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분명 낮에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저 정도로 기운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잠깐 자리를 비웠던 몇 시간 동안 제르비스의 생명력을 얼마나 빨아먹은 것인지, 지금의 악마는 어지간한 악령보다 더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불현듯 섬뜩한 살기가 어린 시선이 이쪽에 꽂혔다.
<너……!>
악마는 막을 새도 없이 레일라를 들이받아 날려 버리고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셀레나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테리!>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바닥에 넘어진 채 손을 뻗는 셀레나, 반쯤 너덜거리는 손을 움켜쥐고 달려오는 레일라의 모습.
거기에 코앞까지 닥친 악마의 날카로운 손톱까지.
‘죽는다!’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제르비스의 몸을 껴안듯 그 위로 엎어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린 것이 벌써 죽느니 마느니 하기는. 넌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다, 꼬맹이.>
‘어?’
어딘지 묘하게 귀에 익은, 심술궂음이 배어 있는 목소리가 바람처럼 귓가를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키야아악!>
직후 속이 한차례 크게 울렁이는 것과 동시에, 악마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휙 들었다. 그리고 곧장 대경했다.
“이, 이, 이게 뭐야……?”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양손을 내려다보다가 한발 늦게 기겁하며 양손을 탈탈탈 털어 보았다.
그러나 온몸을 감싸고 있는, 연한 푸른빛의 빛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테리?>
<저게 무슨…….>
셀레나와 레일라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두 사람은 내게 달려오려던 것조차 잊고 제자리에 굳어져 있었다.
입만 뻐끔거리던 내 귓가에 가늘고 높은 신음이 들려왔다.
<아, 안 돼……! 내, 존재가……. 마신이시여…….>
흠칫해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통스럽게 바닥을 구르는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어?”
어리둥절해 눈을 깜박이던 중, 악마의 몸에서 서서히 검붉은 기운이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흐물흐물 녹아내리듯 형태 자체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끝내는 연푸른 빛 덩이 형태가 되었다.
저게 뭐람?
<캥!>
그 순간, 빛 덩이에서 고양잇과 짐승의 울음이라고 할 법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악마가 정말로 순수한 ‘표범’이었다면 낼 법한 소리라고 해야 하나.
허공으로 떠오른 빛 덩이는 신이 난 듯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리고…….
“엥?”
팟, 하고 전등의 불을 끄듯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푸른 빛 덩이가 사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희미한 빛도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테리!>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셀레나가 내게 달려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내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앗, 나 괜찮…….”
괜찮은데, 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문밖이 시끄러워지는가 싶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공녀! 혹시 여기 있습니까?”
흰 방문이 활짝 열리며 다급한 기색의 아메트리스 후작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열린 문 너머.
한 손을 어정쩡하게 앞으로 뻗은 채 돌처럼 굳어 있는 발레리안 에버딘 공작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공녀. 이 밤중에 이게 무슨……! 놀랐잖습니까!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후작은 제르비스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쪽 귀로 흘러들어 왔다가 반대쪽 귀로 고스란히 빠져나갔다.
나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공작의 눈에 시선이 붙들린 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한 말 다…… 들었나?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분명 계획대로라면, 지금 이곳에 뛰어 들어온 것은 후작 한 명이어야 했다.
거리상으로라도 공작은 지금으로부터 오 분쯤 후에 도착해야 하는데!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눈이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공작은 곧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허리를 굽혀 내 얼굴을 걱정스레 살피더니 펜을 움직였다.
「테리, 방에 없어서 걱정했잖니. 왜 여기 있는 거야?」
‘휴.’
다행이다, 못 들었나 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헤헤 웃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제리한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럼 진작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어휴, 오밤중에 이게 무슨 팔자에도 없는 운동인지.”
아메트리스 후작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투덜거렸다.
“인사를 마치셨으면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죠. 제가…….”
“그런데 제리가 조금 전에 후작님한테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었는데.”
“……예?”
아메트리스 후작은 내 말에 움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티끌 하나 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제리한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왔을 때 깨어 있더라고요! ‘혹시 아빠가 오기 전에 내가 잠들면 이렇게 전해 줘’라고 했어요.”
제르비스는 낮에 쓰러진 이후로 지금까지 쭉 혼수상태였으니 지금 이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후작과 단둘이 말할 기회를 잡으려 하는 것뿐이기에 달리 뒷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후작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 아이가 뭐라고 했습니까?”
“으음, 꼭 둘만 있을 때 전해 달라고 했는데…….”
나는 우물쭈물 대꾸하며 일부러 공작을 한번 흘긋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다만 두 사람, 이곳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소후작이 잠에서 깰 듯싶으니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
“아, 그렇지. 응접실로 가죠, 공녀.”
그렇게 나는 아메트리스 후작과 응접실에 단둘이 남겨졌다.
나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후작이 복잡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찻물 위로 길게 한숨을 뱉어 낸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제리 녀석, 그래도 잠깐이나마 깨어난 것을 보니 위험한 고비는 넘긴 모양이군요.”
손등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짙고 쓴 안도가 배어났다.
나는 작은 찻잔에 담긴 우유를 호로록 들이켜며 덤덤히 대꾸했다.
“제르비스가 앞으로 아플 일은 없을 거예요.”
“……방금 뭐라고…….”
후작은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내던 자세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달칵.
나는 일부러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고 전에 없이 또렷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작님. 만약 제가 공작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예?”
후작은 내가 입을 연 직후부터 내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한갓 어린아이의 헛소리로 비칠까 봐, 다시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저는 유령을 볼 수 있어요. 목소리를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있죠.”
이것이 내가 생각해 낸 최선이었다.
제르비스 아메트리스를 살려 내고, 그것이 나의, 그러니까 에버딘 공작가의 덕이라는 것을 알리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후작은 끔찍이 아끼는 아들의 목숨을 살려 준 내 비밀을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제르비스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 그 가정을 확신으로 굳혔다.
“제르비스에게 악한 유령이 들러붙어 있었어요. 유령이 붙은 사람은 이유를 알 수 없이 앓다가, 결국 목숨을 잃게 되죠.”
후작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마 내가 말한 증상이 그간 제르비스가 보였던 증상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겠지.
“몰래 제르비스의 방에 숨어들어 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유령을 떼어 냈으니 제르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래처럼 건강해질 거예요. 아, 물론 밥도 잘 챙겨 먹고, 잘 자야 할 테지만요.”
말이 이어지는 내내 후작은 멍한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간 입을 뻐끔거리다가, 마른세수를 했다가,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렸다가, 끝내는 체념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그래, 믿기지는 않지만 당장 리안이 저 상태가 된 것도 그렇고……. 젠장,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후작은 이런 말을 내뱉는 스스로가 미쳤다는 양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이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