는 제르비스의 앞으로 고기 접시를 밀어 주었다.
네가 건강해야 내가 너를 이렇게도 써먹고 저렇게도 써먹을 수 있지 않겠니. 잘 먹고 빨리 나아서 내 죄책감을 없애 주렴.
제르비스는 내가 접시를 밀어 주자 포크를 물고 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먹으라고?”
“응!”
“너 고기 좋아한다며.”
“그래도 널 위해서 이만큼은 양보할 수 있어.”
“…….”
그는 감명받은 듯한 눈을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기를 열심히 집어 먹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것인지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좋아, 좋아. 내가 만족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옆얼굴이 따가웠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공작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음……?’
핫. 저 시선의 의미는 설마!
나는 공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후추 통과 수프 접시를 내 앞으로 끌어와서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후추탕을 제조했다.
“공작님, 이거 드세요!”
나는 활짝 웃으며 공작의 앞으로 수프 접시를 밀어 주었다.
그는 잠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얼굴로 제 앞에 놓인 후추탕을 바라보다가, 이내 풀어진 웃음을 지으며 스푼을 들었다.
‘저렇게까지 감동하지는 않아도 되는데.’
훗, 이거 참 쑥스럽군.
나는 검지로 코 밑을 쓱 훔치고는 부지런히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공작과 제르비스를 번갈아 챙겨 주다가 보니 아침 식사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따가 봐, 제리!”
“응.”
나는 제르비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오전 수업이 이루어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르비스는 아직 몸이 무척 약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회복에 집중하게 두어야 한다는 주치의의 의견이 그 이유였다.
무척이나 긴 기다림 끝에, 내 오전 교육 선생님은 세바스찬으로 결정됐다.
「주인님께서 아가씨가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 때까지는 이 이상 외부 인력을 끌어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세바스찬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설명했다.
타이밍이 왠지 공교롭다 싶긴 했지만 영 납득하지 못 할 말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릭 얘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식당에서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문득 의아해져 품에 안고 있던 릭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릭.”
<…….>
“릭? 자?”
<…….>
“헉, 설마 죽었어?”
<아하하하!>
놀라 외치자 셀레나가 옆에서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었다.
그녀는 눈꼬리에 작게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걔 안 죽었어, 테리. 그냥 삐진 거야.>
“삐져요? 왜?”
<글쎄, 왜일까. 나는 잘 모르겠네! 힘내 봐!>
셀레나는 귀여워 죽겠다며 나와 릭의 머리를 부비부비 쓰다듬고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하여간 매번 두리뭉실한 말만 하고.
나는 입을 삐죽이고 다시 손에 쥔 릭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릭은 정말 인형처럼 팔다리를 흐느적거릴 뿐 대꾸가 없었다.
슬슬 심술이 돋았다. 절로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계속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리이이이익.”
받아라! 치근덕대기!
릭은 언젠가부터 내가 본인에게 필요 이상 접촉하는 것을 무척 껄끄러워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를 세게 끌어안은 채 릭의 볼에 내 뺨을 양껏 비볐다. 반응은 곧장 돌아왔다.
<그만! 그만!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만해요! 떨어져어억.>
릭은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내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나는 그가 입을 여는 것을 확인하고 볼을 떼어 냈다.
“이제 화 풀렸어?”
<화 난 적 없는데요.>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눈을 세모꼴로 뜨고 릭을 노려보자 그가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화난 거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냥, 뭐?”
<……그냥 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게 새삼 서글퍼져서 그럽니다.>
아.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눈꼬리가 내려왔다.
릭이 이런 식으로 서글퍼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영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아주 어른은 아닌 것 같은데, 또 가끔 말하는 걸 보면 완전히 평범한 어린애도 아닌 것 같고…….’
나는 새삼 릭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의 일을 차근히 되짚어 보았다.
곰 인형 속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의 기억은 전혀 없고, 곰 인형에 갇혀 지내기를 4년여.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한들 릭이야말로 자신은 누구인지 등의 의문을 한가득 품고 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제르비스와 내가 사이좋게 어울리는 모습을 본다면 착잡할 법도 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릭.”
<왜 부릅니까.>
“왠지 너는……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신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명쾌한 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미약한 희망으로나마 그를 위로할 수는 있었다.
행여 내 말이 그를 상처 입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그간 보고 겪었던 것들을 바탕으로 차근히 말을 골라 입 밖으로 내었다.
“내가 얘기했지? 보통 유령이라면 사물의 내부에서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고.”
<……그랬죠.>
“그런데 만약 네가 유령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죽은’ 게 아니라면 곰 인형 속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지 않을까? 네 영혼이 몸을 대신할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조차도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한지라 나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재잘댔다.
“만약 네가 살아 있다면 엄청 까칠하고 신경질적이고 깐깐하고 잘생긴 귀족 도련님일 것 같아. 왠지 느낌이 그래.”
<……당신 사실 내 성격이 엄청 까칠하고 신경질적이고 깐깐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군요. 그건 그렇고, 잘생겼다고요?>
“응!”
<제르비스 아메트리스 그 사람보다 더?>
……지금 보니 그냥 내가 자기 말고 다른 친구랑 논다고 삐져 있던 거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