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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29) (29/124)

<29화>

“그런데 공작, 아니, 발레리안 그 녀석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공녀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아니요.”

“왜?”

후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으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는 눈을 한번 도르륵 굴리고는 작게 답했다.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게 반가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나는 에버딘 저택에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겨 왔다.

‘……테리. 남들과 다르다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니란다. 그래서 엄마는 늘 네가 걱정이야.’

어딘지 서글픈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던 엄마의 말.

‘얘, 너 ‘그’ 소문 들었어?’

‘아아, 자기가 죽은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다느니, 대화를 나누게 해 준다더니 하던 그 사기꾼 노파?’

복도를 거닐던 자작저 사용인들의 숙덕거림.

죽음이라는 것은 명백히 인간의 삶과 분리된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또 피하고자 하는 것.

그러니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들을 보고,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결코 좋은 일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사람 된 도리였다고는 하지만, 제가 도움을 드린 건 사실이니까 나중에 제가 시행하는 사업에 솔선수범해서 투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후작님이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의 비밀을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파렴치하고 악랄하고 후안무치한 사람은 아니리라 믿어요. 그쵸?”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후작을 노려보았다.

더불어 검지와 중지를 펼쳐 내 눈을 가리켰다가 그를 가리켰다.

당신, 내가, 지켜볼 거야.

하지만 그는 어딘지 황당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심술궂게 웃었다.

“그런데, 그런 거면 날 도와주기 전에 말했어야 하지 않나?”

“네?”

저게 뭔 소리람?

내가 어리둥절하게 후작을 바라보자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그렇잖아. 유령…… 이 사라졌다니 제르비스는 이제 더 아플 일이 없을 테고. 나는 아들이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게 됐지. 협박을 하려거든 도와주기 전에 했어야지.”

“엩.”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양손으로 급히 입을 막아 보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헉. 크, 큰일 났다!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제르비스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살려야 된다는 생각만 하다 보니 순서를 바꿔 버렸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나는 곧장 태도를 바꾸어 울상을 지었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푸흡. 푸하하하!”

그러자 내내 스산한 표정을 짓고 있던 후작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배를 잡고 부들부들 떨더니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 그 바람에 빈 찻잔이 위태롭게 덜컥였다.

뭐야, 놀린 거였냐!

나는 대번에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고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그는 웃다가 말고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또 한 번 박장대소했다.

“아, 크흡. 아흐흑. 흠, 흠. 큽.”

후작은 내가 조용히 찻잔을 집어 던지려 할 때가 되어서야 웃음을 그쳤다.

어찌어찌 웃음을 갈무리한 후작이 눈꼬리에 배어난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네?”

“말하지 않겠습니다. 리안 그 녀석한테도 그렇고 아무한테도요.”

나는 대번에 화색을 띠며 눈을 반짝 빛냈다.

“정말요?”

“아뇨.”

“힝.”

“푸하핫!”

저 인간이 정말.

나는 또다시 낄낄대기 시작한 후작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내가 공작의 유일한 친구 –아마도– 의 인성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하고 있을 때였다.

후작이 돌연 움찔할 만큼 어른스럽게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정말로 말 안 하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 하는 부탁을 나 몰라라 할 정도로 파렴치하고 사악하고 후안무치하지는 않습니다. 제리를 걸고 약속하죠.”

“제리는 무슨 죄로 후작님의 양심선언에 저당 잡혀야 하는 거죠……?”

“푸흡, 아니, 미안합니다. 어쩌다가 리안 녀석한테 이런 애늙은이 같은 딸이 생겼는지.”

손 내려라. 문다.

나는 이를 드러내며 후작의 손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가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슬그머니 거두어들였다.

그래도 다행이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킬 때였다.

불현듯 진지한 얼굴을 한 아메트리스 후작이 손등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런데 공녀.”

“왜요.”

“공녀가 보기에는, 발레리안과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이 당신이 유령을 본다는 사실을 알면 싫어할 것 같습니까?”

