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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30) (30/124)

<30화>

“그나저나 왜 자꾸 참견하시는지? 고옹작님 말씀에 따르자면 혼인은 당사자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닙니까? 제리, 너는 어떠냐?”

후작이 제르비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제르비스는 열 때문인지 볼이 조금 붉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후작이 평소에도 저런 장난을 많이 쳐서 무덤덤한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후작은 신이 나서 혼자 떠들었다.

“제리, 힘내거라. 이 아비는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데릴사위로 들어가도 좋다고 생각…… 으악!”

“이 미친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결국 공작은 후작이 듣지 못할 욕지거리를 지껄이더니 한쪽 소파에 놓여 있던 쿠션을 집어 들고 그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후작은 양팔을 겹쳐 쿠션을 막아 내다가 이내 침대 위의 베개를 집어 들고 맞섰다.

“아하하! 야, 더 해 봐! 더 해 보라니까?”

후작은 낄낄대며 공작의 쿠션 공격을 피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공작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를 뒤쫓아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왠지 둘이 왜 친구였는지 알 것 같군. 나는 그들 모르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 * *

공작과 나는 우여곡절 끝에 아메트리스 저택을 떠나 에버딘 저택으로 돌아왔다.

몸 상태가 확연히 좋아진 제르비스가 정문에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다음에 보자.’

‘그럼, 그럼. 곧 다시 보게 될 게다.’

제르비스의 말에 후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그러다가 공작이 내던지는 깃펜에 얻어맞을 뻔했지만.

‘졸리다.’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을 만끽하며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에 드러누워 있었다.

릭과 검댕이도 내 곁에 드러누워 함께 따끈따끈해지는 중이었다.

요 며칠 미나는 내가 아메트리스 저택에 다녀온 새 살이 쏙 빠졌다며 기함하더니 온갖 기름진 것들을 수시로 식탁에 올렸다.

그 덕에 나도, 공작도 뜻밖에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르는 중이었다. 손가락으로 볼을 쿡 찔러 보자 말랑말랑했다.

‘그때 그 목소리는 뭐였을까.’

볼을 만지작대던 나는 또다시 불쑥 머릿속을 잠식하는 의문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메트리스 저택에서 악마가 내게 달려들던 순간. 나더러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던 목소리.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아무리 기억을 곱씹어 봐도 그것과 같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는데 곁에서 나뭇잎을 입에 문 채 늘어져 있던 레일라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때 악마를 없앴던 힘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멸은 아니었던 것 같단 말이지.>

“뭐?”

눈이 반짝 떠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 누운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소멸이 아니라고요?”

분명 사라지지 않았나?

내심 그때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악마가 ‘소멸’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탓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생각해 봐. 내 힘은 악마들에게만 효과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상대를 해치는 힘이란 말이지. 절대로 네가 봤던 것처럼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니야.>

레일라는 푸른 빛 덩이로 화한 악마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던 것을 상기하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나는 잔디 위에 드러누운 채로 손만 위로 쭉 뻗어 보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 틈새로 햇빛이 반짝였다.

소멸이 아니면, 그러면 그건 대체 뭐지?

감화? ……정신 교육?

이것저것 고민해 보는데 레일라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 세계에서 그런 건 ‘성불’이라고들 했지.>

“……성불?”

<뭐라고 해야 하나. 죽은 사람…… 그러니까, 유령이 편안하게 저승 세계로 떠나거나, 편하게 떠날 수 있게 도와주는 행동 등을 통칭하는 말?>

“헉.”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흡 삼켰다. 떨리는 눈으로 펼쳐진 양손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런 거라고?’

성불이라니, 성불이라니.

그거 꼭…….

“……모르티아 일족이 지녔다던 능력 같잖아?”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중얼거림을 내뱉는 순간 뒷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더 늘어져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설마, 정말로?’

하지만 엄마는 죽기 전까지 모르티아 일족에 관한 이야기라곤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아니면 혹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건 일단 제쳐 두고.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내가 모르티아 일족의 피를 이었다면…….

“못 말해…….”

나는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에게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노라 말할 수 없다.

<무슨 말입니까?>

햇살에 노곤하게 녹아내리던 릭이 내 목소리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그리 물었다.

나는 울적한 기분에 잔디 위에 누워 있는 릭을 끌어당겨 안았다.

따끈따끈하고 폭신폭신한 감촉이 얼굴에 와 닿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왜, 왜 이러…….>

“만약에 내가 정말로 모르티아 일족의 피를 이은 거라면, 저 사람들을 저렇게 만든 게…… 나랑 피가 이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잖아.”

<…….>

“이건 유령을 본다는 게 꺼림칙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야. 저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5년이나 고생하게 만든 사람들이랑 내가, 가족이라는 뜻이라고.”

릭은 또다시 발버둥 치려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하는 말이지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유령을 보는 것 정도야, 꺼림칙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다. 드물겠지만 세상에는 특이한 사람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 당사자가 자신들에게 저주를 내린 사람들과 다름없는 자라면?

나 같으면 절대로 그자를 좋아할 수 없다.

<……테리.>

그때 릭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텁.

다음 순간 릭의 솜뭉치 같은 손이 내 이마를 턱 짚었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자 그가 작게 혀를 찼다.

<역시 인형의 손으로는 아프지도 않겠군요.>

“뭐? 너 설마 나 때리려고 했냐?”

<쓰다듬으려고 한 건데요.>

릭은 뻔뻔하게도 곧장 말을 바꾸고는 손을 거두었다.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보통 평생 얼굴도 모르고, 대화도 나누어 보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는 저기 수도 어딘가에 있을 곰 인형들과 모조리 가족일 겁니다.>

애초에 그거랑 이거랑 같냐.

어이가 없어서 눈을 부릅뜨는데 릭의 말이 이어졌다.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들이, 평생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내다시피 한 모르티아 일족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로 당신을 경멸할 것 같습니까?>

“…….”

<당신도 답을 이미 알고 있잖아요.>

아메트리스 후작이 했던 것과 같은 물음.

네가 본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들이,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었냐는 물음.

나도 안다.

지금껏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들이 내게 보여 준 애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을 만큼 진심이라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내게 보이는 ‘애정’의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과연 에버딘 공작가의 사람들은, 내가 모르티아 일족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좋아할까?

그 사실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아니요’였다.

“……좋아, 결심했어.”

나는 긴긴 고민 끝에 눈을 빛냈다. 릭이 물었다.

<뭘 말입니까?>

“문제가 생겼다면 그 원인을 없애 버리면 되지. 내가 죄책감을 가지는 이유가 모르티아 일족이 내린 저주 때문이라면, 저주를 없애 버리면 되는 거 아냐?”

<아?>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는지 릭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훗, 보아라, 이 누님의 현명함을!

나는 코밑을 손가락으로 쓱 훑은 후 결연하게 말했다.

“공작가 사람들의 저주를 풀어 주고, 그 후에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고 말해야겠어. 그러면 그동안 안 보이는 척 속였던 것도 다 이해해 주겠지.”

<우리 애가 천재예요.>

<맞아, 맞아.>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셀레나와 레일라가 감탄하며 박수를 짝짝짝 쳤다.

나는 잠시간 멋진 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박수갈채를 만끽했다.

“아가씨!”

그때 저택 쪽에서 미나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미나?”

아직 밥 먹을 때 안 됐는데?

내가 시간을 가늠해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미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지금 정문 앞에 손님이 오셨는데, 아가씨를 찾으셔서…….」

“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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