“어…….”

그 물음에 한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잠깐만, 그러니까, 만약에 공작을 비롯한 공작가의 사람들이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괴물!’

‘악령!’

‘못된 어린이!’

음, 그 사람들이 혐오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가는데?

“아뇨……?”

나는 머뭇거린 끝에 반신반의하며 답했다.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이건 발레리안과 이십 년 넘게 친구를 해 온 내 감입니다. 그 녀석은 절대 공녀를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정말로 그럴까?

기이하게 마음이 울렁였다.

나는 이 이상 평정을 잃기 전에 고개를 휘휘 내저어 묘한 기분을 떨쳐 내고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절교당한 지 5년 되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건, 내가 아니라 발레리안 그 녀석이 먼저 연락을 끊은 겁니다! 자기가 유령이 됐다고 내가 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쫌생이 같은 놈.”

내 말에 후작이 대번에 발끈하며 투덜댔다. 듣던 나는 황당함에 입을 작게 벌렸다.

아니, 애 상대로 장난질이나 치던 사람이 지금 누구더러 쫌생이래?

나는 또다시 슬그머니 내 머리 위로 올라오려던 그의 손을 차닥 쳐 내며 아르릉거렸다. 후작은 억울해했다.

* * *

시간이 흘러 날이 밝고, 제르비스가 깨어났다.

침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움직이던 후작이 얼른 소년에게 다가갔다.

“아들! 몸은 좀 어떠냐. 괜찮아?”

“어…….”

제르비스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어리둥절하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고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평소보다 훨씬…… 몸이 가벼운 것 같아요.”

“하…….”

후작은 그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긴장이 풀린 듯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나는 방 한쪽에 공작과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혹시 싶었는데 이제 정말 걱정할 필요 없겠어.

“아.”

그때,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제르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간 그와 시선을 맞춘 채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직후 시야에 새하얀 것이 가득 들어찼다.

“엥.”

그것은 공작의 장갑이었다.

어리둥절해져 공작을 올려다보자 그는 어딘지 서늘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어딜…….”

무슨 소리람.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며 공작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삼키더니 순순히 손을 치워 주었다.

한쪽에서 후작이 헛웃음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생각보다 중증이구먼?”

왜 다들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는 거지?

괜히 따돌림당하는 기분에 입술을 삐죽이는데 후작이 내게 말을 붙였다.

“공녀. 우리 제리가 마음에 드나?”

갑자기 저런 걸 왜 물어보나, 싶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내 든든한 황금 동아줄이 될 사람이니.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심술궂은 웃음을 띠며 공작을 힐긋 일별하더니 불쑥 물었다.

“그러면 친구 말고 결혼 상대로는 어때?”

“넹?”

이게 설마…… 그건가? 혼인 동맹?

순간 설마 싶었던 나는 후작의 얼굴에 서린 기대감을 읽는 순간 평정심을 되찾았다.

두 번은 안 속는다. 딱 봐도 공작을 놀리려고 저러는 거구먼, 저 아저씨.

하지만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공작이 다시 내 눈을 가렸다. 이번엔 두 손이었다.

그가 이를 악문 채로 사납게 말을 씹어 뱉었다.

“미친 새낀가.”

오…… 욕한다, 욕해.

신기한 기분이 되어 공작을 흘끔거리는데 그가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입고 있던 외투를 내 머리 위로 덮어 주고는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푸르르 털어 외투 틈으로 밖을 빼꼼 내다보았다.

「돌았나, 후작. 선을 지켜라.」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시는지.”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혼인 강행은 범죄다.」

“그래서 공녀에게 직접 물어보고 있잖습니까?”

후작은 어쩐지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희희낙락하며 반박했다.

와그작.

그러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시선을 올려 보았더니 공작이 쥐고 있던 깃펜이 박살 나 있었다.

저, 저게 손힘으로 부러지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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